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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전통사찰 102] 봉수산 기슭에 위치한 ‘대련사’
  • 윤여금 기자
  • 등록 2023-04-26 02:10:59
  • 수정 2024-04-02 04:3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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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여금 기자] 대련사는 백제 의자왕 16년(656) 나·당연합군과 싸우다 전사한 장병들을 기리기 위해 창건한 사찰로, 가까이 있는 임존성 안에 연못과 우물이 있어 ‘대련사’라 이름을 붙였다. 1975년 법당인 원통보전을 해체, 복원했을 때 ‘극락보전(極樂寶殿)’이라고 쓴 현판이 발견돼 ‘극락전’이라고 이름을 바꿨다. 



    ▲ 수령 600년 


     ▲ 예산 대련사(禮山 大蓮寺)(충청남도 문화재재료 제177호)



















대련사(大蓮寺)는 656년(백제 의자왕 16년)에 의각(義覺)이 창건한 사찰이라고 전하며, 가까이에 있는 임존성 안에 연못(蓮塘)과 우물(蓮井)이 있어서 ‘대련사’라고 붙여진 이름이라고 전한다. 


1836년(헌종 2년)에 보월(普月)이 수선당(修禪堂)을 중수했으며, 1849년에는 사찰의 모습을 새롭게 했고, 1975년에 법당인 원통보전을 해체, 복원했을 때 대들보 속에서 발견된 1849년(도광(道光) 29년)에 쓴 '대련사법당중수상량문'이 발견됨으로써 사찰의 내력이 확인됐다. 


현존 건물로는 극락전과 산신각, 요사채 등이 있다. 이중에서 정면 3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인 극락전(極樂殿)은 1975년까지‘원통보전’이라 했으나, 해체 보수할 때 이 건물 뒤쪽에서‘극락보전(極樂寶殿)’이라고 쓴 현판이 발견되어 법당의 이름을 바꿨다.


         ▲예산 대련사 비로자나불 괘불도(禮山 大蓮寺 毘盧遮那佛 掛佛圖)(보물제2006호)/사진 문화재청 


대련사 비로자나불 괘불도는 1750년(영조 26) 축명, 사혜 등 4명의 화승이 조성한 것으로, 세로로 긴 화면에 비로자나불을 중심에 배치하고 좌우에 문수보살과 보현보살을, 아난존자와 가섭존자를 상하로 그려 오존(五尊) 형식을 취한 구도이다. 


축명을 비롯해 이 괘불 조성에 참여한 화원들은 대부분 1741년(영조 17) ‘천안 광덕사 삼세불도 및 괘불도’를 제작한 인물들로서, 얼굴에 비해 좁은 어깨, 뾰족한 육계, 턱이 둥글고 살진 보살의 얼굴, 길쭉한 귀 등에서 공통적인 화풍(畵風)을 찾아 볼 수 있다. 


일목요연한 구도와 날씬하고 비례가 적당한 인체표현, 붉은색, 하늘색, 분홍색 등 밝고 부드러운 색채의 사용 등은 18세기 전반 충청도 지역 불화 양식을 계승했음을 잘 보여준다.


19세기 이전 조성된 비로자나불 괘불도는 남아있는 예가 거의 없으며, 현존하는 작품은 석가모니불, 노사나불과 함께 삼신불(三身佛)로 구성된 것이 일반적이다. 


이 괘불도는 유례가 드믄 오존(五尊)으로 구성된 작품이자 18세기 중엽 충청도지역의 괘불 제작 경향이 잘 반영된 작품으로서 조선 후기 불화 연구에 중요한 의의가 있다.







    ▲ 대련사 삼층석탑(大蓮寺三層石塔)(충청남도 문화재자료 178)


대련사 경내에 자리하고 있는 이 석탑은 2층 기단(基壇) 위로 탑신(塔身)을 올린 모습이다. 아래층 기단은 1매의 네모진 널돌로 하여 바닥돌과 겸하고 있는 단순한 형태이다. 위층 기단 윗면에는 탑신의 1층 몸돌을 괴기위한 받침을 두었다. 탑신의 몸돌은 각 층마다 모서리에 기둥 모양의 조각을 두었다. 1층과 2층 지붕돌은 경사면의 경사가 급하게 처리되어 있고 네 귀퉁이는 들림이 없이 완만하며, 밑면에는 1층이 2단, 2층이 3단이고 3층은 다시 2단의 받침을 두었는데, 마모된 부분이 없어 후대에 보완된 것으로 보인다. 꼭대기에는 머리장식을 받치던 네모난 받침돌만 남아 있다.


현재 탑신은 4개의 몸돌과 4개의 지붕돌로 이루어져 있는데 전체적인 모습이 부자연스럽고, 3층 지붕돌이 다른 부분과 재질이 달라 후대에 와서 탑을 변형한 것으로 보인다. 


높직한 탑신받침이나 두꺼운 지붕돌 처리 등으로 보아 고려시대에 세운 것으로 짐작되며, 탑에 관한 구체적인 내용은 알 수 없다.





   ▲ 산신각


한국 사원 전각 가운데 하나로서 한국불교의 토착화 과정을 알려주는  증거가 된다. 산신은 원래 불교와 관계가 없는 토착신이나, 불교의 재래신앙에 대한 수용력에 의하여  호법신중(護法神衆)이 되었다가, 후대에 원래의 성격을 불교 안에서 찾게 된 것이다.


산신각에는 호랑이와 노인의 모습으로 묘사한 산신을 봉안하거나, 이를 탱화(幀畫)로 그림만 모시기도 한다. 산신신앙은  산악숭배신앙과 관련이 깊지만, 우리나라 불교사의 초기 및 중기의 사찰에서는 산신각을 찾아볼 수 없다. 산신각이 대웅전보다 높은 곳에 위치한 것은 산신각을 더 높이 받들어서 그렇게 한 것이 아니고, 산신이라는 특성상 산 쪽에 더 가깝게 위치를 정한 것이며, 산신은 불법을 수호하는 수호신 중의 하나로 개념이 정해졌다./사진-윤여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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