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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여금의 여행이야기 21] 해발 130m에 넓은 평지를 포용해 축조된 '서산 해미읍성'
  • 윤여금 기자
  • 등록 2023-06-03 09:10:18
  • 수정 2023-06-10 20:47: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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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여금 기자] 충남 서산시 해미면에 있는 조선전기에 돌로 축조된 서산 해미읍성(사적 제116호)은 1414년(태종 14)에 충청병마절도사영이 덕산(德山)에서 이곳으로 옮겨진 뒤 1651년(효종 2)에 청주로 이전할 때까지 군사전략상 중심지였다. 읍성은 1491년(성종 22)에 축조됐으며, 영장(營將)이 머물면서 서해안 방어를 맡았었다. 


우리나라의 읍성 가운데 가장 잘 남아 있는 유적으로 면적 196,381㎡, 성벽의 둘레는 2㎞ 정도인데, 남문인 진남문(鎭南門)과 함께 동문, 서문이 있다. 성 안에는 동헌(東軒), 객사, 내아, 옥사, 청허정, 국궁장, 민속가옥, 전통주막 등이 자리해 있다.



    ▲ 서산 해미읍성(瑞山 海美邑城) (사적 제116호)


서산 해미읍성은 고려 말부터 국정이 혼란한 틈을 타서 왜구가 해안지방에 침입, 막대한 피해를 입히므로 인해, 이를 효과적으로 제압키 위해 조선 태종17년(1417)부터 세종3년(1421) 사이에 덕산(德山)에 있던 충청병마도절제사영(忠淸兵馬都節制使營)을 이 곳에 옮기고자 축성(築城)됐고, 효종3년(1652)에 병마절도사영(兵馬節度使營)이 청주로 옮겨가기 전까지 230여 년간 군사권을 행사하던 성으로 있다가 병마절도사영이 청주로 이설되고, 해미현의 관아가 이 성으로 옮겨졌다. 1914년까지 겸영장(兼營將)이 배치되는 호서좌영으로서 내포지방의 군사권을 행사하던 곳이었다.


해발 130m인 북동쪽의 낮은 구릉에 넓은 평지를 포용해 축조된 성으로서, 성벽의 아랫부분은 큰 석재를 사용하고 위로 오를수록 크기가 작은 석재를 사용하여 쌓았다. 성벽의 높이는 4.9m로서 안쪽은 흙으로 내탁됐으며, 성벽 상부 폭은 2.1m 정도이다. 

 

    ▲ 성벽


    ▲ 성벽


    ▲ 성벽


    ▲ 성벽


    ▲ 성벽


성벽의 둘레는 2㎞ 정도인데, 남문인 진남문(鎭南門)과 함께 동문, 서문,남,북 4곳에 있는데 네모지게 잘 다듬은 무사석(武砂石)으로 쌓았고, 주 출입구인 남문은 아치모양으로 이뤄져 있다.


    ▲ 진남문


    ▲ 진남문


    ▲ 진남문


    ▲ 진남문


    ▲ 진남문


    ▲ 진남문


   ▲ 진남문


    ▲ 동쪽 잠양루


    ▲ 동쪽 잠양루


    ▲ 동쪽 잠양루


    ▲ 서쪽 지성루


    ▲ 서쪽 지성루


    ▲ 서쪽 지성루


    ▲ 서쪽 지성루


    ▲ 서쪽 지성루


    ▲ 서쪽 지성루


   ▲ 서쪽 지성루


   ▲ 북쪽



이 읍성 안에는 동헌을 비롯하여 아사(衙舍) 및 작청(作廳) 등의 관아 건물들이 분포 해 있고, 천주교 박해와 관련된 유적도 일부 남아 있다. 


    ▲ 동헌


    ▲ 동헌


    ▲ 동헌


    ▲ 동헌


    ▲ 동헌


     ▲ 동헌 담벼락


    ▲ 호서좌영


    ▲ 호서좌영

 

    ▲ 호서좌영


동헌은 관리가 공무를 수행하는 장소라는 뜻이다. 이 곳 동헌은 병마절도사를 비롯한 현감겸영장의 집무실로서 관할지역의 일반 행정업무와 재판 등이 행해진 건물이다. 해미 현감겸영장은 인군 12개군, 현의 병무행정과 토포사를 겸한 지위였다.


    ▲객사


    ▲객사


    ▲객사


   ▲객사


객사는 건물의 중앙 정청에 궐지가 새겨진 위패를 모시고 매월 초하루 보름에 관아의 대소 관원들이 국왕에 대한 예를 올렸고, 양편 익실은 조정이나 상부에서 파견된 관원 및 귀빈들의 숙소로도 사용했던 곳이다.  이 객사는 발굴조사와 고증을 거쳐 1999년 7월에 복원했다. 



    ▲ 내아


    ▲ 내아


    ▲ 내아


내아는 해미읍성 관리와 그 가족들이 생활하던 관사 건물이다.


   ▲ 옥사



    ▲ 옥사


    ▲ 옥사


    ▲ 옥사


   ▲ 순교 기념비(殉敎紀念碑)


순교기념비의 뒷면에는 병인박해(1866)에서 무진박해(1868) 때 1,000여명이 순교했다고 전한다.


해미읍성은 우리나라의 천주교와 깊은 연관이 있는 곳이다. 교도들을 투옥하고 문초 했던 역사적 사실을 바탕으로 터만 남아 있던 옥사를 발굴 작업 한 뒤 1935년 간행된 ‘해미 순교자 약사’의 기록을 토대로 복원했으며, 재현했다. 내옥, 외옥이 있고, 각각 정면 3칸 건물로 남녀의 옥사가 구분돼 있다. 


1790년부터 100여 년간 많은 천주교 신자들을 국사법으로 규정해 투옥 및 처형을 했는데, 김대건 신부의 증조부도 이곳에서 옥고를 치르고 순교했다고 전한다. 


#조선시대의 형벌


조선시대에는 명나라의 '대명률'을 적용, 형벌은 태, 장, 도, 유, 사의 5형였고, 법체계는 태조가 즉위하면서 그 기틀을 갖추었고, 성종 때 경국대전에서 구체화됐다.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는 당시 절도사영이 해미현의 동쪽 3리에 자리했는데, 돌로 쌓은 성으로 둘레는 3,172척이고, 높이는 15척이며, 우물 3곳과 군창(軍倉)이 설비되어 있다고 기록했다. 


'해미읍지(海美邑誌)'에는 성벽의 둘레가 6,630척이고, 높이가 13척이며, 성벽을 돌출시켜 쌓은 치성(雉城)이 380 남문은 3칸인데 무지개 모양의 문인 홍예(虹霓)와 2층의 다락을 두었다고 하였고, 동문과 서문은 3칸이지만 북문은 없다고 하였으며, 우물이 6곳으로 성 밖에는 호(壕)가 없다고 기록했다.  

 

해미읍성은 우리나라의 읍성 가운데 가장 잘 남아 있는 유적이다. 읍성의 표본으로 삼기 위해서 성 안에 자리했던 민가와 학교 등을 철거하고 연차적인 보수 공사를 실시해 1974년에 동문, 서문이 복원됐고, 1981년 성내 일부를 발굴한 결과 현재의 동헌 서쪽에서 객사와, 현재의 아문 서쪽 30m 지점에서 옛 아문지가 확인됐고, 관아외곽석장기지(官衙外廓石牆基址)가 발견됐다. 


    ▲ 해자


   ▲ 해자


서산 해미읍성은 성 밖은 ‘해자’로 둘렀는데 발굴조사를 통해 북쪽 해자의 일부를 복원했다. 기록에는 성벽 위에 ‘여장’이 있었다고 돼 있으나 지금은 남아있지 않다. 


성곽 둘레는 적이 쉽게 접근하지 못하도록 성 주변에 탱자나무를 심었다. 흔히 ‘탱자성’이라는 뜻으로 ‘지성’이라고도 한다. 


1589년에 이순신 장군이 군관으로 10개월간 근무한 적도 있고, 조선 후기 실학자 다산 정약용이 해미에서 유배생활하면서 시를 남기기도 했다. 


1910년 읍성 철거령에 따라 시설물은 모두 철거됐고, 성안으로 민가가 들어서면서 옛 모습이 거의 사라졌다. 그러다가 1973년부터 정비에 들어갔고, 1997년부터는 발굴이 이루어져 현재의 모습으로 복원됐다.



#조선시대 주요 병영 깃발


청룡기는 진영의 왼편 문에 세웠고, 청색이며 좌군이 지휘했다.

백호기는 진영의 오른편에 세웠고, 백색이며 우군이 지휘했다.

주작기는 진영의 전문에 세웠고, 적색이며 전군이 지휘했다.

현무기는  진영의 후문에 세웠고, 뱀에 감긴 거북 형상으로 흑색이며 후군이 지휘했다.  

동사기는 진영의 중앙에 세웠고, 나는 뱀의 형상으로 황색이며 중군이 지휘했다.

문기는  날개 달린 호랑이 형상으로 군영의 네문과 중앙에 각 2개씩 모두 10개를 세웠다.

초요기는 북두칠성이 그려져 있어 '칠성기'라고도 하며, 대장이 장수를 부를 때 세웠다.

순시기는 관원의 명령하달 시 위엄을 더했으며, 군중에서 죄지은 자를 적발, 처벌하는 순군이 소지했다.

영기는 장수의 명령(군령)을 전달할 때 사용했으며, 명령을 전달 받을 때 반드시 소지했다. 

수자기는 진중이나 영문이 뜰에 세우는 대장에 딸린 군기로 대장이 있는 곳임을 표시했다.



#조선시대 무기


    ▲  불랑기


불랑기는 서양에서 만들어져 중국으로 전한 서양재 호기로, 임진왜란 때 명나라 원군이 가져와 전투에 사용했다. 여러 개의 자포를 연속 사격할 수 있는 발전된 신식무기였다. 


   ▲ 대자군포


대자군포는 포신은  철 주물로 제작됐고, 포신에 두터운 아디를 두룬 것은 포의 강도 저하를 보완하기 위한 것으로 여겨진다. '국조오레'의 장군포와 유사해 '대장군'라고  불리지만 , 그 기원이나 정확한 명칭은 확인되지 않았다. 


   ▲ 별대완구


별대완구는 그 생김새가 음식그릇과 비슷해서 붙여진 이름으로 단석과 비진천뢰 등을 장치한다. 주로 공성요 화포로 고려말부터 사용됐으며, 조선후기에 개발된 것으로 말한다.

화포, 천자총통, 신기전기화차, 검차, 투석기, 운제 등이 자리했다.

 


       

▲조선시대 병장기 


환도는 조선시대 대표적인 칼이다. (칼집에 띠돈이 달려 있어 혁대나 끈을 이용하여 몸에 패용했다. 검은 양날의 칼로 실제 사용하기도 하며, 의례와 상징적 의미로도 사용됐다.


쌍수도는 전체 길이가 6척 5촌으로 약 130~137cm의 긴 칼이다. 월도 칼날이 초승달 모양으로 생겼다. '언월도'라고도 불렀다. 협도 칼날이 날렵하게 생겼고, 자루가 긴 칼로 보병이 사용했다.


기창은 깃발이 달린 창이다. 

장창은 자루가 진 창으로 보병이 많이 사용했다.

요구창은 긴 창날 옆에 갈고리가 달려 있다.

당파는 창날이 세 개로 되어 있고, 화전을 쏠 수 있게 넓고 평평하다.

무차는 창 날 옆의 가지가 역으로 달려 있다.


편곤은 도리깨 모양의 타격무기이다.

마상편곤은 말 위에서 사용하는 도리깨 모양의 타격무기이다.

기창은 말 위에서 사용한 창이다.


철퇴는 짧은 자루 끝에 무거운 쇳덩어리가 달린 타격무기이다.

봉은 자루가 긴 무기의 기본이 된다.

방패는 적의 무기로부터 몸을 방어할 수 있는 무기로 공격도 가능하다.

부월은 도끼이다. 실제 싸움에서 사용되기도 하며, 권위를 상징하기도 한다.


    ▲ 무궁화 동산


무궁화는 우리나라 국화이며, 아욱과의 내한성 낙엽활엽관목으로 꽃은 홑, 반겹, 겹꽃 등이고, 꽃 색깔도 흰색, 분홍, 빨강, 보라 등 다양하다. 개화시기는 7월부터 10월까지로 꽃이 100여 일간 지속된다.


    ▲ 청허정




    ▲ 청허정


    ▲ 청허정


돌계단을 오르면 정자 바로 아래까지 모두 108계단을 만나게 되며, ‘맑고 빈마음으로 다스리라’는 의미를 담아 청허정을 세워 병마절도사의 청렴한 마음가짐을 느낄 수 있다. 


청허정은 자연을 배경으로 특별히 지은 건물로 성종 22년 충청병마절도사 조숙기가 세웠던 것을 다시 복원한 것이다. 


조선전기 대표 학자 성현(1439~1504)의 개인 문집‘허백당집’에 유래를 전한다. 


조선 초기의 해미읍성은 충청도 육군사령부 역할을 하는 충청병영성으로 최고 책임자는 병마절도사였다. 조숙기가 병사로 부임하여 해미읍성을 수리하면서 소나무숲이 우거진 뒷동산에 청허정을 지었다. 


이 곳에 온 관리들은 무예를 익히거나 휴식을 취하는 등, 시를 짓고 글을 남겼다. 1494년 방문한 충청감사 조위(1454~1503)는 청허정 주변 소나무와 멀리 보이는 바다의 풍경에 대한 시를 남겼고, 권오복(1467~1498)은 문집 ‘수헌집’에 절도사와 수령이 일을 마치고 청허정에 모여 지은 시를 전한다. 


1579년 충청병영에 10달 근무했던 이순신, 1790년 해미로 귀양왔던 다산 정약용도 청허정에 머물렀을 것이다. 1872년 ‘해미현지도’는 옛터로 표기 된 것으로 보아 1800년대에 없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일제강점기는 이 자리에 일본식 신사가 세워졌다가 광복 후 철거됐고, 1976년 복원한 후 2011년 다시 정비했다. 

성의 둘레에는 적이 쉽게 접근하지 못하도록 탱자나무를 돌려 심어서 ‘탱자성’이라는 별칭이 있었다.


해미읍성은 그 명칭을  2011년 7월 28일에 ‘서산 해미읍성’으로  변경했다.


    ▲  대나무숲(산책로 195m)


청허정 옆 대나무숲은 자연발생된 것으로 추측되며, 바구니를 비롯한 생활용품이나 건축, 농사 자재 등 실생활에 다양하게 활용됐고, 병영성임을 고려할 때 방어용 목책이나 창, 활 등의 군사용으로도 사용됐을 것이다. 


대나무숲은 음이온 발생으로 상쾌한 느낌과 풍부한 산소방출로 건강증진과 심신의 안정을 준다고 전한다. 


       

    ▲ 회화나무 (기념물 제172호) (수령 300년 추정)


회화나무는 1790년에서 1880년대에 이곳 옥사에 수감된 천주교 신자들을 끌어내어  이나무의 동쪽으로 뻗어있던 가지에 철사줄로 머리채를 매달아 고문했다고 전한다. 철사줄이 박혀있던 흔적이 현재까지도 희미하게 남아있다. 폭풍으로 부러져 외과수술을 시행했으나 부패돼 2004년 4월에 외과수술 및 토양개량 등을 해 보호관리 하고 있다. 

   



#교황방문기념


조선후기 천주교 박해와 관련해 회와나무, 옥사, 자리개 돌 등 관련 유적이 남아 있으며, 2014년 8월 15일 제266대 프란치스코 교황이 이곳을 방문해 <제6회 이시아 청년대회> 참가한 23개국 6,000여명의 아시아 젊은이들에게 평화와 희망의 메시지를 전하는 폐막미사를 접전했다. 


교황의 방한은 역대 세 번째로 1989년 요한 바오로 2세의 방한이후 25년 만였다. 방한 기간에 프란치스코 교황은 ‘윤지충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 123위 시복미사’를 주례했고, 복자로 추대된 124위는 한국 천주교의 초기 순교자들로서 해미에서 순교한 3위(한언민, 이보현, 김지후)가 함께 복자 품위에 올랐다. 


# 자리개 돌


자리개 돌은 해미읍성 서문 밖 수구 위에 놓여 있던 돌다리로 1866년 병인박해 때 천주교 신자들을 자리개돌로 처형했던 사형도구이다.

자리개 돌은 1956년 6월 서산동문동성당으로 옮겨 보관했다가 이후 1986년 8월 본래에 있던 읍성 서문 밖으로 다시 옮겨져 안치돼 오다가‘ 해미 도시계획도로가 개설됨에 따라 2009년 1월 여숫골(해미순교성지)에 보존하고 있다.


    ▲ 우물

     

     ▲ 우물


    ▲ 국궁장


    ▲ 국궁체험


    ▲ 민속가옥



    ▲ 맷돌


    ▲ 부엌


    ▲ 안방


     ▲ 뒷방


조선시대 민가로 말단관리인 서리의 집이다. 부엌 1칸, 방 2칸으로 전형적인 서산지역의 3칸 초가집이다. ‘-자형’의 평면구성은 우리나라 농촌민가의 공간배치로서 부엌, 방들이 일렬로 배치돼 있다. 모든 방이 남쪽으로 출입구를 둬 쾌적한 생활공간이 되도록 했다. 방에 갖춘 간단한 문구류가 집주인의 직업을 말한다.  


        ▲ 전통주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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