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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여금의 여행이야기 23] 가야산 북쪽에 위치한 ‘서산 보원사지 5층석탑’
  • 윤여금 기자
  • 등록 2023-06-10 21:0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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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여금 기자] 충남 서산 보원사지(사적 제316호, 면적103,164㎡)는 운산면 용현리에서 금동여래입상이 출토돼 백제 때 창건 가능성도 있는 절터이다. 오층석탑(보물), 당간지주(보물)등의 문화재가 남아 있다.

 

      ▲ 서산 보원사지(瑞山 普願寺址)(사적 제316호  )(통일신라말 ~고려초)


서산 보원사지(사적)는 상왕산 보원마을에 있는 절터로 2006년부터 2017년까지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에서 발굴조사를 진행했다. 보림사(寶林寺)에 있는 보조선사 체징(普照禪師 體徵)의 탑비에 ‘체징이 보원사에서 구족계‘를 받았다(827년)는 기록에서 처음으로 보원사의 이름을 확인할 수 있다. 이 사찰의 역사를 알 수 있는 사지(寺誌)나 사적기(事蹟記) 등의 기록이 남아 있지 않아 창건 연대는 확실치 않으나, 보원사지(寺址)에서 출토된 금동여래입상이 6C중엽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돼 백제 때의 사찰일 가능성도 있다. 


최치원이 남긴 ‘법장화상전(法藏和尙傳)’에 웅주(熊州) 가야협(伽耶峽)의 보원사는 의상(義湘)을 계승한 화엄십사(華嚴十寺)중의 하나라고 언급돼 있어 종파가 ‘화엄종’임을 알 수 있고, ‘법인국사보승탑비’에 승려 1,000여명이 머물렀다는 기록으로 당시에는 큰 절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조선시대의 ‘신증동국여지승람’에 “보원사가 상왕산에 있다”고 하여 16세기까지 계속 유지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1619년에 발간된 서산과 태안의 지방지 성격을 갖는 ‘호산록’(湖山錄)에서 보원사가 강당사(講堂寺)로 바뀐 것으로 기록돼 있다. 


보원사는 조선 초기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과 조선 광해군 때 편찬된 ‘호산록(湖山錄)’에 기록이 남아 있어 정확한 폐사 시기는 알 수 없지만 ‘임진왜란을 전후’하여 폐사된 것으로 추정 된다.


1996년에 실시된 지표조사에 의해 가람배치가 어느 정도 밝혀졌는데 석교(石橋)를 지나 중문(中門), 석등(石燈), 석탑(石塔), 금당(金堂), 강당(講堂)과 승탑(僧塔)이 일직선으로 배치되어 있으며, 금당과 강당 좌우로 회랑(回廊)이 배치되었던 것으로 판단된다.





이 보원사지에서 출토된 유물로는 금동여래입상(국립부여박물관 소장)과 고려시대에 제작된 철불좌상(국립중앙박물관 소장) 등이 있다. 


                                                  ▲ 금동여래입상/문화재청 제공


                                       ▲ 철불좌상/문화재청 제공


현재 보원사지에는 1963년 보물로 지정된 석조와 당간지주, 오층 석탑, 등이 남아 있어, 불교사 연구에 주요한 유적이다.












        ▲ 서산 보원사지 오층석탑 (瑞山 普願寺址 五層石塔)


보원사(普願寺)터 서쪽의 금당터 앞에 세워져 있는 고려시대의 석탑이다. 보원사는 1959년 국보인 서산 용현리 마애여래삼존상이 발견되면서 학계의 관심이 모아지고 있다. 


서산 보원사지는 탑의 규모 및 형태로 보았을 때 오층석탑은 사찰의 주 탑일 가능성이 매우 높기 때문에, 서산 보원사지의 창건 연대와 탑의 건립 시기는 동일할 것으로 추정된다.


보원사지 오층석탑은 1968년과 2003년에 각각 한 번씩 모두 두 번의 해체.보수 작업이 진행되었다. 1968년 해체 복원 당시 사리 내갑(內匣).외갑.사리병.납석소탑(蠟石小塔) 등이 출토되어 국립부여박물관에 전시돼 있다.


보원사지에는 오층석탑, 당간지주등이 남아있어 당시 사찰의 규모가 매우 컸음을 알 수 있다.


오층석탑은 높이가 9m 되는 큰 탑이다. 2단의 기단(基壇) 위에 5층의 탑신(塔身)을 올린 형태이고, 정상에 상륜을 올린 일반형 석탑이나 부분적으로 통일신라 탑의 특징을 보이고 있는 고려 전기의 석탑이다. 아래기단 옆면에는 한 면에 3 사자상, 4면에 12 사자상을 돋을새김했고, 윗기단 옆면에는 팔부중상(八部衆像)을 2구씩 8부중상을 돋을새김했다. 8부중상은 불법을 지키는 여덟 신으로 통일신라와 고려에 걸쳐 석탑의 기단에 많이 나타난다. 


탑신부에는 1층 몸돌 각 면에 문짝 모양을 새겼으며, 지붕돌이 넓어진 것은 백제계 석탑 양식의 특색이 잘 나타나 있다. 옥개석 받침을 4층으로 한 것은 신라계 양식을 가미한 것이다. 


상륜부 꼭대기에는 네모난 노반(露盤:머리장식받침)이 남아 있고, 그 위로 머리장식의 무게중심을 고정하는 철제 찰주가 높이 솟아있다.


오층석탑은 목탑에서 석탑으로 변환되는 과정의 탑 형식이며, 아래층 기단에 사자상을, 위층 기단에 팔부중상을 새긴 것이 특징적이며, 백제계 양식과 신라계 양식이 동시에 나타나 있고, 옛 백제 지역에 통일신라부터 고려 전기 사이 세워진 전형적인 양식의 장중하고 안정감이 느껴지는 고려 전기의 우수한 석탑이다. 


# 오층석탑의 8부중상


오청석탑의 8부중상에는 용야가, 간나라, 마후라가, 천, 가루라, 야차, 건달파, 아수라 등이 있다.



#건달파


건달파는 머리에 사자관을 쓰고 하프모양의 악기를 연주하는 모습이며, 음악을 좋아하는 중으로 우리나라에서 좋아하는 사람을 '건달'이라 하는 것은 이에서 유래된 것이다. 


    


#아수라


아수라는 운문대 위의 좌상이다. 삼면육비의 연꽃무늬 보관에 뒤로 높이 쳐든 양손에는 두 개의 큰 공이 올려져 있고, 뒤의 두 번째 오른손에 작은 막대기가 잡혀 있고, 왼손에도 어깨 위에 있는 같은 크기의 막대기를 잡으려 한다. 삼도가 있고, 여덟 개 보주로 된 목걸이가 부드러워 보이는 통견에 양손은 합장하고, 왼손에 두겹의 팔찌가 아름답다. 정면상은 우아하고 아름다운 여인상이다. 얼굴이 셋이고 팔이 여섯 개의 형상이다. 우리가 질서가 없이 흐트러진 상황을 '아수라장'이라 함은 이에서 유래된 것이다. 


 








       ▲ 서산 보원사지 당간지주(瑞山 普願寺址 幢竿支柱)(보물)(통일신라시대)

    

당간지주는 사찰에서 기도나 법회 등 의식이 있을 때, 절 입구에 당(幢)이라는 깃발을 달아두는데, 이 깃발을 달아두는 장대를 '당간(幢竿)'이라 하며, 당간을 양쪽에서 지탱해 주는 두 돌기둥을 '당간지주'라고 한다.


서산 보원사지의 높이 4.2m의 두 지주는 절터 동쪽에 원래 위치한 원래 모양 그대로 동서로 70㎝정도 간격을 두고 마주보며 서 있다. 안쪽면에는 아무런 장식이 없으나, 바깥면은 가장자리를 따라 넓은 띠가 돋을새김 돼있으며, 기둥의 윗부분은 안쪽에서 바깥쪽으로 모를 둥글게 깎아 놓은 형태이고, 아래로 내려올수록 폭이 약간 넓어져 안정감이 느껴진다. 지주의 마주보는 안쪽에는 꼭대기에 네모난 홈을 중앙에 팠고, 아래부분에도 네모난 구멍을 뚫어 당간을 고정시키도록 하였다. 당간을 받치던 받침돌은 직사각형으로 2단이며, 윗면의 중앙에는 당간을 끼우기 위한 둥근 구멍이 파여져 있다.


이 당간지주의 기단부가 없어진 것을 화강암으로 새로 보강했다. 주위에 흩어져 있는 여러 가지 석재들로 보아 원래 직사각형의 기단부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양식과 조각수법이 화려하고 장식적이며 발달된 모습이어서, 통일신라시대의 작품으로 보이고, 주변의 유물들이 통일신라 말에서 고려 초에 걸쳐 만들어진 것으로 이를 뒷받침해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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