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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여금의 여행이야기 24] 서산 상왕산 서쪽에 위치한 ‘문수사’
  • 윤여금 기자
  • 등록 2023-06-21 09:27: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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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여금 기자] 문수사는 상왕산 서편에 위치한 고찰로 금동여래좌상의 복장에서 (충목왕2년)1346년이란 문자가 나와서 극락보전이 고려시대에 세워지고 조선시대 다시 지어진 것으로 보인다. 금동여래좌상(충남도 유형문화재)은 아쉽게도 도난당해 현재 소재를 알 수 없고, 복장유물만(보물)이 남아 수덕사 성보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당우로는 극락보전(충남도 유형문화재), 나한전, 산신당, 요사채가 자리해 있다. 












       ▲ 서산 문수사 극락보전(瑞山 文殊寺 極樂寶殿, 고려시대, 충청남도 유형문화재 제13호)


문수사는 서산 상왕산 서편 아래 태봉리에 위치한 고찰로 처음 지어진 창건 연대를 알 수 없으나, 1973년도에 극락보전 내에 안치된 금동여래좌상의 복장에서 발견된 발원문(發願文)에 고려 충목왕2년(1346)이란 기록문이 나와서 그 이전에 지어진 것으로 보고 있다. 법당인 극락보전도 고려시대에 세워지고 조선시대에 다시 지어진 건물로 보인다.


앞면 3칸.옆면 2칸 규모이고, 지붕 옆면이 사람 인(人)자 모양인 맞배지붕집이다. 지붕 처마를 받치면서 장식을 겸하는 공포가 기둥 위와 기둥 사이에도 있는 다포식 건물이다. 


앞면과 뒷면의 기둥 사이마다 2개의 공포를 배치했고, 옆면에는 공포를 두지 않아서 맞배지붕건물의 일반적인 옆면 설계방식을 따르고 있다. 


건물 외부공포의 우설 사이에 연꽃을 조각해 장식하고 내부는 운궁형(雲宮{形)을 이루고 있는데 끝부분이 길게 안으로 돌출되어있다. 



내부에는 중앙에 불단을 배치하고 그 위에는 화려한 닫집을 달았다. 바닥에는 우물마루를 깔아서 의식을 행할 때나 도를 닦는데 도움이 되게 했다.


특히 내부의 닫집과 단청문양은 건축당시의 원형대로 보존돼 있어 단청 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된다. 


극락보전은 조각수법이 매우 수려하고 웅장하며, 여래상을 비롯해 삼세불상과 나한상·각종 탱화 등 많은 유물을 보관하고 있다.


      ▲서산 문수사 금동여래좌상 복장유물(瑞山 文殊寺 金銅如來坐像 腹藏遺物, 고려시대,보물)


서산 문수사 금동여래좌상 복장유물은 충청남도 유형문화재 제34호로 지정된 금동여래좌상에서 나온 것인데, 1993년 불상은 도난당하고 복장유물만(지류-17종 504점, 직물류-37종 77점, 기타 8종)이 전해지고 있는데, 수덕사 성보박물관에 소장돼있다.


               ▲  인왕호국반야바라밀경(仁王護國般若波羅蜜經, 보물)/문화재청 제공


전적류 복장유물에서 인쇄자료 중 ‘묘법연화경’과 ‘인왕호국반야바라밀경(仁王護國般若波羅蜜經)’은 각각 각필과 석독구결(釋讀口訣)이 있어 국어사 연구에 귀중한 자료로 평가된다. 


     ▲  발원문 (보물)/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제공


필사자료 중 ‘至正六年(1346)’의 연기(年記)를 지닌 발원문과 복장물목은 불상의 조성연대와 복장시기 및 복장된 품목을 확인할 수 있는 중요한 자료이다. 이 외 각종 다라니와 충전용지 등이 있는데, 이들 모두 1346년에 함께 납입된 것이다. 


이들 전적류 복장유물은 국어학, 서지학, 불교사, 미술사 등 다양한 분야에 걸쳐 학술적으로 의미 있는 자료임과 동시에 문화재적 가치 또한 높은 것으로 평가된다.


                  ▲  답호 (보물)/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제공


복장유물 가운데는  ‘답호’는 고려말기 ‘포(袍)’의 연구에 매우 중요한 유물로 평가되고, 직물류 역시 보존상태가 좋아 고려시대 염색 및 전통색상을 알 수 있는 귀중한 자료이다.


            ▲  팔엽통 (보물)/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제공


이 외, 팔엽통, 방울, 구슬류 등의 유물이 함께 발견돼 전해진다.









     ▲ 서산 문수사 소조나한상 일괄(瑞山 文殊寺 塑造羅漢像 一括, 조선시대, 충청남도의 문화재자료 제417호      20점) (2011년 지정)


문수사 소조나한상 20점은 나한전을 마련해 안치하고 있다. 나한상은 모두 민머리의 승형에 가사를 걸치고 있으며 머리 위로 옷을 덮어 쓴 복두의 나한과 호랑이가 있는 복호나한을 비롯해 거북, 파초, 염주를 잡고 있거나 합장 또는 무릎을 감싼 포슬 나한 등 일반적인 조선후기 나한상의 도상을 따르고 있다.


대부분 나한상의 밑면 내부에는 복장물이 들어 있는데 발원문 없이 약 6.5cm의 오보병을 황초폭자가 싼 형태에 봉서 되어 있다. 황초폭자는 연녹색의 실로 묶어 있는 상태이고 앞 부분에 “南”과 같은 방위 표시가 되어 있다. 오보병은 오방색으로 묶인 상태이나 각기 분홍, 파랑, 보라, 소라색 등으로 방위를 정확하게 알 수 없는 상태이며 봉서를 풀면 “證師 雪浩 湜封”이라는 묵서가 쓰여 있다. 


20구의 작품들은 내부에 목심이 남아 있어 소조불로 추정되고, 현재 두껍게 칠해진 채색으로 원래의 모습과는 다소 다른 것으로 판단되며 17세기말경 제작됐을 것으로 추정된다.


문수사 나한상은 새로 칠한 채색으로 고졸함이 없으며 크기도 작은 편이지만 다양하면서도 자연스러운 자세와 지물 등에서 조선후기 나한상의 형식을 따르고 있는 작품으로 복장물에서 비록 발원문은 없지만 황초폭자를 싼 봉서에 묵서로 적힌 ‘증사 설호’라는 이름에서 법식을 주관한 승려의 이름과 더불어 대체적인 제작연대도 짐작할 수 있다. 

 

20구의 작품들은 조선후기 나한상의 도상 및 형식을 따르고 있고 조선후기 17세기말 경의 작품으로 불교사적 가치가 높다.


        ▲ 문수사 지장시왕탱화(충청남도 유형 문화재 제173호)/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제공


지장시왕탱화는 지장삼존과 명부의 10명의 대왕인 시왕을 한 화면에 함께 그린 불화이다. 주로 사찰의 대웅전과 같은 주 불전 혹은 암자의 법당 한쪽 벽에 걸어 천도 의식을 거행한다. 


문수사 지장시왕탱화는 1774년 수화승 설훈의 주도하에 수해, 정관, 영인 등이 조성했다. 2003년 복장 발원문 및 복장 유물과 함께 충청남도 유형 문화재 제173호로 지정됐다.


지장시왕탱화는 액자형으로, 화면 크기는 133×157㎝이며 비단 바탕에 채색했다. 높은 연화 대좌에 결가부좌한 지장보살은 승형 머리에 검은색 투명 두건을 쓰고 있으며 왼손에는 육환장, 오른손에 수정 구슬을 들고 있다. 지장보살 무릎 아래에는 젊은 승려의 모습을 한 도명존자와 제왕형 인물인 무독귀왕이 협시하고 있다.


지장보살 오른쪽에는 면류관과 원류관을 쓴 제왕 모습의 시왕(十王) 가운데 제1, 제3, 제5, 제7, 제9대왕이 자리하고 있으며 그 맞은편에는 제2, 제4, 제6, 제8, 제10대왕이 있다. 시왕 위로는 권속인 판관, 사자, 귀졸, 선악동자가 배치되어 있다. 화면 가운데 지장보살은 주변의 시왕과 권속에 비해 크게 그려 화면에서 존재감을 두드러지게 표현하고 시왕과 권속은 존격에 따라 크기를 작게 표현했다.


좌우에 시왕은 열을 맞추면서도 존상 간의 간격을 자연스럽게 배치하고 자세, 시선, 지물 등을 다양하게 처리했다. 


배경으로 상단에는 지장보살의 두광에서 뻗친 오색 서기가 그려져 있고 천공(天空)에는 구름이 가득하며, 바닥에는 돗자리가 표현되어 있다. 화면 밖 상단에는 복장낭(腹藏囊)과 풍패(風佩)가 그려져 있다.


문수사 지장시왕탱화는 조선 후기 지장시왕도의 일반 형식을 따라 존상을 구성하면서도 설훈이 시도했던 새로운 표현이 반영됐다. 


문수사 지장시왕탱화는 본존을 크게 강조하고 시왕의 자세와 표정을 다양하게 묘사했고 현실 공간처럼 바닥에 돗자리를 표현하는 등 새로운 표현이 시도됐다. 특히 바닥의 돗자리 표현은 18세기 말에서 19세기 전반에 서울.경기 지역에서 활동했던 화승이 선호하던 기법이다.


설훈은 18세기 중엽에서 후반 서울·경기 지역에서 활동했던 화승으로 ‘문수사 지장시왕탱화’는 서울.경기 지역의 화승이 충청남도까지 내려와 활동하였음을 보여주는 자료이자 설훈의 초기 화풍을 보여준다. 


문수사 금동여래좌상/ 문화재청 사진 제공

               ▲ 문수사 금동여래좌상 (文殊寺 金銅如來坐像, 고려후기)/(충청남도 유형문화재 제34호)/문화재청 


충청남도 서산시 상왕산의 문수사 극락보전에 모셔져 있던 금동불로 금동여래좌상으로 1974년 충청남도의 유형문화재 제34호로 지정됐다. 1993년 도난으로 현재 소재는 확인할 수 없다. 불상 안에 있던 복장유물은 2008년 보물로 지정됐다.


서산 문수사 금동여래좌상은 높이 69㎝로 머리에는 작은 소라 모양의 머리칼을 붙여 놓았고, 머리 정면에 있는 삼각형의 문양이 특이하다. 갸름한 얼굴에 가늘게 뜬 눈, 오뚝한 콧날,미소 띤 단정한 입 등의 세부표현이 섬세하고 단아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옷은 양 어깨를 감싸고 있으며, 적절히 가해진 옷주름, 왼쪽 팔꿈치의 Ω형 주름과 노출된 가슴 아랫부분에는 안에 입은 옷과 띠매듭의 표시가 분명하다. 그리고 승각기의 치레 장식 등 모든 점이 장곡사 불상과 동일한 양식을 보여 주고 있고, 조성 연대도 같다. 고로 같은 조각장에 의하여 조성되었거나 혹은 동일 유파의 작품일 가능성이 짙다.


손모양은 하품중생인(下品中生印)의 수인(手印)으로 양 손의 엄지와 가운데 손가락을 맞대고 있어서 설법하는 모습을 표현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균형 잡힌 체구에 앉은 자세는 (길상좌) 양 발을 무릎 위로 올리고 발바닥이 하늘을 향하고 있는 모습인데 편안하면서도 자연스러운 모습이다.


금동여래상에서는 오색 헝겊, 의류, 향료, 금옥석 등과 함께 지정 6년(고려 충목왕 2년, 1346)의 연호가 쓰인 기록이 나와 불상이 만들어진 정확한 연대를 알 수 있고, 300여 명이나 되는 불상 조성에 관련된 인물 등이 밝혀졌다.


문수사 금동여래상은 1346년 작인 장곡사 금동약사여래좌상(보물,1963년 지정)을 비롯한 고려후기 불상 계열의 단아(端雅)한 양식을 대표하는 작품이다.










이 삼층석탑은 아직 문화재로 등록되지않아 아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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