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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여금의 여행이야기 26] 청산리 전투에서 승리의 금자탑을 세운 ‘김좌진 장군’
  • 윤여금 기자
  • 등록 2023-08-09 20:39:34
  • 수정 2023-08-09 20:40: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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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여금 기자] 김좌진 장군은 홍성 출신으로 대한제국 후기의 독립운동가로 1905년 을사보호조약이 체결된 후 청년학우회의 간부를 지냈고, 1913년에 대한제국 광복단에 가입해 자금을 모으다가 체포돼 2년 6개월간 복역한 후 1917년 만주로 망명했다. 이후 13년간 평생을 항일전투에 몸을 바쳤다. 1920년 청산리전투에서 일본군을 섬멸했고, 1929년 한족총연합회를 조직해 주석에 취임하고, 만주에 거주하는 동포의 교육, 민생에 주력했다. 그러나 대일 항전을 준비하던 중 1930년 공산당원의 흉탄에 순절했다. 1962년 대한민국 건국공로훈장을 받았다. 이곳에 본채와 문간채, 사랑채를 복원했고, 사당, 전시관을 건립했다.



        ▲ 백야 김좌진 장군 어록비


와룡천이 주변에 흐르고 있는 이 곳은 1920년에 청산리 전투를 승리로 이끌고 대한제국 말기의 독립운동가였던 백야 김좌진 (1889~1930) 장군이 태어나서 성장한 곳이다. 장군은 1889(고종26년)김형규의 둘째아들로 태어나서 어려서부터 용맹하고 총명했다. 1904년 해주오씨 오숙근과 결혼했다.


1905년에 가노(가정의 노예)를 해당시켰고, 그들에게 전답을 무상으로 공급했다. 1905년 을사보호조약이 체결된 후 청년학우회 등의 간부를 지냈고, 1907년 호명학교를 세워 신학문을 교육했다. 1908년에 기호층학회 장학재단을 설립했고, 한성신문 이사로 취임했다. 19011년에는 대한제국 광복단에 가입해 독립군 사관학교 설립자금 모금 중 체포돼 2년 6개월간 투옥(서대문 형무소에 수감)됐다. 


그후 광복회에 참여해 활동했고, 광복단에 가담해 항일 독립투쟁을 펼쳤다. 1917년 광복회 부사령으로 만주에 파견돼, 1919년 2월에 대한독립선언서에 서명하고 ‘북로군정서’를 조직하고 총사령이 됐다. 1920년 10월 청산리전투에서 일본군(3,300여명)을 섬멸했는데, 이것이 독립 전투상 승리의 금자탑을 세운일로 기록되는 청산리전투이다. 1925년 김혁과 함께 결성된 신민부 창건했고, 군사부위원장 및 총사령관으로 취임해 무장투쟁을 벌였다. 1929년 북만주지역 한인사회 통합을 위해 한족총연합회를 결성해 중앙집행위원장으로 활동하다가 1930년 1월 주중청년협회 회원인 공산당 청년당원(박상실에게) 암살.순국했다. 


1934년에 충남 홍성군 서부면 이호리에 밀장했다가, 1957년에 충남 보령시 청소면 재정리로 이장했다. 1962년 3월 1일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으로 추서했다. 


       ▲ 김좌진 장군 생가지(기념물 제76호, 1989년12월 지정. 1,205㎡.  충남 홍성군 갈사면 행산리 소재)




            ▲ 시도기념물 제76호-김좌진 장군 생가지- 사랑채


          ▲시도기념물 제76호-김좌진 장군 생가지- 현판


            ▲ 시도기념물 제76호-김좌진 장군 생가지- 사랑채 내부


         ▲ 시도기념물 제76호-김좌진 장군 생가지(안채.사랑채.광)




          ▲ 시도기념물 제76호-김좌진 장군 생가지- 안채


        ▲ 시도기념물 제76호-김좌진 장군 생가지- 안채 내부




        ▲ 시도기념물 제76호-김좌진 장군 생가지- 초상화


          ▲ 시도기념물 제76호-김좌진 장군 생가지- 친필


        ▲ 시도기념물 제76호-김좌진 장군 생가지- 광


           ▲ 시도기념물 제76호-김좌진 장군 생가지- 마구간


가옥은 안채와 사랑채, 광이 따로 있고, 밖에는 마구간이 있다. 안채는 앞면 8칸.옆면 3칸의 기와집으로 서쪽을 향하고 있다. 왼쪽부터 2칸 부엌이 있고, 아랫방과 윗방 각 한 칸씩 있으며, 통칸의 대청이 있고, 그 위에 방이 한 칸 있고 끝으로 툇마루가 있다. 방 앞으로 툇마루가 있는데 맨 끝방 주위에는 툇마루를 한 칸 높여 누각처럼 만들었다. 마당 한쪽에 우물이 있으며 밖에 있는 마구간은 화장실과 마구를 3칸 집에 만들었다.


터만 남아 있던 곳에 1992년에 안채와 문간채, 사랑채를 복원했고, 사당, 기념관을 건립했다.




         ▲ 백야 김좌진 장군 기념관



       ▲ 백야 김좌진 장군 기념관- 내부



#김좌진의 가문(신 안동김씨)


김좌진의 가문인 신 안동김씨는 고려의 개국공신이 돼 안동을 식읍으로 하사받은 김선평을 시조로 한다. 조선 중기 병자호란 때 강화도에서 순절한 김상용과 주전파의 중심인물 인 김상헌 형제를 배출했다. 김상용의 차남 김광현이 홍주목 오촌동 (현 갈산면 오두리)에 정착하면서 이 집안을 갈산김씨 또는 갈뫼김씨로 불렀다. 조선 후기 여류시인 김호연재, 구한말 갑신정변을 일으킨 개화파 지도자 김옥균, 홍주의 병장 김복한, 독립운동가 김종진 등도 김좌진과 같은 가문이다.












        ▲  와룡각


       ▲ 청산문



         ▲ 김좌진 장군 사당



김좌진 장군 사당은 구국의 이념으로 혼신을 다하다 순국하신 장군의 독립운동 정신을 기리기 위해 1997년부터 건국 사업을 추진해 오다가 생가에서 약 300m 떨어진 이곳에 세웠다. 


장군은 홍성 갈산면 행산리에서 1889년 음력 11월 24일에 김형규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백야 장군은 17세에 자신의 ‘집노비들을 해방’시키고 ‘무상으로 땅’을 나눠 줬고 80칸이나 되는 집을 ‘학교 교사로 내주고’ 장군 자신은 현재의 생가지로 이사해 생활했다. 장군의 집터는 지금까지도 갈산고등학교의 부지로 사용하고 있다. 또 1907년에 ‘호명학교’라 하는 사립학교를 설립해 신교육으로 구국 계몽운동을 실시했고, 1920년에는 청산리 전투에서 일본군을 대파하는 전승을 거두었다. 그러나 1930년 1월 24일 공산주의자가 쏜 흉탄에 맞아 41세에 순국했다. 


이곳은 매년 장군의 독립운동정신을 후세에 길이 전하기 위해 ‘추모대제’를 지내고 있다. 


          ▲ 김좌진 장군비


김좌진 장군비는 항일 독립운동에 일생을 받친 짐좌진 장군의 업적을 기념하기 위해 세운비이다. 1949년 홍주읍성에 세워졌다가, 2007년 12월 현재의 위치로 옮겼다. 이 비에는 김좌진 장군의 생애와 나라 안팎에서 했던 항일 독립운동의 실적과 자취가 기록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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