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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궐이야기 30] '예를 펼친다'는 뜻의 경복궁 흥례문
  • 박광준 기자
  • 등록 2023-08-26 10:42:30
  • 수정 2024-04-15 17:27: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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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경복궁 흥례문 영역


[박광준 기자] 경복궁 흥례문은 경복궁 광화문과 근정문 사이에 위치한 경복궁의 중문(中門)으로, 건립 당시에는 오문(午門)이라고 불렸다. 세종 대에 이르러 '예(禮)를 널리 펼친다.'는 뜻의 홍례문(弘禮門)라는 명칭이 지어졌다. 이후 1867년(고종 4) 홍례문을 중건할때, 청(淸) 건륭제(乾隆帝)의 이름인 홍력(弘歷)에서 '홍(弘)자'를 피하기 위해 흥례문(興禮門)으로 문의 명칭을 고쳤다.


흥례문은 1395년(태조 4) 경복궁을 창건하면서 처음 지어졌다. 임진왜란을 겪으면서 흥례문을 포함한 경복궁의 대부분의 전각이 전소됐고, 1867년(고종 4) 경복궁을 중건하면서 흥례문도 새로 지었다.


1910년 한일병합조약 이후 일제에 의해 경복궁이 훼손되기 시작했다. 일제가 조선식민통치 5주년을 기념하기 위한 조선물산공진회를 개최하면서 흥례문을 비롯한 주변 행각(行閣)과 전각들이 모두 철거됐고, 이후 이 자리에는 조선총독부 청사가 세워졌다.





1990년대 들어서 경복궁 복원 사업이 본격적으로 진행됐다. 역사바로잡기의 일환으로 1996년에 조선총독부 청사를 철거하고, 훼손된 경복궁의 전각들을 복원했다. 경복궁 1차 복원사업은 1990년부터 2010년까지 21년 동안 진행됐는데, 흥례문, 영제교, 유화문를 포함한 흥례문 권역은 2001년 10월 26일 완공돼 일반에 공개됐다.    


흥례문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2층 목조 건축물이다. 지붕은 다포집 우진각지붕으로 용마루와 추녀마루에 회반죽을 발라 양성바름을 했고, 망새와 용두, 잡상 등을 설치해 지붕 위를 장식했다. 흥례문의 계단 중앙 어칸에는 답도(踏道)가 설치돼 있고, 문의 동북쪽 기둥 바깥쪽에는 건물 상층으로 오를 수 있는 내부 계단이 설치돼 있다.


# '예를 행하는 데에는 조화로움이 중요하다'는 뜻의 경복궁 '유화문'



경복궁 유화문은 경복궁 흥례문의 서쪽 행각에 위치한 문으로, 경복궁 서쪽에 위치했던 궐내각사(闕內各司) 권역과 흥례문 권역을 연결하는 통로로 이용됐다. 건물의 명칭인 '유화(維和)'는 '논어(論語)' 학이편의 한 구절을 참고한 것으로 '예를 행하는 데에는 조화로움이 중요하다.'라는 의미이다.



경복궁 유화문의 최초의 건립 시기는 명확하지 않으나, 1867년(고종 4) 경복궁을 중건하면서 처음 지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근정문의 앞 마당에 해당하는 흥례문 권역은 조참, 교서 반포 등 각종 의례와 행사의 공간으로 활용되었는데, 궁궐의 행정업무를 담당했던 궐내각사의 관원들이 흥례문 권역으로 이동하기 위한 통로로 유화문을 사용했다. 유화문은 왕이 공식적인 행차에도 사용됐다. 당시 왕의 편전이었던 수정전에서 흥례문 권역으로 이동하거나, 궐 밖으로 나갈 때 수정전의 정문인 숭양문을 거쳐 유화문을 지났다. 왕이 공식적으로 지나던 문이었기 때문에 유화문의 중앙에는 어도(御道)가 깔려있다.


유화문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1층 목조 건축물이다. 지붕은 팔작지붕으로 용마루와 박공마루, 추녀마루에는 회반죽을 발라 양성바름을 했고, 망새와 용두, 잡상 등을 설치해 지붕 위를 장식했다. 유화문의 중앙에는 왕이 지나는 길인 어도가 깔려있다.


# 흥례문(興禮門)과 외행각(外行閣)


기별청

서행각의 북쪽 단에는 유화문(維和門)이 있고, 그 북쪽에 4간의 기별청(奇別廳)이 자리 잡고 있다. 유화문은 어간이 15척, 측간이 14척, 외3포·내5포라 한 것으로 보아 근정문보다 작은 규모의 문으로 궁궐 서쪽에 있는 빈청(賓廳)과 연결되는 문이고, 기별청은 2간의 온돌방과 2간의 청으로 구성된 정방형 평면을 이루고 있다. 이곳은 승정원에서 처리한 일을 아침에 기별지(奇別紙)에 적어서 반포하는 일을 맡아보는 관아이다.


* 빈청(賓廳)과 그 주변 건축(周邊建築)


홍례문 서행각에 있는 유화문(維華門) 밖으로 나아가면 따로 쌓은 담장 속에 정면 5간, 측면 2간의 빈청이 있고, 그 서쪽에 정면 4간, 측면 2간의 건물이 동향으로 자리 잡고 있다.


빈청은 대신들이나 비국(備局-備邊司)의 당상들이 모여 정사를 의논하는 곳으로, 본래 비변사는 군국(軍國)의 사무를 맡아보던 아문이었으나, 명종 10년에 상치아문이 됐고 임진왜란을 거치면서 의정부(議政府)를 대신해 최고아문이 됐다. 정조 때 규장각에 그 직능을 넘겨주었다가 고종 2년 의정부와 합치됐다. 따라서 이곳은 궐내에 들어와 있는 최고의 아문(衙門)인 셈이다.


평면은 중앙에 정면 3간 측면 2간의 대청을 두고 좌우로 방 두 개씩을 두었다. 이 빈청의 서쪽 동향한 건물도 중앙이 청이고 좌우에 방을 들인 것으로 보아 빈청에 딸린 건물임이 틀림없다. 빈청의 북쪽 터에도 정원(政院)이라 이름하는 건물이 자리 잡고 있고 이를 행랑으로 둘러싸고 있다. 정원은 왕명의 출납을 맡아보던 관아인 승정원(承政院)이다.


협성문정원의 건물은 ㄷ자형 평면이 두 개가 겹친 E자형을 이루고, 중앙에 청을 두고 좌우에 방을 두었다. 또 중앙의 날개와 뒤쪽 날개에는 누를 두어 공무를 수행하면서도 휴식을 취할 수 있게 했다. 정원 주위를 둘러싸고 있는 행랑의 남쪽은 방과 청으로 구성하고, 동쪽은 청과 방 이외에도 고(庫)들을 두었다. 정원의 서쪽에는 방형으로 둘러쌓은 담장 속에 정면 7간 측면 2간의 건물이 남향해 있고, '당후'(堂后)라 명기됐다. 빈청의 서쪽에는 따로 쌓은 담장 속에 '선전관청'(宣傳官廳)6)인, 정면 7간 측면 2간의 장방형 건물이 남향으로 자리 잡고 있다.


* 내반원(內班阮), 검서청(檢書廳) 및 옥당(玉堂)과 그 주변 건축(周邊建築)


근정전 서행각의 밖, 정원(政院)의 북쪽에는 행랑으로 둘러싸인 내반원, 검서청, 옥당이 자리 잡고 있다.


용성문 내반원은 내시부(內侍府)로 태조 원년에 궁내에 둔, 대궐 안의 감선(監膳), 전명(傳命), 소제 등의 일을 맡아보던 환관의 관부(官府)이고, 검서청은 서자출신의 학자를 대우하기 위해 규장각(奎章閣)에 둔 벼슬로서 각신(閣臣)을 도와 서적의 교정과 서사(書寫) 일을 맡아보던 곳이다. 정면 4간 측면 1간 반으로, 청 3간, 방 1간과 전면 반 간 폭의 퇴로 구성됐다. 동행랑은 고(庫) 6간을 두고 그 앞마당 행랑에 청과 방, 헛간, 고를 두었다.


옥당은 홍문관(弘文館)의 별칭이고, 홍문관은 삼사(三司)의 하나로 내부의 경적(經籍), 문한(文翰)과 왕의 자문을 맡은 관아이다.


검서청과 옥당의 북쪽에는 궐내의 의료를 전담하는 의약청(醫藥廳)과 침의원(鍼醫院)이 있고, 또 입번억석(入番憶昔), 장무관직소(掌務官直所), 검서청(檢書廳), 내각(內閣)이 자리 잡고 있다. 의약청과 침의원은 방과 아궁이부엌, 청으로 구성되고 주변을 한 간 폭의 행랑으로 둘러싸는데, 특히 동쪽으로 내의원의 의관들이 있던 정면 7간 측면 2간의 큰 전각이 청과 방, 주(廚)로 구성되어 자리 잡고 있다. 의약청, 침의원의 북쪽 터 동쪽에는 번을 드는 관리들이 머무는 곳인 입번억석(入番憶昔)이 있다. 정면 7간 측면 2간 반으로 동쪽에서 서쪽 5간까지가 청(廳)이고 나머지 2간이 방이다.


서쪽의 장무관직소(掌務官直所)는 각 관아의 장관 밑에서 직접 사무를 관장하던 관원들이 번을 들 때 머무는 곳으로, 중앙에 청(廳)을 두고 좌우에 방을 배치한 정면 5간 측면 2간의 전각이고, 서쪽 뒷방과 연결돼 북쪽에 자리 잡은 내각(內閣)과 연이어져 있다.


'북궐도형' 부분북쪽 경회루의 남쪽 넓은 터에는 동쪽에 검서청이 자리 잡고, 서쪽에 내각(內閣)이 자리 잡고 있다. 검서청은 옥당 동쪽에 자리 잡은 검서청과 같은 부서이고, 서쪽의 내각은 규장각(奎章閣)의 별칭이다. 이들은 모두 청과 방으로 구성된 장방형의 평면을 이루고 있으며, 주위를 청과 방으로 구성된 행랑으로 둘러싸고 있고, 특히 내각의 남행랑 밖에는 또한 줄의 행랑이 있어 이 행랑이 장무관직소와 연이어져 있다.


* 내사복(內司僕)과 주변 건축(周邊建築)


궁성의 남서쪽 모퉁이에는 서십자각이 서 있고 그 안쪽 방형의 넓은 터를 남과 서는 궁장으로, 동과 북은 행각으로 둘러막았는데, 안에 몇 채의 장방형 건물들이 있다. 이들 중 남향한 건물만이 '내사복'(內司僕)이라 편액됐다. 내사복은 외사복과 함께 사복시[司僕寺]에 속한다. 이는 태조 원년에 설치한 것으로 궁중의 여마(輿馬), 주목(廐牧)에 관계된 일을 맡아보던 관아로, 고종 2년에 폐했다. 이 내사복과 동행각의 수십 간은 마랑(馬廊)이고, 몇몇 간들이 청, 방, 주(廚)이며, 또 북행각의 동쪽도 마랑이다.


북행각의 마랑이 끝나는 서쪽 단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정면 8간 측면 2간의 장방형 건물인 덕응방(德應房)이 자리 잡고 있고, 그 서쪽 따로 쌓은 담장 안에 신당(神堂) 한 채와 그 앞으로 전사청(典祀廳)이 자리 잡고 있다. 덕응방(德應房)은 사복시의 한 분장으로 공주와 옹주 이하의 승교를 맡아보던 관아이고, 신당과 전사청은 죽은 말들의 혼령들에게 제사 지내던 곳이다.


* 누국(漏局)과 그 주변 건축(周邊建築)


궁궐 내 서쪽 궁장 안쪽으로, 내사복부터 궁성의 서문인 영추문(迎秋門) 사이에는 누국과 일영대, 훈국군영직소(訓局軍營直所)가 자리 잡고 있다.


누국(漏局)은 세종 때 자격루(自擊漏)를 설치해 시간을 알려 주던 보루각(報漏閣)으로 경복궁 중건 때 이곳에 자리 잡은 것이다. 훈국군영직소에서 훈국은 서울의 수비를 담당하던 훈련도감을 가리키는 것으로 이에 속한 군대가 궐내에 주둔하던 곳이 훈국군영직소이다.


* 영재교는 '궁궐이야기 3' 참조바랍니다. 


참고문헌/한국건축사, 주남철 고려대학교출판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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