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 메일전송
[한국의 향교 9] 고려-조선시대 지방 유학을 교육하기 위해 설립된 ‘향교1’
  • 박광준 기자
  • 등록 2023-09-07 07:24:37
  • 수정 2023-12-21 16:00:39

기사수정
  • 교의 재정

양천향교/박광준 기자] [박광준 기자] 향교는 고려와 조선시대의 지방에서 유학을 교육하기 위해 설립된 관학교육기관으로, 국도(國都)를 제외한 각 지방에 관학이 설치된 것은 고려 이후에 이뤄졌다. 고려는 중앙집권체제를 강화하기 위해 3경(京) 12목(牧)을 비롯한 군현에 박사와 교수를 파견해 생도를 교육하게 했다. 이것이 향학(鄕學)의 시초이다. 


'증보문헌비고'에 의하면, 고려시대에 건립된 최초의 향학은 서경의 학원(學院)으로 그 뒤 1003년(목종 6)까지는 최소한 3경 10목에 향학이 설치됐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이들 향학을 곧 향교의 전신으로 파악할 수 있는 것인가는 아직 분명히 밝혀지지 않고 있다. 그러나 1127년(인종 5)에 인종이 여러 주(州)에 학교를 세우도록 조서를 내렸고, 각 군현에 학교가 설립된 여러 사례들이 나타남을 감안할 때 이 시기를 향교의 성립기로 보는 것은 무리가 아니라고 생각된다. 


향교의 성격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당시의 시대적 배경에 대한 검토가 요청된다. 삼국 중 가장 먼저 고대국가 수준에 도달한 고구려가 왕경에 태학(太學)을 두어 유학을 가르쳤다든지, 이어 백제가 박사를 두고 신라가 대학(大學)을 세웠던 사실은 새로운 정치이념과 권력구조의 모형을 유교 속에서 확보하고자 한 것이었다. 그 뒤 통일신라기를 거쳐 고려에 이르면 지금까지 상징적 기능만으로 이해되던 유교적 이념과 유교적 정치구조의 내용이 새로운 시대의 지표로 인식되기에 이르게 되는 것이다. 한국의 향교를 취재하기에 앞서 먼저 향교의 재정, 교관, 교생, 교육과정, 건물의 구성과 배치에 대해 살펴보기로 한다.<편집자주>


고려 초 왕건(王建) 이후 역대 고려왕들은 이 새 정치이념인 유교를 새 사회의 질서의 근간으로 정치권력구조를 조직하려 했다. 이러한 역사의 추세 가운데에서 왕경이나 왕실의 정치구조뿐만 아니라, 기층사회까지 유교이념을 침투시키려는 정치의지가 나타났을 때 그것을 구현하는 기구로 향교제도의 필요성이 증대된 것이다. 이러한 하향적인 통치방향과 함께 신라 말 고려 초에 등장한 지방호족들의 정치.사회활동에 대한 일정한 명분을 주고 있는 것이 바로 유교였다. 따라서 그들은 스스로 학원을 세워 유교를 교육했다. 즉 5소경에 이른바 학원의 설치는 하향적 관제체제 속에서 나타난 것이 아니고 호족들 자신들의 필요에 의해서 설립, 운영된 것으로 이해되는 것이다.


양천향교/박광준 기자]이 학원은 지방사회 내부에서 자기발전의 도구로서 유학교육의 필요가 절실했음을 알려주는 것이다. 이러한 맥락하에서 파악할 때 향교는 상향적.하향적 요구의 합치점에서 나타난 것이다. 그러나 향교는 상향적 역사운동에서 나타난 측면보다는 하향적 운동과정에서 형성된 교육기관으로 파악함이 타당하다.


정치권력이 기층사회에 침투하려는 구체적 역사현상은 군현제가 가장 전형적인 예이다. 따라서 향교는 군현제의 운영과 함께 이해되는 것이 그 실상을 파악하는 데 도움을 받을 수 있다. 그러나 고려시대 군현제의 운영은 후기에 이르기까지 상당한 수의 군현이 속현(屬縣)의 상태로서 외관(外官)이 부재한 상태로 이뤄졌다. 이러한 군현제 운영의 부진상은 향교운영에도 동일한 문제점을 노출하는 것이었다. 성종 때 12목에 외관의 파견과 함께 경학박사.의학박사를 파견했던 것은 지방교육에 대한 관심을 보여주는 것이나 아직 완벽한 지방교육제도가 정착된 것은 아니다. 따라서 향교의 적극적인 유학교육의 면모를 우리 역사에서 나타내는 것은 조선에 이르러 군현제의 재정비와 강력한 운영이 실시되던 시기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밀양햑교한편 향교교육은 과거제도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과거제도는 유학교육의 성과를 수렴하는 제도라고 할 때 지방에서의 유학교육도 과거제도와 표리관계를 이루면서 파악돼야 할 것이다. 고려의 과거제도에는 향공(鄕貢)이라 해 지방에서의 천거가 있었다. 이는 개경과 함께 지방에서의 교육의 실상을 시사하는 것이고, 특히 인종 이후 강화된 향학운영의 자료는 지방군현에서의 유학교육의 면모가 일신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하지만 고려의 모든 시기를 통해 본다면 향교교육의 실태는 군현제의 강화와 함께 실시되는 조선시대의 향교제도와 비교할 수 없는 저조한 수준이다. 고려시대에 하향적 교육정책, 즉 교화적 정책의 토대 위에서 전개되는 유학교육기관으로서 향교의 실상은 오히려 고려의 사사로운 기구에 의해서 운영되는 교육적 성과에 미치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향교는 조선왕조의 성립과 함께 정책적으로 그 교육적 기능과 문화적 기능을 확대, 강화했다고 하겠다. 따라서 향교의 전반적 설명은 조선왕조에서 전개된 역사상을 중심으로 설명되어진다./다음호에 계속


참고문헌 향교[鄕校]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문화재대관'(문화재관리국, 1968), '한국문화사대계'(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소, 1978), '16세기 이후의 향교교육제도'(한동일, '대동문화연구' 17, 1983)

1
  • 목록 바로가기
  • 인쇄


 한국의 전통사찰더보기
 박정기의 공연산책더보기
 조선왕릉 이어보기더보기
 한국의 서원더보기
 전시더보기
 한국의 향교더보기
 궁궐이야기더보기
 문화재단소식더보기
리스트페이지_004
모바일 버전 바로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