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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향교 10] 고려-조선시대 지방 유학을 교육하기 위해 설립된 ‘향교2’
  • 박광준 기자
  • 등록 2023-09-08 12:22:09
  • 수정 2023-12-21 16:02: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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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향교의 재정

강릉향교 대성전[박광준 기자] 향교의 운영을 위해서는 국가의 재정적 지원이 요구된다. 향교의 교사(敎舍) 등 시설물의 설치.보수.유지, 교수관(敎授官)의 후생비, 교생들의 숙식비, 학업활동에 부수되는 제반비용, 그리고 향교를 중심으로 준행되는 석전례.향음례 등에 이르는 비용은 실로 엄청난 것이다. 조선왕조는 막대한 재정투자가 요구되는 향교를 각 군현에 세우고 유학교육의 실시를 위해서 이른바 학전(學田)과 학노비(學奴婢)를 공급했다는 사실만으로도 그 숭유억불적 정책을 살펴볼 수 있다.


# 재정


태종과 세종연간에 지급된 학전과 학노비의 내용은 [표 1] 과 같다. 그러나 이와 같은 학전(禀田과 祭位田 포함)과 학노비가 향교운영에 적정한 수준인가는 알 길이 없다. 서울인 한성에 사부학당의 교사가 세워지고 사학(四學)으로서의 체제가 잡혀진 것이 1430년(세종12) 8월경으로 그 이전에는 사찰(寺刹)을 빌려 교육했던 것으로 미루어보면, 향교가 독립건물을 세우고 학교를 운영하는 데 태종연간에 지급된 국가의 재정적 지원의 규모는 실제 소요되는 선에 훨씬 미치지 못하는 수준이 아니었나 짐작된다.


또한 교수들의 후생문제, 학생들의 숙식문제, 그 밖에 학교의 운영문제를 감당 수 있었느냐는 이들 학전으로 충당했는지는 의문스럽다. 특히 초기 학전의 운영방식을 고려하면 더욱 그러하다. 즉 초기에 학전의 경우는 과전법(科田法) 운영방식을 따랐다면 수조(收租)를 통해서 그 재정수요를 만족시킬 수는 없었다고 할 것이다. 또한 향교운영의 책임을 지는 주체는 수령이었기에 향교의 독립적 운영에 타격이 컸으리라 추측된다. 수령의 책임 아래 운영되는 향교는 자연히 수령의 개별적인 행정능력에 대한 의존도가 컸다. 그러나 조선왕조가 유교를 정치이념으로 채택한 이상 향교에 대한 재정지원을 외면할 형편은 아니었다. 이에 1484년(성종 15)에는 '제읍향교급전절목(諸邑鄕校給田節目)'을 제정했고, 이것이 토대가 되어 1492년에 반포된 '대전속록(大典續錄)'의 호전(戶田).학전조에는 성균관을 비롯해서 주.부.군.현 등에 각각 400결.10결.7결.5결씩을 지급해 수세(收稅)하여 그 재정수요를 수령에게 검색토록 했다.


[표1] 향교의 학전과 학노비



향교의 재정은 개국 초로부터 향교에 급여된 위토(位土) 전답의 수세 외에도 지방관이 분급한 전곡 및 요역(徭役) 그리고 향교에 비축된 전곡의 식리로 충당됐다. 향교가 소유한 전토는 지역에 따라 일정하지 않았다. 언양향교(彦陽鄕校)의 경우 1895년(고종 32) 당시 답(沓) 69두락의 위토를 소유했고, 안의향교(安義鄕校)는 1788년(정조 12) 당시 전답은 7결 77부(負)를 소유하는 등 지역 및 향교별 차이를 보여주고 있다. 학위전(學位田) 이외의 수입원으로는 모군(募軍)의 대납전(代納錢), 어장의 망세(網稅), 그리고 향교경비의 보충을 위해 별도로 마련한 섬학전(贍學田).광학전(光學田) 등 기금의 이식이 있었다.


그 밖에도 중건.중수의 공역이 있을 때에는 관청에서 그 비용을 지급했고 필요하면 유전(儒錢)을 갹출하거나 그 지방 유지의 보조를 받기도 했다. 향교에서 지출되는 비용의 세목은 춘추 석전(釋奠)의 제수(祭需)와 교임(校任)의 공궤(供饋), 백일장과 과거응시에 참가하는 유생에 대한 조전(助錢), 교복(校僕) 등의 삭료(朔料)가 대부분을 차지했다.


# 교관


'경국대전'에는 교수관을 교수(敎授, 종6품)와 훈도(訓導, 종9품)로 구분하고 있다. 조선시대의 군현은 약 330여개 소에 달했으나 수령을 파견하기에도 어려운 실정이었던 조선 초기에는 교수관의 충원에 어려움이 많았다. 그래서 정식 관인이 아니면서 교수직을 감당하는 자들은 교도직(敎導職), 또는 학장(學長) 등의 이름으로 재지(在地) 신분의 생원.진사 중에서 선발해 충원하기도 했다. 그러나 법제상 교수관으로 부임을 해야 하는 도호부 이상의 군현의 교수관은 문과 급제자들 중 삼관[三館 : 성균관(成均館).교서관(校書館).승정원(承政院)]의 권지(權知)들로 교수관을 보임했다. 또는 시기가 좀 늦은 경우이기는 하지만 문신좌천자(文臣左遷者)로 보임하기도 했다.


훈도 또는 학장 등도 생원이나 진사, 최악의 경우는 지방에 사표가 될 만한 사람을 선발해 보임시켰다. 그러나 조선 전기부터 향교교관의 확보에는 많은 어려움이 뒤따랐다. 그 이유는 문과에 합격한 자가 지방의 교관직에 부임하기를 원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또한 생원.진사들도 과거를 통해 중앙의 행정관료로 진출하는 것을 희망했고 교도직에 별다른 매력을 느끼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에 태종.세종대를 거치면서 여러 차례 교관직에 대한 유인책과 논공행상의 방책을 제시했으나 교관직에 대한 기피현상은 근본적으로 개선하지 못했다. 그리하여 중종 때에는 일경(一經)도 이해하지 못하는 자가 군역을 면하려는 방편으로 교관직에 머무르는가 하면 명종은 어느 정도의 학식이 있는 자가 있으면 사회적 신분에 관계하지 않고 학장으로 임명하는 교육책을 제시하기도 했다.


밀양향교 대성전이에 따라 교수관의 배치는 교육적 차원에서 시행되는 예가 허다하게 됐다. 조선 후기에 가면 보다 관료적인 기능의 교관이 나타나기도 한다. 즉 1586년(선조 19)에 보이는 제독관(提督官) 혹은 교양관(敎養官)이라고 하는, 교수관보다 더 관료적인 교관으로서 계수관(界首官)에 해당하는 관원을 도나 향교에 파견해 향교교육을 독려했던 것이다. 그러나 향교교육은 관료적 범주 안에서 정상화될 수 없었다.


이와 같은 상황을 인식했던 조선왕조는 교육기능을 담당하는 교관을 포기함으로써 관료적인 교육정책을 마무리짓는 것으로 나타난다. 즉 영조 때의 '속대전'에서 향교의 모든 교관은 없어지게 된다. 이제는 더 이상 관료적 조직으로 유교교육을 할 필요가 없는 것을 확인한 셈이다. 이에 따라서 유능한 학도들은 강학능력을 상실한 향교를 멀리하고, 서원.서당.정사 등 사학기관을 찾게 됐다.


향교는 이제 문묘의 향사를 하는 관학으로서의 면모를 유지하는 데 급급했고, 지방 양민들의 군역을 피역하는 장소로 전락했다. 조선 말기에 이르러 향교의 강학기능을 회복하기 위해 지방관은 따로 양사재(養士齋).흥학재(興學齋).육영재(育英齋) 등을 향교 부속으로 건립하기도 했고, 1886년에는 향교의 재정으로 관학원(官學院)을 설립토록 지시해 3인의 훈장을 두고 강학에 임하도록 했으나 그 성과 및 지속기간에 대해서는 미지수이다.


# 교생


조선이 신분제 사회임을 전제한다면 향교에서 유학교육을 받을 수 있는 학생들의 사회적 신분은 명백해진다. 즉 16세기에 오면 “향교에는 군역을 담당할 농민, 즉 양민들이 교생이 되고 있어 교생들에게 주어지는 면역(군역)의 혜택을 받고자 하니, 양민들 중 교생이 되는 것을 막아야 한다.”는 비판의 소리가 비등한 것으로 보아, 조선왕조의 양반의 신분만이 향교교육을 받아야 한다는 상식적인 논리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조선왕조의 유교교육은 양인(養人)과 교화라는 양면적 목표를 가지고 집행했던 것으로 보인다. 조선왕조는 개국 초부터 국역의 대상이 되는 신분이라도 누구나 독서를 원하면 향교에서 교육을 받을 수 있는 기회를 허락했던 것이다. 세종 때에 신백정(新白丁)에게 향교입학을 허락한 것이나 조선 초기부터 자주 보이는 농민들에게 향교교육을 허락한 점은 그러한 반증이다.


양천향교 대성전16세기에 와서 실록자료에 ‘교생은 양반이어야 한다.’는 논리의 주장이 보이는 것은 이 시기에 조선왕조의 신분제적 편제가 강화되는 것을 배경으로 상위신분의 양반이 유교교육에 보다 전력해야겠다는 명분적인 뜻이 강한 것이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양반신분층의 배타적인 교육기회의 독점적 성격을 반영한 것이기도 하다. 그러나 교생들의 사회적인 신분은 개국 초부터 이른바 양인 범주에 속하는 사람들이 그 대상이었고, 16세기 이후 강화 양반신분 중심의 사회체제 속에서도 교생은 평민들이 상당수 점유하고 있었다. 이른바 동재(東齋).서재(西齋)로 기숙사의 구별을 나타내기도 하고, 액내(額內)와 액외(額外)로 양반과 평민 교생들을 구분했다.


일단 교생이 되면 그들의 사회신분이 양반이건 평민이건 법제적으로 문제시되지 않는다. 군역의 문제라든지, 과거시험을 응시하는 자격을 얻는다든가 하는 점에서 차별이 있을 수 없었다. 즉 향교에서 학업성적이 우수한 학생은 생원.진사시험 회시에 직접 응시하는 특전을 부여받거나 일강(日講).월과(月課)에 우등한 자는 호역(戶役)을 면제받는다든지 할 때, 다만 교생이라는 신분만이 요구되는 것이지 양반이냐 평민이냐는 문제되지 않았다. 다만 교생들의 신분구성이 다양했던 관계로 나중에 그들의 직업선택에서 차이가 있었던 것 같다. 생원.진사시험에 응시하는 것에서부터 역학생도(譯學生徒)와 각사(各司)의 이서직(吏書職)에 이르는 다양한 직종으로 진출하는 길이 있었다.


개국 초에는 교생의 정원은 부.대도호부.목에 50명, 도호부에 40명, 군에 30명, 현에 15명으로 배당됐으나, '경국대전'에는 이것이 증액돼 각각 90명.70명.50명.30명으로 재조정되어 조선 말기까지 유지됐다. 교생의 정원은 법적으로 16세부터 국역의 대상에서 제외되는 기준이 되는 숫자이다. 따라서 16세 미만인 경우 정원에 관계없이 향교에서 교육이 가능하고 이들이 이른바 ‘동몽’들이다. 교생들의 교육연한은 일정한 기간이 정해진 것 같지는 않다. 군액(軍額)의 대상이 부족할 경우는 연령의 상한선을 20세까지 제한하기도 하였다. 일반적으로 40세까지는 향교에 머무르며 학생신분을 허락받았던 것으로 나타난다.


참고문헌 향교[鄕校]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문화재대관'(문화재관리국, 1968), '한국문화사대계'(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소, 1978), '16세기 이후의 향교교육제도'(한동일, '대동문화연구' 17, 19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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