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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향교 11] 고려-조선시대 지방 유학을 교육하기 위해 설립된 ‘향교3’
  • 박광준 기자
  • 등록 2023-09-12 05:45:33
  • 수정 2023-12-21 16:03: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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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향교의 교육과정-건물의 구성과 배치

영천향교[박광준 기자] 향교의 운영을 위해서는 국가의 재정적 지원이 요구된다. 향교의 교사(敎舍) 등 시설물의 설치.보수.유지, 교수관(敎授官)의 후생비, 교생들의 숙식비, 학업활동에 부수되는 제반비용, 그리고 향교를 중심으로 준행되는 석전례.향음례 등에 이르는 비용은 실로 엄청난 것이다. 조선왕조는 막대한 재정투자가 요구되는 향교를 각 군현에 세우고 유학교육의 실시를 위해서 이른바 학전(學田)과 학노비(學奴婢)를 공급했다는 사실만으로도 그 숭유억불적 정책을 살펴볼 수 있다.


# 교육과정


향교는 시문(詩文)을 짓는 이른바 사장학(詞章學)과 유교의 경전을 공부하는 경학(經學)을 교과내용으로 한다. 경학은 경전뿐만 아니라 사서(史書)를 함께 공부했다. 이렇게 관인후보자를 양성하기 위한 향교교육의 내용은 제도적으로 과거제와 일정한 관계를 갖도록 되어 있었다. 향교에 일정기간 출석한 자에 대해 과거 응시자격을 부여하는 원점법(圓點法)의 적용이 그 예이다. 또한 향시의 예정 합격인원을 도별로 제한한 것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다. [표2]는 향시의 도별 합격예정자의 수와 향교의 정원수를 대비한 것이다. [표2]와 같이 서울과 지방과의 향시 합격률에는 차이가 난다.


[표2] 향시의 합격예정자수 및 향교정원


주 : 1) 한성부의 향교 정원은 4부학당의 정원임. 2) 각도의 향교정원은 경국대전과 각 군현의 향교 정액을 토대로 산출한 것임.

서울의 4부학당 정원 400명에 생원.진사 초시 합격예정인원 400명은 100%합격을 보이고 있는 반면에 각도 향시의 경우는 7%내외의 저조한 합격률을 보여준다. 향교가 관인양성을 위한 제도적 장치의 기능이 있다고 해도 그 문호라는 것은 지배신분인 양반 신분이 집중돼 있는 한양과는 그 격차가 큰 것으로 보인다. 이와 같은 현상은 또한 기층신분인 평민들에게 교육기회를 부여함으로써 일정한 정치적 목적을 달성하려고 했던 것으로 파악할 수 있는 것이다.


한편 향교의 교과과정은 생원.진사의 시험과목을 통해 유추해 볼 수 있다. '경국대전'에는 생원초시의 시험과목이 오경의(五經義).사서의(四書疑) 2편(編)이고, 진사초시에는 부(賦) 1편, 고시(古詩).명(銘).잠(箴) 중 1편을 짓게 되어 있다. 복시(覆試)의 경우도 초시의 것을 되풀이한다. 사장(詞章)인 제술(製述)과 경학공부를 병행하도록 시험이 출제됐던 것으로 보아, 향교교육도 이에 준했을 것이다. 또한 세종이 “15일 동안은 시문을 제술하고 15일 동안은 경서와 제사(諸史)를 강독하게 하며, 제술과 강론에서 우등한 자는 5인씩 녹명(錄名)하여 예조에 보고하여 바로 생원회시에 응시하게 한다.” 고 한 자료는 대체로 향교교육과 일치한다.


'경국대전' 장려조에는 “교생으로서 독서한 일과를 매월말에 수령이 관찰사에게 보고하면 관찰사가 순행해 고강(考講)하고, 영에 따라 권장함을 문부(文簿)에 기록했다가 교관이 전최(殿最)할 때에 그의 월과.일강을 빙고해 우등한 자는 호역(戶役)을 헤아려 감한다. ”는 내용을 통해서도 향교에서의 공부내용을 엿볼 수 있는 것이다. 여기에서 관찰사의 고강에 낙강한 교생은 교생신분을 박탈당했다. 양란 이후에 등장한 납속면강첩은 고강을 통해 교생으로부터 박탈되는 것을 납속으로 면제받고자 한 것이었다. 한편 교생들이 강습한 교재는 '소학', 사서오경을 비롯한 제사와 '근사록(近思錄)' '심경(心經)' 등으로 성균관이나 서원의 그것과 크게 차이는 없었다. 그 중에서도 특히 '소학'과 '가례'는 조선 초기부터 교생들에게 권장된 책으로서, 각종의 고강이나 과거의 시험과목으로 부과됐다. 그러나 대부분의 향교는 교육용 서책의 부족을 심하게 겪었고, 이는 향교교육 자체를 곤란하게 한 하나의 원인이 됐다.


양천향교# 건물의 구성과 배치


향교의 배치는 배향공간과 강학공간을 어떻게 배치하느냐에 따라 크게 둘로 나눠지고, 이 밖에 일부 변형된 방법들도 쓰이고 있다. 향교가 자리잡은 대지가 평지인 경우는 전면이 배향공간이 오고 후면에 강학공간이 오는 전묘후학(前廟後學)의 배치를 이루고, 대지가 구릉을 낀 경사진 터이면 높은 뒤쪽에 배향공간을 두고 전면 낮은 터에 강학공간을 두는 전학후묘(前學後廟)의 배치를 이룬다. 그러나 밀양향교(密陽鄕校)에서처럼 동쪽에 강학공간을, 서쪽에 배향공간의 두는 예외적인 배치법도 있다. 평지에 건축된 나주향교(羅州鄕校)의 배치와 평면을 살펴보면, 이는 전묘휴학의 배치로 남쪽 정문인 외삼문(外三門)을 들어서면, 배향공간의 중심으로 출입하는 정문인 내삼문(內三門)까지 직선의 길이 나 있다.


내삼문을 들어서면 정면에 대성전(보물, 1963년 지정)이 자리잡고 있는데 이 대성전에는 공자(孔子)의 위패를 비롯해 4성(四聖)과 우리 나라 18현(十八賢)의 위패를 모시고 있다. 일반적으로 향교에서는 대성전 앞, 동과 서 양쪽에 공자의 제자들과 현인들의 위패를 모시는 동무와 서무가 건축되나, 이곳에서는 그 자리만 남아 있다. 대성전 뒤로는 담장을 쌓아, 그 뒤쪽에 있는 강학공간과 구분했고, 대성전과는 동쪽 모서리에 만든 샛문으로 출입하고 있다. 강학공간은 대성전의 중심축상, 제일 안쪽으로 중심공간인 명륜당(明倫堂)을 두고, 그 앞 동쪽과 서쪽에 학생들이 공부하고 숙식하는 동재와 서재를 두고 있다. 명륜당은 중앙에 정면 3칸, 측면 3칸의 중심건물을 두고 그 양쪽으로 정면 3칸, 측면 3칸 되는 건물을 약간 사이를 띄워 건축했다. 동재와 서재는 좌우대칭으로 정면 4칸, 측면 1칸반으로 전면 반칸은 툇마루이고 나머지는 모두 온돌방이다. 동재 앞쪽에는 비각이 있고, 동쪽 담장을 사이에 두고 살림을 맡아 해주는 교직사(校直舍)가 자리잡고 있다.


다음으로 구릉지에 건축돼 전학후묘의 배치를 이루고 있는 영천향교(永川鄕校)를 살펴보면, 남쪽 제일 앞쪽으로 누문인 풍화루(風化樓, 정면 3칸, 측면 2칸 중층)가 있고, 이 누의 아래층에 낸 대문을 들어서면 정면으로 명륜당이 있고, 그 앞쪽 양쪽에 동재와 서재가 자리잡고 있다. 명륜당은 정면 4칸, 측면 3칸으로 중앙에 큰대청(정면 3칸·측면 3칸)을 두고 그 좌우 양쪽으로 온돌방(1칸×3칸)이 하나씩 있다. 동재와 서재는 정면 4칸, 측면 1칸으로 대청(1칸×2칸)과 온돌방(1칸×2칸)으로 구성됐다. 명륜당 뒤쪽 높은 곳에는 내삼문이 있고 이 문을 들어서면 정면에 배향의 중심전각인 대성전이 서 있고 그 앞 동서 양쪽에 동무와 서무가 자리잡고 있다. 대성전은 정면 5칸, 측면 3칸으로 내부는 통간(通間)으로 돼 있고 동무와 서무는 정면 3칸, 측면 1칸의 장방형 평면을 이루고 있다.


인천향교 명륜당 밀양향교에서는 외삼문을 들어서서 동북쪽으로 진입하면 풍화루가 자리잡고 있고, 이 누의 아래층에 있는 삼문을 통해 명륜당 마당에 이른다. 명륜당은 정면 5칸, 측면 2칸으로 중앙에 정면 3칸, 측면 2칸의 대청을 두고 좌우에는 온돌방(1칸×1.5칸)을 하나씩 두었고 앞에 반칸 너비의 툇마루를 두었다. 명륜당 남쪽 동서 양쪽에는 동재와 서재가 좌우대칭으로 배치됐다. 이들은 정면 6칸, 측면 1칸으로 남쪽에서부터 마루(1칸).온돌방(2칸).대청(2칸).온돌방(1칸)의 순으로 구성되어 있다. 배향공간은 명륜당 뒤쪽에 자리잡은 것이 아니라 명륜당 서쪽 터에 있어 명륜당 앞마당을 돌아 들게 되어 병렬형 배치를 이루고 있다. 대성전의 정문인 대정문은 정면 9칸 측면 1칸의 장방형 평면을 이루는 회랑에 삼문을 만들어 강릉향교의 대성전에서와 유사한 모습을 이루고 있다. 정면 높은 터에 남향한 대성전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통간이고 이의 앞쪽 동서로 자리잡은 동무와 서무는 정면 3칸, 측면 1칸으로 되어 있다.


살펴본 바와 같이 향교의 배치는 평지에서는 전묘후학이고 구릉지에서는 전학후묘가 일반적이나 때로 배향공간과 강학공간이 나란히 배치될 때도 있다. 또 각 건물의 평면을 살펴보면 강당은 중앙에 대청을 두고 좌우로 온돌방을 두고, 동재와 서재는 온돌방과 대청 또는 온돌방만 두는 것이 일반적이다. 대성전과 동.서무는 통간의 장방형 평면을 이루며 내부의 바닥은 전바닥으로 마무리되는 것이 일반적임을 알 수 있다. 그리고 배향공간과 강학공간 이외에 향교의 살림을 맡는 교직사는 부엌.방.대청.광 등의 공간으로 구성돼 일반 민가의 모습을 하고 있으며 이 공간은 강학공간과 가까이 배치돼 있음을 볼 수 있다.


또 존경각(尊經閣)은 방형(方形)의 단일평면을 이루는 것이 일반적이고 때로 동무나 서무의 한 곳을 존경각으로 할 때도 있다. 이 때에는 존경각이라 하지 않고 경판고(經板庫)라 부른다.


향교건축의 구조양식은 대성전.동무.서무.명륜당.동재.서재 등 개별 건물들이 일률적으로 하나의 건축구조양식을 이루지 않고 대략 세 가지 양식 중 하나를 택하게 된다. 주심포(柱心包)양식, 익공(翼工)양식, 그리고 민도릿집양식이 일반적으로 대성전은 주심포양식(예 : 강릉향교대성전.장수향교대성전.나주향교대성전)과 익공양식(예 : 안성향교대성전.온양향교대성전)으로 나눠진다.


강릉향교 대성전동무와 서무는 익공양식이 주류를 이룬다. 다음 명륜당은 익공양식이 주류를 이루고 동재와 서재는 익공양식과 민도릿집양식으로 건축된다. 한편 교직사는 일반주택과 같은 공간구성을 하고 있는 만큼 민도릿집양식을 이루고 있으며 존경각은 익공식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 그리고 이상에서 고찰한 주심포.익공.민도릿집 등의 기둥구조양식 이외의 다른 구조상의 요소들, 즉 기단.초석.창호.지붕 등은 모두 어떤 일정한 양식으로 분류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전각마다 다양하게 구성됨으로써 일반 건축물에 나타나 있는 모든 양식들을 볼 수 있다. 향교는 선현의 배향과 학생의 교육인 강학을 기능으로 하는 만큼 이 두 공간이 전체에서 핵심공간이 된다. 그리고 이들 두 공간 중에서도 선현의 배향공간을 우위에 둠으로써 대성전이 항상 명륜당보다 우위의 위치에 오는 것은 사학(私學)의 서원에서와 같다.


그러나 서원에서는 평지라 하더라도 대성전에 해당되는 사당을 대지의 가장 안쪽에 두어 신성시하는 것과는 달리 향교에서는 그것을 강학공간의 앞쪽에 두어 전체 공간에 있어 우위에 있게 하고, 구릉지에서는 반대로 강학공간보다 높은 터에 두어 고저 차이로 우위에 있게 하는 것이 특색이다. 또 배향공간을 우위에 두는 방법은 배치에서뿐만 아니라 구조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즉 대성전은 주심포건축이 주류를 이루고 명륜당은 익공건축이거나 민도릿집 계통인 것을 보아서도 알 수 있다. 또 배치에 있어 중심공간이 배향과 강학의 두 공간은 하나의 축을 중심으로 좌우대칭의 균형을 이루어 공간에 어떤 위엄을 가지도록 한 것이 통일신라시대 이후의 사찰배치가 비좌우대칭균형을 이루는 것과 다른 점이다. 하지만 전체적으로 볼때에는 역시 비대칭균형을 이룸으로써 우리 나라 전통건축의 공통적인 배치수법을 보여주고 있다. 현재 남한에 남아있는 향교는 1900년에 창설된 오천향교(鰲川鄕校)를 끝으로 231개의 향교가 있다.<끝>


참고문헌 향교[鄕校]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문화재대관'(문화재관리국, 1968), '한국문화사대계'(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소, 1978), '16세기 이후의 향교교육제도'(한동일, '대동문화연구' 17, 19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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