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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기의 공연산책 294] 극단 캔버스의 낭독공연, 류근혜 구성/연출 낭독공연 '알립니다'
  • 박정기 자문위원
  • 등록 2023-11-02 16:36: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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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가의 집 다목적홀에서 캔버스의 낭독공연 류근혜 구성 연출의 <알립니다> 를 관람했다


낭독공연의 구성작품은 차범석의 <산불>, 놀웨이 입센의 희곡을 그리그가 작곡한 <페르 귄트>, 윌리엄 셰익스피어의 <베니스의 상인>과 <햄릿>, 러시아 안톤 체호프의 <갈매기>, 그리고 김의경 작 <남한산성> 등의 희곡 대사를, 작고한 한국의 연출가 이진순, 이해랑, 평론가 구희서 등과 연관시켜 경륜과 기량이 있는 배우 마흥식, 나성균, 이학재, 차영숙, 이상우, 이해옥, 이관희, 강주희 등을 등장시켜 실감나게 펼친 낭독공연이다


류근혜 연출가는 전 한국여성연극인회 회장으로 상명대 미술학과 출신이다. 대학시절 연극을 시작으로 1980년 극단 광장 연출부에 들어가, 연출을 시작해 100여 편의 연극을 연출했다. 혜화동 1번지 연극실험실 1기 동인으로 출발, 공연예술진흥회 청소년 축제 지도위원, 전국청소년연극제 심사위원, 전국대학연극제 심사위원, 전국연극제 심사위원, 전 한국연극연출가협회 부회장, 현 상명대 연극학과 겸임교수, 현 극단 로얄 씨어터와 극단 캔버스 상임 연출로 활동 중이고 연극계의 선도자인 연출가다.


이해랑(1916~1989)은 배우이자 연출가다. 본명은 해량(海良). 서울 출생. 고조부 종응(宗應)은 조선 철종의 사촌이고, 할아버지 재영(載榮)은 왕실 의전실장이었다.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 부속 병원 외과부장을 지낸 근용(瑾鎔)의 장남이다.


휘문고등보통학교에 입학하자마자 항일동맹휴학의 주동자로 몰려 퇴학당하였다.


일본으로 건너가 가나카와중학(金川中學)을 졸업하고, 중국 상해의 후장대학(滬江大學)에 다니던 중 장티푸스에 걸렸으나 극적으로 살아나 귀국하였다.


부산 집에서 요양한 뒤 다시 일본으로 건너가 니혼대학(日本大學) 예술과에 입학하여 연극을 공부하였으며, 재학중 유학생들과 함께 ‘동경학생예술좌’라는 아마추어 연극단체를 조직하여 연기생활을 시작하였다.


1938년 니혼대학을 졸업하자마자 귀국하여 아버지 반대에도 불구하고, 극예술연구회(劇藝術硏究會)의 후신인 극연좌(劇硏座)에 가입하였다. 말단 배우로 취직하였으나, 극연좌가 일본경찰에 의하여 강제해산당하여 1년 여만에 실직생활을 하게 되었고, 그 뒤 대중적 성격이 강한 극단 고협(高協)에 정단원으로 가입하였다.


당시는 대학에서 연극을 제대로 공부한 사람이 드물던 시대였으므로 이론을 갖춘 그는 매우 필요한 배우였다. 그러나 괜찮은 외모임에도 불구하고 눈이 작고 목소리가 가느다란 것이 흠이 되어 각광을 받지 못하고, 주연 배우로서 주목을 끌지 못했다.


그는 연극계의 젊은 지도자로, 광복 직후의 혼란기에 좌우익 연극인들이 주도권다툼을 할 때 그 당시 압도적인 우세를 보였던 좌익 연극에 대항하여 극단 전선(全線)뿐만 아니라 극예술협회(약칭 극협)를 조직하는 등 우익 민족진영의 선봉장에 서서 연극의 정통성을 지켰다.


그때는 유치진(柳致眞)과 같은 인물이 친일문제로 칩거하고 있던 상황이었으므로, 연극이론 및 극단운동, 그리고 완력으로 좌익 연극을 물리쳐야 하였다. 결국, 극단 극협은 광복 직후 민족연극운동을 정도(正道)로 들어서게 하였고, 이것이 1950년 봄 국립극장 설립과 함께 창단된 극단 신협(新協)의 모태가 되었다.


그러나 곧 6·25전쟁이 일어나 국립극장 활동은 정지될 수밖에 없었으나, 전쟁중에도 눈부신 활약을 하였으며, 연기생활과 함께 연출도 겸하기 시작했다. 예술원 발족과 함께 30대에 예술원 회원이 되었으며, 1959년 동국대학교 연극영화과 교수로 취임하였다.


잠시 동안 환도(還都)한 국립극장 전속극단 단원으로 있다가 드라마센터 개관과 함께 극장장으로 취임하였다. 그러나 드라마센터가 재정난으로 제 기능을 하지 못하자 연극 외적인 일, 즉 한국예술문화단체총연합회 회장(5선)과 민주공화당 창당멤버로 활약하였다.


1970년대 민주공화당 소속으로 국회의원을 두 번 지냈으며, 다시 연극에 복귀하여 주로 국립극단의 연출을 많이 맡았다. 1984∼1987년 예술원 회장을 역임하였다. 대표작으로 <천사여 고향을 보라>·<들오리>·<황금연못>·<뇌우> 등이 있고, 저서로는 ≪또 하나의 커튼 뒤의 인생≫과 ≪허상과 진실≫이 있다.


이진순(1916~1984)은 극작가ㆍ연출가. 평양 출생. 이해랑과 비슷한 나이로 그와 견주던 연출가는 이진순이다. 이해랑과 마찬가지로 1931년 일본대학 예술과를 졸업하고 [동경학생예술좌]에서 활동하다가 1938년 [극연좌]에 입단하였다. 중국에 건너갔다가 광복 후 중국에서 돌아온 그는 극단 [신지극장(新地劇場)]을 창단하고 조우의 <태양이 그리워>를 연출함으로써 연출가로 변신하게 되었다. 1947년에는 한국무대예술원의 이사가 되었고 1949년 한국연극학회 간사로 있었다.


한때 생활고로 그는 상업적인 악극과 여성국극쪽으로 방향을 돌려 대본 각색과 연출을 주로 하였다. 따라서 그가 정통극 연출가로 본격 진출한 것은 1950년대 후반부터였고, 국립극단의 <태풍지대>, <우물> 등이 초기 작품이었다. 1966년 극단 [광장]을 창립하였다. 1961년엔 서라벌예대에서, 1970년부터는 동국대 연극과 교수로 학생을 지도하였다.


1970년대 들어 그는 중진 연출가로 우리 나라 연극의 방향을 상업주의쪽으로 돌려갔는데 극단 광장에서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전쟁과 평화> 등의 대형 작품들을 무대에 올린 것 역시 그러한 상업주의 성향에서였다. 1972년 예술원 회원, 1975년 연극협회 이사장이 되었다.


그는 평생 200여 편을 연출했으며, 대표작으로 조우 작 <태양이 그리워>(1947), 샤르트로 작 <붉은 장갑>(1951), 차범석 작 <산불>(1960), 김의경 작 <남한산성>(1974) 등이 있다. 그는 국립극장의 창극 정립에 앞장섰고, 중국 고전극인 경극을 부분적으로 모방하면서 창극 연출에 새로운 면모를 보여주려 애썼다. 그의 그런 작업은 실패한 것이었지만 창극을 실험적 대상으로 삼았던 것은 주목할만한 일이었다. 예술원상, 서울시문화상, 문화훈장, 동아연극상, 한국연극상, 문화예술상 등을 수상했다.


극작가 김의경(金義卿, 1936~2016) 선생은 1960년 서울대 문리대 철학과를 졸업하고, 1970년 미국 브랜다이스 대학원 연극학과를 수료하였으며, 1983년 미국 하와이대학 연극학과에서 수학하였다.


국제극예술협회(ITI) 한국본부 사무국장. 부위원장을 거쳐 1994년 3월 이후 회장을 맡았으며, 한국연극협회에서는 상임이사. 부이사장. 이사장을 역임하였다. 또한 극단 실험극장 창립동인 및 대표, 서라벌예술대학 연극영화과장, 국립극장 공연과장 등을 지냈다. 1976년 9월 극단 현대극장을 창설하고 동 대표를 역임하였다.


그는 한국연극의 국제 교류에 노력한 연극인으로서, 1967년 이후 국제극예술협회 총회에 한국대표로 참석하고 있으며, 기타 국제교류에서도 많은 역할을 하고 있다. 단막극 <애욕(愛慾)의 우화(寓話)>(실험극장 초연, 1963)가 문공부 주최 신인예술상 연극부문에서 단체상을 수상하여 인정을 받고, 『문학춘추』에 <갈대의 노래(1964)>, <신병후보생(1964)>이 추천 완료됨으로써 극작가로 데뷔하였다.


주요 작품으로는 <남한산성(1973>, <논개(1975>, <함성(1976)>, <원효대사(1976)>, <북벌(1978)>, <삭풍의 계절(1982)>, <식민지에서 온 아나키스트(1984)>, <잃어버린 역사를 찾아서(1985>, <조국은 외롭지 않다(1986)>, <처용무(1987>, <길 떠나는 가족(1991)> 등이 있다.


1975년 희곡 <남한산성>으로 제11회 백상예술상 희곡상을 수상하였고, 1986년 <잃어버린 역사를 찾아서>로 제22회 백상예술상 희곡상을 다시 받았으며, 1991년엔 <길 떠나는 가족>으로 제15회 서울연극제 희곡상을 수상하였다.


그 외 1989년엔 문화훈장 ‘관훈장’을 받기도 하였다. 저서로는 희곡집 『남한산성』(1977)이 있고, 그 외 번역서로 『세계 신경향 희곡선』(1976), 『연극론 12장-아더 밀러 연극론집』(1978), 『스즈키 연극론』(1993), 『경극과 매란방』(1993) 등이 있다. 2015년 올바른 역사극 공연을 위한 백민역사극회를 창단해 그 대표를 역임하기도 했다.


구희서(1939~2019)능 평론가로 서울출생이다. 경기여고와 이화여대 사학과를 졸업하고 문화재관리국, 문화재연구소 등에서 근무했다. 1970년부터 1994년까지 한국일보, 일간스포츠에서 연극 전문기자로 활동했다.


또한 여석기, 한상철, 이태주, 이상일 평론가 등과 함께 한국연극평론가협회 전신인 서울연극평론가그룹을 이끌었다. 기자 퇴직 후인 1994년부터 1998년까지 한국연극평론가 협회 회장을 지내기도 했다.


1989년부터 1993년까지 연극 전문기자로 활동하며 쓴 평론 200여 편을 모아 1999년 평론집 ‘연극읽기’ 3부작을 출간했다. 이 책은 연극 평론계에 ‘저널리즘 비평’이란 새로운 장을 열었다는 평가를 받았다.


‘아일랜드’ ‘시즈 위 밴지는 죽었다’ ‘황금연못’ 등 해외 희곡을 번역해 국내에 소개하기도 했다. 전통예술과 무용에 대한 애정도 남달라 ‘한국의 명무’ ‘무대 위의 얼굴’ ‘춤과 그 사람’ 등을 출간하기도 했다.


1996년부터는 단독으로 심사해 수상자를 결정하는 ‘히서 연극상’을 시작했다. 이 상은 직접 현장을 돌아다니며 찾아낸 배우에게 주는 상으로 권위를 인정 받았다.


객석과 마주한 무대에 출연진이 등장해 낭독을 시작하고 조연출이 디렉션을 낭독했다.세계명작과 더불어 한국명작이 소개가 되면서 낭독공연은 관객을 심취시키고 추억과 회상에 빠지도록 만들었다. 비록 1시간 공연이었지만, 한순간도 소홀히 할 수 없는 영원히 기억에 간직할만한 낭독공연이었다.


* 주요경력


황해도 금천생, 서울고 서울대미대, 서울대학교 총동문회 이사, 극작가/연출가/평론가, 한국희곡뮤지컬창작워크숍 대표, 한국문인협회 희곡분과 위원, 전 서초연극협회 회장, 본지 자문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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