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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향교 15] 굳게 닫혔던 공간이 살아숨쉬는 ‘금산향교’
  • 윤여금 기자
  • 등록 2023-11-16 09:57:27
  • 수정 2023-12-25 04:0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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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여금 기자] 향교는 공자와 여러 성현들에게 제사를 지내는 곳으로 지방민에게 유학을 가르치고 교화를 위해 나라에서 세운 조선시대의 교육기관이다. 금산향교는 조선 초기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되며, 원래는 지금의 금산읍 하옥리 백학동에 있었으나 임진왜란 때 불에 타버린 것을 1684년(숙종 10년) 현재의 위치에 짓고, 수차례 중보수를 했다. 현존 제향 공간인 대성전, 동무, 서무와 교육공간인 명륜당이 전학후묘(前學後廟)의 건축형태이고, 기숙사인 동재, 서재와 동재각, 서재각, 외삼문, 내삼문, 홍살문 등이 자리 해 있다.


        ▲ 금산향교 충남도 기념물 제121호(지정일 1997.12.23.), 면적 3,835㎡, 금산읍 

          상리 4번지(비호산 아래)에 소재하고 있다.

 

금산향교(錦山形校)는 금산읍 상리 4번지 비호산(飛虎山) 아래에 자리잡고 있다. 원래는 조선 초에는 금산읍 하옥리 백학동(白鶴洞)에 있었다고 전한다.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에는 ‘군의 서쪽 5리’라고 되어있는데, 그곳은 현재의 향교 북쪽에 해당한다. 금산향교의 창건연대는 확실치 않으나, 고려 때 금산의 김신(金侁).윤택(尹澤).한교(韓皦) 등의 인물을 배출하고, 읍호가 금주(錦州)로 승격된 것으로 보아 고려말에 국학기관이 있었음이 추측된다. 


조선이 건국 돼 후숭유억불 정책과 전국의 향교 건립의 추세를 보면 태조에서 태종 때의 사이에 건립된 것으로 보인다. 그후 200여 년간 지방교육에 공헌했으나, 1592년에 임진왜란으로 인해 소실돼 왜란 후에 보수했다. 그 후 1684년(숙종10)에 현재의 위치에 이전해 전학후묘 방식으로 재건하고 수차례 중보수를 했다.


#향교의 배치기법

향교의 배치기법은 강학공간이 전면에 구성되는 전학후묘와 제향공간이 전면에 배치되는 전묘후학의 형태가 있다.

 

         ▲ 홍살문


금산향교의 입구는 하마비와 홍살문이 세워져 있다. 홍살문은 신성시 되는 장소를 보호하는 의미를 갖고 있으며, 향교 앞에서 나쁜 기운을 막아준다고 전해진다.

 

#상리 비석군(碑石群),(금산읍 상리 5-9에 소재하고 있다)


금산향교 앞에 있는 상리 비석군(조선 1601~1892)은 대부분 금산군수를 지낸 사람들의 선정비의 내용이다.


       ▲ 하마비(下馬碑)


#하마비(下馬碑) 건립 경위


하마비(下馬碑)는 말에서 내려 예를 갖추라는 뜻으로 세운 비석이다. 서원이나 향교, 사찰뿐 아니라 왕이나 장군.고관.성현들의 출생지나 무덤 앞에 세워놓기도 했는데, 이들에 대한 존경심의 표시인 듯하다. 기록에 의하면, 1413년(태종 13) 2월에 처음 예조에서 건의하여 왕의 허가를 받아 표목 전면에 “대소 관리로서 이곳을 지나가는 자는 모두 말에서 내리라'大小官吏過此者皆下馬'”고 쓰여져 있는데, 여기서 인(人)은 관직이 없는 사람이고, 원(員)은 관직이 있는 사람을 뜻한다. 


내리는 지점도 품계에 따라 각기 다르게 거리를 표시했는데, 1품 이하는 궐문으로부터 10보, 3품 이하는 20보, 7품 이하는 30보 거리에서 말에서 내려야 한다고 돼 있다. 이 표목은 후일 석비로 만들기도 하여 오늘날까지 그 실물이 전해져 내려오는 것이 많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향토문화전자대전]


      ▲ 외삼문


      ▲ 외삼문  

        

      ▲  안쪽에서 본 외삼문 전경

홍살문과 직선상에 외삼문이 위치 해 있다.

#외삼문의 출입 법도

외삼문의 가운데 문을 ‘정문’이라하고, 양쪽문은 ‘협문’이라한다. 보통때는 양쪽의 ‘협문을 열어놓고 ’정문‘은 닫아둔다. 제사 지낼 때는 세 문을 다 열어 놓으나, 정문은 영혼이 듵어오는 문이라 하여 사람들은 드나들 수 없다. 향교의 외삼문과 내삼문의 의미와 기능은 같다.

# 금산향교의 강학공간 명륜당

자연석 기단 위에 거칠게 다듬은 사각돌을 놓고 원기둥을 세운 명륜당은 정면 5칸, 측면 2칸의 겹처마 팔작지붕이다.

강당인 명륜당을 중심으로 동재, 서재가 마당을 사이에 두고 위치해있다. 동재·서재는 정면 3칸, 측면 1칸 규모의 홑처마 우진각 지붕이다. 오른쪽이 동재, 왼쪽이 서재다.

 

      ▲ 명륜당


        ▲ 명륜당 


      ▲ 명륜당 


      ▲ 명륜당 내부

 

        ▲ 명륜당 내부

 

        ▲ 명륜당 내부

 

#명륜당의 의미

밝을명(明), 인륜(倫), 집당(堂)은 윤리를 밝히는 곳이라 하여 유교를 가르치는 강학당으로 유생들이 유학을 공부했던 곳으로 사용 됐다.

#향교의 교육내용

향교에서는 육예(六藝)를 배웠다. 육예는 육학에서 여섯가지의 기초교양으로 예(禮), 악(樂), 사(射), 어(御), 서(書), 수(數)를 말한다. 예는 예절, 악은 음악, 사는 활쏘기, 어는 말타기, 서는 글쓰기, 수는 수학.천문을 의미한다. 이를 위해 시경, 서경, 역경, 춘추, 예기 등의 오경을 공부한다. 이외 논어, 맹자, 대학, 중용 등을 배운다. 대학이란 백성을 잘 다스릴 수 있도록 지혜와 덕을 쌓을 수 있도록 가르침을 주는 책이고, 대학은 왕세자의 필독서이다.


원래 대성전에는 공자를 비롯해 5성(五聖)과 공문16철(孔門16哲)을 배향하고 동.서무에는 최치원(崔致遠)을 비롯해 우리나라 18현을 배향했다. 매년 음력 2월과 8월 첫 정(丁)일에 석전(釋奠)을 행했고, 유지관리를 위해 장보 1인과 장의 2인을 두었다.

 

향교에는 교생 50인이 있고 훈도 1인을 두어 교생이 교육을 했고, 지금의 고등학교 교육에 해당하며 이들에게 사마시(司馬試=지방관 시험)에 응시할 자격을 주었다. 교생은 각 서원의 원생과 서당에서 수학한 사람 중에서 시험에 합격한 사람으로 했다. 

 

이후 조선 말기의 시대변천과 개화의 물결에 따라 1907년 홍범식(洪範植, 한일합방에 항의하다가 순절해 남산에 비가 있다.) 군수 재임시(1909~1910) 금산에도 사립금신학교(私立錦新學校, 현재 중앙초등학교)를 세우니 향교재산의 일부를 기증했고 교생도 없어졌다. 

 

한일합방과 개화의 흐름에 따라 향교에서 교육은 사라지고, 또 사대사상을 이유로 중국의 16철 중에서 송조 2현인 정호(程顥)와 주희(朱熹)만을 남기고 14철을 폐위했다. 

 

그리고 직원(直員, 광복이후 전교(典校)로 개칭) 1인과 장의 몇 명이 5성(五聖) 2철(二哲) 우리나라 18賢만을 배향해 춘추석전(春秋釋奠)을 봉행하고 효열표창(孝烈表彰)을 하며, 몇 차례 중보수를 거쳐왔다.

 

1945년 광복과 함께 서구문명이 유입되고 1950년 한국전쟁을 지나며 금산향교는 겨우 유지됐다. 그러나 농지개혁법에 의하여 향교재산 전답이 분배되자 재정부족으로 전교 1인에 장의 수십인을 두어 장의들의 성금으로 연 1회에 한하여 석전을 올릴 수 있었다. 그 후 향교 근처의 지가상승(地價上昇)으로 대지와 임야 일부를 매각해서 농지를 구입해 그 소작료로 춘추석전을 올리고 있다.

 

1997년 12월 23일에 충청남도 기념물 제121호로 지정받았고, 1984년 명륜당(明倫堂)을 중수했다. 이후 수차에 걸쳐 정부시책과 군수의 배려로 대성전과 동무.서무 담장을 개.보수했다. 같은 해 1984년 5월 17일에 금산향교 대성전은 도 문화재자료 제14호로 지정받았고, 1990년 추기석전부터는 중국 송조 2철(宋朝2哲)과 우리나라 18현은 동·서무에 분리 안치했다.

 

         ▲  은행나무


명륜당과 내삼문 사이에 은행나무 고목이 자리해서 자라고 있다.

 

       ▲ 서재


         ▲ 동재                               

학생들이 거처하는 공간의 기숙사인 동재.서재는 정면 3칸, 측면 1칸의 홑처마 우진각 지붕이다. 옆에는 동재각과 서재각이 있는 것이 특징이다.

 

        ▲ 밖쪽에서 본 내삼문

 

      ▲ 안쪽에서 본 내삼문 전경

 

         ▲ 대성전

 

       ▲ 대성전


        ▲ 대성전 

 

        ▲ 대성전 내부(공자)

 

       ▲ 대성전 내부(공자 위패)

 

         ▲ 대성전 내부(공자 위패)


         ▲ 동무

 

         ▲ 서무


금산향교의 대성전 안에는 중국 공자를 비롯해서 5성(五聖), 송조 2현이 , 동무(東廡).서무(西廡)에는 우리나라 18현(十八賢)의 위패가 봉안되어 있다. 제사지내는 공간인 대성전은 정면 3칸, 측면 3칸 규모이며, 동무(東廡).서무(西廡)가 있다.

#중국 5성과 한국 18현

중국 5성(五聖)은 공자, 안자, 증자, 자사, 맹자이고, 송조 2현은 정호, 주희이다. 한국 18현은 설총, 최치원, 안향, 정뭉주, 김굉필, 정여창, 조광조, 이언적, 이황, 이이, 김인후, 김장생, 성혼, 조헌, 김집, 송시열, 송준길, 박세채 등 이다.

#공자

공자는 중국 춘추시대의 사상가로 ‘유교의 시조’라 불리고, 그리고 덕이 있는 사람이 나라를 다스려야 한다는 ‘덕치주의’를 주장했고, ‘춘추’라는 역사책을 남겼다.

조선시대에는 국가로부터 전답과 노비·전적 등을 지급받아 교관이 교생을 가르쳤으나, 조선 후기 향교는 교육 기능이 쇠퇴하고 현재는 제향기능만 남아 봄.가을에 석전(釋奠)을 봉행(奉行)하고 초하루.보름에 분향을 올리고 있다.


금산향교 관계자는 “오늘날의 금산향교는 생기넘치는 문화공간으로 매월 다례를 통해 전통예절을 익히고, 초.중.고생들에게 충효교육을 하고 있고, 세시풍속, 전통놀이 등을 알리는 문화유산 활용사업을 하고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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