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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궐 이야기 35] 격동의 조선말기와 대한제국의 역사만큼이나 갖은 수난과 변화를 겪은 ‘덕수궁’
  • 이승준
  • 등록 2023-11-26 20:36:18
  • 수정 2024-04-15 17:3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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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4년(광무 8년) 대화재 이전의 경운궁(덕수궁)[이승준 기자] 덕수궁은 조선왕조 마지막에 등장한 궁궐로 격동의 조선 말기와 13년 만에 막을 내린 대한제국의 역사만큼이나 갖은 수난과 변화를 겪었다. 덕수궁하면 고종황제가 일제에 의해 강제로 퇴위당한 뒤에나 머물렀던 곳으로 근대식 궁궐 건축인 석조전을 떠올리지만. 덕수궁이라는 궁궐이 있었고 경운궁의 역사는 임진왜란 때로 거슬러 올라간다.


한양도성 건설 당시 원래 이 자리에는 태조의 계비인 신덕왕후의 정릉과 흥천사라는 원당 사찰이 있었으나 태종이 도성 밖으로 정릉을 이장한 뒤에는 왕가와 권세가들의 저택들이 들어서 있었다. 그러다 임진왜란 때 경복궁, 창덕궁, 창경궁이 모두 불에 타 소실되면서 1593년 의주에서 돌아온 선조가 이곳에 있던 월산대군 후손의 자택에 머물면서 경운궁의 역사가 시작됐다. 


공사 중인 중층 중화전. 경운궁 확장 공사가 진행되고 있는 것을 보아 1902년 경에 촬영한 듯 하다.경운궁이 다시 역사의 주무대에 등장한 것은 1897년 2월, 명성왕후가 시해되는 을미사변을 겪은 고종이 일제의 감시를 피해 러시아공사관으로 피신한 지 1년 뒤에 경복궁이 아닌 경운궁으로 환궁하면서 조선왕조의 마지막 법궁으로 다시 태어났다. 그리고 같은 해 10월 고종이 대한제국을 선포하면서 경운궁은 황궁이 됐다. 


당시 경운궁의 주위에는 러시아, 미국, 영국, 독인 공사관 등이 둘러싸고 있었고, 배재학당, 이화학당, 정동교회, 성공회 성당 등 근대적 건축물들 포진돼 있었다. 고종황제는 이를 맞추어 돈덕전, 정관헌, 중명전, 석조전 등 서양식 건물들을 세우면서 경운궁의 전성기를 이룬다. 


경희궁과 연결했던 운교/ 돈의문에서 신문로 방향으로 촬영한 사진이다1907년 고종이 강제로 퇴위되고 뒤를 이은 순종황제가 창덕궁으로 이어지면서 경운궁에 상황(上皇)으로 남은 아버지께서 덕을 의지해 장수하시라는 뜻으로 덕 덕(德) 자, 목숨 수(壽) 자, 덕수라는 이름을 지어 바쳤고 이후 덕수궁이라 불리게 됐다. 


1910년 국권을 강탈한 일제는 조선왕조의 상징인 궁궐을 파괴하기 시작해 경복궁에 총독부 건물을 짓고, 덕수궁은 공원으로 꾸몄다. 훗날 경기여고와 덕수초등학교가 들어선 선원전 구역을 매각하고 덕수궁과 오늘날의 미국대사관저 사이에 길을 만들면서 궁궐의 일부 영역이 도로 서쪽으로 떨어져나갔다. 


현재의 덕수궁

8.15해방 후에는 태평로 도로가 확장되면서 동쪽 담장과 대한문이 궁 안쪽으로 옮겨지면서 덕수궁은 계속 줄어들어 오늘날엔 기존 궁역역의 3분의 1인 약 1만8천 평에 중화전 권역, 함녕전 권역, 석조전 권역 등이 여기저기 흩어졌다. 이로 인해  덕수궁은 경복궁, 창덕궁, 창경궁 같은 유기적인 궁궐 체제가 거의 갖춰지지 않은 채 여전히 궁궐 공원처럼 남아 있다./다음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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