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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궐이야기 36] 조선왕조 최초의 왕비 신덕왕후 강씨의 정릉이 이곳에 있었던 데서 유래한 ‘덕수궁(1)'
  • 이승준 기자
  • 등록 2023-11-27 20:22:46
  • 수정 2024-04-15 17:32: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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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준 기자] 대한문은 덕수궁의 정문으로, 원래 이름은 대안문(大安門)이었다. 대안문은 경운궁(덕수궁의 옛 이름)의 동쪽에 위치한 문으로, 처음부터 경운궁의 정문으로 사용되지 않았다. 경운궁의 본래 정문은 인화문(仁化門)이었다. 1902년 경운궁의 정전인 중화전(中和殿)을 건립하면서 인화문을 철거했다. 그 결과 덕수궁의 동문이었던 대안문이 덕수궁의 정문이 됐다. 



건물의 명칭이었던 대안(大安)은 ‘나라가 편안하고 국민을 편안하게 하라’라는 뜻이었다. 1904년 경운궁에 발생한 대화재로 인해 경운궁의 중요 전각이 대부분 피해를 받았는데, 대안문 역시 피해를 입어 수리를 진행했다. 1906년에 수리를 완료했고, 이 과정에서 건물의 이름을 대한문(大漢門)으로 바꾸었다. 당시 현판의 글씨는 남정철(南廷哲)이 썼다.


대한문의 원래 위치는 지금의 자리에서 33m 가량 동쪽으로 떨어진 곳이었다.태평로 도로가 확장되고, 덕수궁 궁역이 축소되면서 대한문은 태평로 도로 한가운데에 위치했고, 1970년에 현재의 위치로 이전됐다.



대한문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단층 건축물이다. 지붕은 우진각지붕으로 용마루와 추녀마루에 회반죽을 발라 양성바름을 했고, 망새와 용두, 잡상 등을 설치해 지붕 위를 장식했다. 건립 당시에는 문 앞에 월대와 계단이 있었으나,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대한문의 기단과 계단은 훼손됐고, 2021년부터 대한문 앞 월대를 발굴 및 복원하는 공사를 진행하고 있다.


덕수궁의 개정 전 주소는 중구 정동 5-1번지로, 이 일대가 정동이 된 것은 태조 이성계의 계비이자 조선왕조 최초의 왕비인 신덕왕후 강씨의 정릉(貞陵)이 이곳에 있었던 데서 유래됐다. 한양도성 건설 당시 덕수궁 일대는 구릉 지역으로 세종로 네거리에서 덕수궁에 이르는 언덕길에는 유난히 진흙이 많아 황토마루라 불렀다. 



이 때문에 정도전이 한양을 건설할 때 궁궐과 남대문 사이에 주작대로를 일직선으로 내지 않고, 광화문 앞 육조거리가 세종로 네거리에서 종각으로 꺾였다가 거기서 다시 숭례문으로 이어진 것은 이 황토마루의 자연지형을 거스르지 않았다. 그 언덕에서 경복궁이 마주 보이는 북쪽 자락은 취헌방이라 했고, 숭례문이 바라보이는 남쪽 자락은 황화방이라 했다. ‘황화’란 ‘중국 사신’이라는 뜻으로 황화방은 그곳에 중국 사신이 머물던 ‘태평관’이 있었기 때문에 생긴 이름이다. 


어린 강씨와 유달리 사랑이 깊었던 이성계는 태조 5년(1396) 8월 13일, 신덕왕후 강씨가 41세의 나이에 갑자기 세상을 떠났다. 신덕왕후는 방석 두 왕자와 경순공주를 낳았다. 고려시대 풍습에 따라 이성계는 향처(고향의 부인)와 경처(개경의 부인)를 따로 두었는데, 태조의 향처이자 원비인 신의왕후 한씨가 태조 즉위 바로 전해인 1391년에 사망했기 때문에 강씨는 조선 최초 왕비가 되었고 정치력도 대단해 자신 소생의 막내아들로 불과 11세이던 방석을 왕세자로 앉혔다. 이 일이 전처 소생으로 훗날 태종이 된 이방원의 불만을 사 제1차 왕자의 난을 일으키는 계기가 됐다. 



태조는 신덕왕후의 묫자리 물색을 위해 상복 차림으로 지금의 안암동, 행주 등지에 행차하기도 했지만 도성 안에 묘를 쓰는 것은 법도에 어긋난다는 사실을 잘 알면서도 왕비를 가까이 두고 싶은 마음에 경복궁과 마주한 취헌방 언덕에 왕비의 능지를 정했다. 이 사실은 ‘조선왕조실록’ 태조 6년(1397년)  1월 3일자에 ’신덕왕후를 취헌방 북녘 언덕에 장례하고 정릉이라고 이름했다‘고 기록 되어 있다. 


태조는 정릉을 만들면서 능침 우측에 지신의 분묘도 마련케 해 사후에 합장하기를 원했고, 능 주변에는 소나무를 심어 묘역을 제대로 정비하게 하고는 이와 함께 왕후의 영혼을 위한 원당 사찰로 흥천사를 건립하도록 지시했다. 태조는 흥천사의 공사 현장을 살피기 위해 ‘흥천사에 거동하여 공장(工匠)들에게 음식을 주었다’고 ‘조선왕조실록’ 태조 5년(1396) 12월 1일자에 기록되어 있다. 



태조는 1396년 말에 흥천사를 창건하기 시작해 그 이듬해에 낙성을 보았다. 흥천사의 규모에 대해 향촌 권근의 기문에 의하면, 흥천사는 170칸이었고 위치는 능묘의 동쪽이라고 한 것으로 보아 아마도 지금의 영국대사관과 성공회 성당 언저리에 세워진 대찰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흥천사가 완공되고 같은 해(1397)에 왕비의 1주기가 되자 태조는 소상을 지내면서 법석(法席)을 베풀어 밭 1천 결을 내려 공양하는 비용에 충당하게 하면서 조계종 본사로 삼아 승당(僧堂)을 설치하고 참선 공부하는 것을 영구한 규정으로 했다고 기문은 전한다. 


이와 함께 태조는 다음 해 5월 1일에는 흥천사의 북쪽에 3층 누각 건물로 사리전(舍利殿)을 세우도록 명령해 군부대 부대장과 부관 중 공사를 맡겠다고 지원하는 사람 50명을 모집했다. 그리고 보름 조금 지난 5월 18일에는 사리전터를 시찰하고 건축 책임자인 감역제조 김주에게 ‘(내가) 이 사리전 세우기를 원한 지가 오래되었는데 지금 일을 마치지 않으면 후일에 이를 저지할 사람이 있을까 염려되니 마땅히 빨리 성취하여 소망에 보답하라’고 지시했다./다음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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