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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계의 정비 신덕왕후의 무덤 '정릉'
  • 박광준 기자
  • 등록 2023-11-30 21:27:59
  • 수정 2023-12-25 02:33: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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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정릉 능침/사진-문화재청[박광준 기자] 조선 태조 이성계의 정비 신덕왕후의 무덤으로, 1970년 5월 26일 사적으로 지정됐다.


조선 태조(太祖, 재위 1392∼1398)의 현비로 방번(芳蕃).방석(芳碩) 두 왕자와 경순공주(慶順公主)를 낳은 신덕왕후(神德王后 ?~1396) 강씨의 무덤이다. 신덕왕후 강씨는 신의왕후 한씨 사후 정비로 책봉됐다.


신성한 곳임을 알리는 붉은 기둥의 문 '홍살문'

어로-왕이 제향을 올리러 올 때 다니는 길, 향로-제향을 지낼 때 제관이 향과 축문을 들고 가는 길 하지만 신덕왕후에 대한 감정이 좋지 않았던 태종 이방원은 신덕왕후를 후궁으로 강등시켰고 능은 묘로 격하돼 일반 무덤과 비슷해졌다. 또한 정릉의 일부 석조물들을 홍수로 유실된 광통교를 다시 세우는 데 갖다 쓰고, 정자각도 없애버렸다. 하지만 약 200년 후 1669년(현종 10) 송시열의 상소에 의해 신덕왕후는 왕비로 복위됐고, 무덤도 왕후의 능으로 복원됐다.


원래 지금의 서울특별시 중구 정동(주한영국대사관 자리 추정)에 능역이 조성됐으나 다른 왕릉과는 달리 정릉만이 도성 안에 있고, 너무 크고 넓다 하여 도성 밖 현재의 위치로 이장했다. 이는 태조가 신덕왕후 소생인 여덟째 왕자 방석(芳碩)을 세자로 정한 것에 대한 태종의 사적인 감정에서 비롯된 것이라 한다.


제향을 지내는 건물 '정자각'

정자각에서 바라본 신덕왕후의 능 

정릉은 다른 왕후의 능에 비해 빈약한 편으로 병풍석이나 난간석이 없고, 상석과 상석을 받치는 고석(鼓石)과 장명등, 망주석.석양(石羊).석호(石虎).문인석.석마(石馬) 각 1쌍이 배치되어 있다. 그 중 장명등은 고려 공민왕릉(현릉)의 양식을 따른 것으로 조선시대 능역에서 가장 오래된 석물인 동시에 예술적 가치도 높다. 


신덕왕후의 본관은 곡산(谷山) 또는 신천(信川). 판삼사사(判三司使) 강윤성(康允成)의 딸이다.


신덕왕후가 집권 거사에 참여해 중요한 임무를 수행한 뒤 계비가 된 배경에는 신천강씨의 권문세족으로서의 위치가 컸다. 아버지 강윤성과 작은아버지 강윤충(康允忠).강윤휘(康允暉) 형제들은 충혜왕.공민왕 때 재상권문가로서 세도를 떨쳤다.


제향을 올리는 음식을 준비하는 건물 '수라간'

능을 지키는 수복이 머무는 건물 '수복방'강윤휘의 아들인 상장군(上將軍) 강우(康祐)는 이성계(李成桂)의 큰아버지인 쌍성총관부(雙城摠管府)의 쌍성만호 이자흥(李子興)의 사위로서 두 집안은 겹사돈 관계에 있었다.


강윤충은 충숙왕의 폐행(嬖幸)이 되어 세를 떨쳤고, 충혜왕 때에는 조적란(曺頔亂)을 평정한 공으로 일등공신에 책봉됐다.


아버지 강윤성도 충혜왕과 충목왕 때에 찬성사(贊成事)가 됐고 또한 강윤휘는 충정왕 때 판도사판서(版圖司判書)를 역임했다.


왕의 행적을 적은 신도비나 표석을 보호하는 건물 '비각'


그리고 1356년(공민왕 5)에 원나라의 파병 요청으로 장사성군(張士城軍)의 토벌군이 동원된 적이 있는데, 이 때 원나라에서 파견된 사신이 바로 원나라의 이부낭중(吏部郎中)의 직위를 가진 이성계의 재종숙 이나해(李那海)와 숭문소감(崇文少監)의 직위를 가진 강씨의 오빠 강순룡(康舜龍)이었다.


또한, 부원기(附元期) 때 폐행 권신의 일족으로 발호한 영산신씨(靈山辛氏) 신귀(辛貴)의 처도 강씨의 아우가 된다. 이와 같이 고려 말기 권문세족의 배경을 가진 강씨는 이성계의 둘째 부인으로, 위화도회군을 할 당시에는 포천 철현(鐵峴)의 전장(田莊)을 맡아 살림을 따로하고 있었다.


이 때 변고에 대비, 일가족과 함께 동북면으로 피해 이천에 있는 한충(韓忠)의 집에서 머물렀다. 이성계의 위화도회군 후 조선이 개국되자 1392년 8월에 현비(顯妃)로 책봉됐다. 신덕왕후의 친가는 이성계의 권력 집중과 조선개국 과정에서 중요한 임무를 수행했다는 많은 일화가 전해오고 있다.


왕릉 관리자가 지내는 업무 공간이자 제향을 준비하는 곳 '재실'




사후 존호와 능호를 각각 신덕(神德)과 정릉(貞陵)으로 정했다. 개국공신들의 헌의로 국모를 높이는 뜻의 공신수릉제(功臣守陵制)를 채용해 조선의 항식(恒式)으로 삼았고, 개국공신 이서(李舒)에게 수릉직을 맡게 했다.


그런 뒤 기제(忌祭)를 맞아 경복궁 내 강씨의 처소를 인안전(仁安殿)으로 정하고 영정을 봉안했다가 이듬해 9월 정릉에 영각(影閣)을 지어 옮겼다.


1399년(정종 1) 기일에 흥천사(興天寺)를 원당으로 삼아 제사할 때 태상왕(太上王: 태조)도 참례했다. 태상왕이 사망한 뒤 1409년(태종 9) 2월에 묘를 사을한(沙乙閑)곡에 이장했다가 다시 한강 남쪽 공현(鞏縣)의 뒤에 이장하여 왕비의 제례를 폐하고, 봄.가을 중월제(中月祭)로 격하시켰다. 그 뒤 1412년 기제는 서모나 형수의 기신제(忌辰祭)의 예에 따라 3품관(三品官)으로 제사를 대행하게 했다. 200여 년 뒤인 1581년(선조 14) 11월 먼저 3사(三司)에서 신덕왕후의 시호와 존호를 복귀하고, 정릉을 회복하자는 논의가 있었으나 6개월 여만에 정파된 바가 있다.



능역과 속세를 구분하는 물길을 건너는 돌다리 '금천교'



이 때 중신들의 주장은 건원릉비(健元陵碑)에 신의(神懿)·신덕이 열거되어 있고, 강씨가 차비(次妃)로 서술된 점, 태조가 정한 강비의 시책(諡冊)에 칭송이 엄연한데 그 뜻과 달리 후대인들이 부묘(祔廟: 종묘에 신주를 모시는 일)를 폐하고 능을 옮겨 중대한 원(寃)을 남게 한 것 등이 모두 천리에 어긋난다는 것이었다.


그 뒤 현종 대에 이르러 정통명분주의에 입각한 유교이념이 강조되고 예론이 크게 일어나자 강씨의 부묘 문제는 다시 대두했다.


즉, 1669년(현종 10) 2월 판중추부사 송시열(宋時烈) 등은 정릉과 흥천사기문(興天寺記文)이 갖추어 있음을 지적하면서 신덕왕후를 종묘에 배향해야 한다는 차자(箚子)를 올렸다.


이로써 이 해 9월 강씨의 기신제가 8월 11일로 고정돼 200여 년만에 복구됐다. 그리고 추진 기구인 부묘도감(祔廟都監)에서 예조와 함께 시호 제정을 발의하여 순원현경(順元顯敬)으로 정했다.


시호는 순원현경신덕왕후(順元顯敬神德王后)이다./사진-박광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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