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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시 문화재 54] 풍산 심씨 문정공파 묘역 外
  • 박광준 기자
  • 등록 2023-12-01 19:13:19
  • 수정 2023-12-01 23:49: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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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유형문화재 제77호-풍산 심씨 문정공파 묘역, 유형문화재-유형문화재 제78호 신선경과 류인호 묘역

[박광준 기자] # 풍산 심씨 문정공파 묘역

유형문화재 제77호


풍산 심씨 문정공파 묘역(豊山沈氏文靖公派墓域)은 풍산 심씨 가문의 무덤 60여기가 있는 곳으로, 1991년 12월 24일 서울특별시의 유형문화재 제77호로 지정됐다. 2014년 10월 23일 문화재 지정내용 중 일부 변경됐다.


풍산 심씨 문정공파 묘역은 조선 중기의 문신 심정(沈貞)의 묘를 비롯해, 그의 아들 심사손(沈思遜), 심사순(沈思順), 손자 심수경(沈守慶) 등 풍산 심씨 가문의 묘 60여기가 함께 조성돼 있는 곳이다.


심정의 자는 정지(貞之), 호는 소요정(逍遙亭)이고, 아버지는 적개공신(敵愾功臣)이었던 심응(沈膺)이다. 연산군 1년(1495) 생원시에 합격하고, 1502년 별시문과에 을과로 급제, 이듬해 수찬이 됐다. 1506년 중종반정에 가담, 정국공신(靖國功臣) 3등에 녹훈되고 화천군(花川君)에 책봉됐다. 이듬해 지중추부사로서 사은사(謝恩使)에 임명돼 명나라에 다녀왔고, 중종 4년(1509) 성천부사 등의 외직을 거쳐, 1515년 이조판서까지 승진했으나 삼사(三司)의 탄핵으로 물러났다.


다시 1518년에 형조판서의 물망에 올랐으나 조광조(趙光祖) 등 사림의 반대로 임명되지 못했다. 1519년 조광조 등이 위훈삭제(僞勳削除)를 요구, 반정공신들로부터 심한 반발을 받게 되자 경빈(敬嬪) 박씨를 통해 조씨전국(趙氏專國)의 말을 궁중에 퍼뜨리고 남곤(南袞).홍경주(洪景舟) 등과 모의, 왕을 움직여 기묘사화(己卯士禍)를 일으켜 결국 정권을 장악했다.



그러나 경빈 박씨의 동궁저주사건을 처리하는 과정에서 그와의 관련 사실이 드러나게 돼, 강서로 귀양갔다가 이항(李沆).김극핍(金克愊)과 함께 신묘삼간(辛卯三奸)으로 지목돼 죽음을 당했다. 그는 형제간에 우의가 지극해 곤경에 처한 동생 심의(沈義)를 끝까지 보살펴주었다고 하면서, 교묘한 꾀를 잘 내어 지혜주머니[智囊]로 불렸다고 한다.


심정의 아들 심사손은 자가 양경(讓卿)이고, 중종 8년(1513) 사마시에 합격하고, 1517년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한 뒤, 승문원을 거쳐 예문관에 들어가 사관(史官)으로 오래 근무했다. 1523년 비변사 낭관으로 서북면의 야인정벌에 공을 세우고, 예조좌랑․사간원정언을 거쳐 병조정랑이 되어서는 군무에 숙달함을 인정받아 중요한 일은 도맡아 처리했다. 홍문관에 들어가 수찬.응교를 지내고, 1525년 경상우도어사로 나갔다가 다시 돌아와 전한(典翰)․직제학을 역임했다. 1528년 36세의 나이에 서북 변경의 야인들의 준동이 다시 심해지자 만포진첨절제사가 되어 변방 방어에 정력을 쏟다가, 야인의 기습을 받고 살해됐다.


심수경의 자는 희안(希安), 호는 청천당(聽天堂)이고 아버지는 심사손이다. 명종 1년(1546) 식년문과에 장원으로 급제, 1552년 검상(檢詳)을 거쳐 직제학을 지냈다. 1562년 중종의 능을 옮길 때 경기관찰사로서 큰 상여가 한강을 건너는 선창(船艙)을 설치하지 않아 파직됐다. 뒤에 대사헌과 8도관찰사를 역임했고, 청백리(淸白吏)에 녹선(錄選)됐다. 선조 23년(1590) 우의정에 오르고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갔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삼도체찰사가 되어 의병을 모집했고, 이듬해 영중추부사가 됐다가 1598년 벼슬에서 물러났다. 문장과 서예에도 능했고, 저서로는 '청천당시집(聽天堂詩集)' '청천당유한록(聽天堂遺閑錄)'이 있다.


묘역에서 문화재로 지정된 것은 심정의 묘 1기, 심사순의 묘 1기, 심사손과 부인의 묘 2기, 심수경과 부인의 묘 2기와 묘비 5기, 상석 4기, 문무인석 4기, 신도비 1기 등이다. 조선 중기의 묘제 연구와 석조미술의 연구에 기여할 수 있는 대표적인 예로 크게 주목되고 있다.


# 신선경과 유인호 묘역

유형문화재 제78호 신선경과 류인호 묘역


신선경과 류인호 묘역(慎先庚과 柳仁濠 墓域)은 서울특별시 송파구 오금동에 있는, 조선 전기 문신인 신선경의 묘와 사위인 류인호 후손의 묘역으로, 1991년 12월 24일 지정된 서울특별시의 유형문화재 제78호 거창신씨묘역과 제79호 문화류씨묘역을 통합해 2008년 10월 30일 서울특별시의 유형문화재 제78호 신선경과 류인호 묘역(慎先庚과 柳仁濠 墓域)으로 명칭을 변경지정했다.


조선 전기의 문신인 신선경의 묘를 비롯한 거창 신씨들의 묘역으로, 신선경은 세조 1년(1456) 사헌부 장령을 거쳐 동지중추부사를 지냈다. 거창 신씨는 원래 중국 송나라 개봉부 출신인 신수(愼修)가 송나라 사신으로 고려의 수도 개경에 왔다가 고려에 귀화해 고려인이 됨으로써 거창 신씨의 시조가 됐다.


거창 신씨 묘역 내에 문화 류씨 묘역이 자리 잡고 있는데, 이는 공조참의 류인호(柳仁濠)의 묘소이다. 류인호는 신선경의 사위로 이 묘는 부부합장묘이다.



묘소는 서울특별시 송파구 오금공원 내에 있는데, 이 가운데 신선경의 묘는 약 500년 전에 조성된 것으로 정부인 한씨와의 쌍분이다. 2개의 봉분 가운데에는 묘비.상석이 있는데 묘비 윗부분이 연꽃무늬로 장식돼 있어 묘비 연구에 중요한 자료로 평가된다.


거창 신씨 묘역은 조선 전기의 문신인 신선경(愼先庚)의 묘를 비롯한 거창 신씨들의 가족묘역으로, 거창 신씨의 시조는 원래 중국 송(宋) 나라 개봉부(開封府) 사람으로 지사라는 벼슬에 있던 신수(愼修)다. 그는 송나라와 고려의 외교관계를 개설하기 위해 사절단으로 고려의 수도 개성에 왔다가 귀화하여 고려인이 됨으로써 거창 신씨의 시조가 되었다. 신수는 고려 문종 29년(1075) 시어사(侍御史)가 되었고, 숙종 때 수사공 우복야참지정사(守司空右僕射參知政事)에 이르러 사직하였으며, 시호는 공헌(恭憲)이다.


신선경은 세조 원년(1456) 사헌부장령을 거쳐 가선대부 동지중추부사(嘉善大夫同知中樞府事)를 지냈다. 묘역은 약 500년 전에 조성된 것으로 정부인(貞夫人) 한씨와의 쌍분으로 되어 있으며, 그 가운데에 묘비․상석이 각각 1개씩 있고, 문인석이 1쌍 있다. 묘비는 윗 부분이 연꽃무늬로 장식된 갓 모양을 하고 있는 등 조선 초기의 특유한 형태로 묘비 연구에 귀중한 자료이다. 그리고 동쪽 옆에 문화 류씨인 공조참의 유인호(柳仁豪)와 숙부인(淑夫人) 거창 신씨의 합장묘가 있는데, 여기에는 묘비.상석이 각각 1개씩 있으며 망주석 1쌍이 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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