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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시 문화재 55] 문양군 류희림 묘역 外
  • 박광준 기자
  • 등록 2023-12-01 19:43: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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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유형문화재 제79호 문양군 류희림 묘역-유형문화재 제80호 여계 묘역-유형문화재 제81호 유형문화재 제81호-유형문화재 제90호 광주이씨광릉부원군파묘역-유형문화재 제94호 효간공 이정영 묘역

[박광준 기자] # 문양군 류희림 묘역

유형문화재 제79호


문양군 류희림 묘역(文陽君 柳希霖 墓域)은 서울특별시 송파구 오금동에 있는, 임진왜란 때 이항복과 함께 3등공신으로 선조대왕을 보필한 문양공 류희림(柳希霖), 문원군 류복룡(柳伏龍)의 묘소이다. 2013년 7월 18일 서울특별시의 유형문화재 제79호로 지정됐다.(1991.12.24 문화유씨묘역 변경지정)


임진왜란때 이항복과 함께 선조를 보필해 호성3등공신, 광해의 분조참여등으로 위성2등공신인 문양군 류희림(柳希霖), 문원군 류복룡(柳伏龍) 공조참의 류인호(柳仁濠 문화재78호) 3대 묘소이다.


문양군 류희림 묘역/사진-문화재청류희림은 복룡의 아들로서 조선 중기의 문신이다. 명종 15년(1560) 1,000여명의 성균관 유생을 대표해 다시 일어나고 있는 불교를 비판하고, 선종.교종 모두를 폐지하자는 상소를 올렸다. 명종 16년(1561) 식년문과에 병과로 합격해 여러 벼슬을 역임했다. 내직으로만 근무하다 외직으로 1579년 충청도관찰사, 1585년 황해도관찰사, 1587년 강원도관찰사 등 3도관찰사를 역임하고 선조 25년(1592)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73세 고령에도 첨지중추부사로서 왕을 호종해 좌승지로 발탁됐다. 


이후 동지중추부사.예조참판 등을 거쳐 1597년 동지돈녕부사가 됐다. 죽은 뒤인 선조 37년(1604) 호성공신 3등에 봉해지고 문양군에 봉해졌다. 광해세자가 왕이된후는 위성공신 2등에 봉해져서 임란시승전에 기여한 양대공신이 됐다


묘소는 서울특별시 송파구 오금공원내에 있고, 묘역에는 상석.망주석(望柱石:멀리서도 무덤이 있음을 알려주는 돌기둥).문인석.신도비(神道碑:왕이나 고관들의 평생업적을 기록하여 무덤 가까이에 세워두는 비) 등이 있다.


# 여계 묘역

유형문화재 제80호


여계 묘역/사진-문화재청[박광준 기자] 여계 묘역(呂稽墓域)에는 함양 여씨의 선조인 숭의랑공 여계의 묘가 위쪽에 있고 그 아래쪽에 부인의 묘가 있다. 서울특별시는 1991년 12월 24일 지정됐다. 


함양여씨묘역에는 함양 여씨의 선조인 숭의랑공 여계(呂稽)의 묘가 위쪽에 있고 그 아래쪽에 부인의 묘가 있다. 함양 여씨의 시조는 중국 내주 사람 여어매(呂御梅)이다. 그는 원래 당나라의 한림학사를 역임했고, 황소의 난을 피해 신라 헌강왕 3년(877) 신라에 귀화했다. 경상북도 성주군 벽진면에 정착해 살았고, 고려시대에는 공조전서를 지냈다.


여계는 고려 말에서 조선 초기 병조판서를 지낸 여칭(呂稱, 1351~1423)의 아들이고, 태종 때에 호조좌랑.호조참판 등을 역임했다. 세종 3년(1421)에 세상을 떠났고, 세종 10년(1428)에 이곳에 묘소를 마련했다. 부인은 청송 심씨로 당시 정승을 지낸 심백덕의 손녀이며, 판사를 지낸 심의구의 딸이다.


# 남지기로회도(南池耆老會圖)

유형문화재 제81호


남지기로회도(南池耆老會圖)는 기로회의 기신들과 연로한 임금과의 모임을 조선 중기의 도화서 화가 이기룡이 1629년에 그린 경호당원도(보물 제866호:2품 이상의 벼슬을 가진 자로서 70세 이상된 신하와 연로한 임금과의 모임을 그린 것)을 본 떠 그린 그림이다.

 

남지기로회도(南池耆老會圖)/사진-문화재청비단에 채색해 족자로 만든 이 그림은 12명의 노신들과 주안상을 준비하는 여인들의 모습 등이 두드러지게 표현돼 있고, 이들이 입고 있는 옷들의 색채도 다양하다. 맨 앞쪽의 좌우에 버드나무가 짝을 지어 서 있고, 그 뒤에 연꽃이 아름답게 피어있는 연못이 펼쳐지고 있으며, 그 건너편에 노회가 열리는 건물이 배치되어 있다. 연못과 연꽃이 어우러지는 분위기가 이 모든 것을을 휘감고 있으며 짜임새 있고 단순한 구도가 돋보인다. 산뜻하면서도 은은한 색채감 등이 아름다운 연꽃과 어울려 시적인 분위기를 짙게 풍겨준다.


조선 전기의 그림들이 안견파 화풍의 산수화를 배경으로 하여 계회의 장면이 아주 작게 상징적으로 표현하는것에 비해, 이 작품은 조선 중기의 작품답게 모임의 장면표현을 훨씬 강조하고 있다.


그림 아래에 장유와 박세당의 글이 남아 있어 이 그림에 대한 내력을 알 수 있다. 즉, 숭례문 앞에 있던 홍첨주의 집에서 열린 모임을 그린 것으로, 인조 7년(1629) 도화서 화원 이기룡이 그린 것을 병자호란 후 원본을 본 떠 다시 그려 놓은 것이라 한다.


# 광주이씨광릉부원군파묘역

유형문화재 제90호


광주이씨 광릉부원군파 묘역(廣州李氏 광릉府院君派 墓域)은 서울특별시 강동구 암사동에 있는 조선시대의 묘역으로, 1993년 4월 3일 서울특별시의 유형문화재 제90호로 지정됐다.


조선 세종 때부터 연산군에 이르기까지 7명의 왕을 섬기면서 도덕정치를 실천한 광릉부원군 이극배(1422∼1495)와 그 후손들의 묘이다.


광주이씨광릉부원군파묘역/사진-문화재청이극배는 세종 29년(1447) 사마시에 합격해 진사가 되고, 그해 식년문과에 정과로 급제했다. 세조가 왕위에 오르는 데에 큰 공을 세워 좌익공신 3등에 기록되고, 이어 광릉군에 봉해졌다. 1459년 북방의 야인정벌 때 신숙주의 종사로 출전했고, 1462년부터 이조.예조.병조.형조의 판서를 두루 역임했다. 성종 10년(1479) 영중추부사가 됐고, 1481년부터 2년 동안의 흉년이 발생했을 때에는 진휼사로 활약했다. 성종 16년(1485) 우의정이 됐고, 1493년 영의정에 임명됐으나 노병을 구실로 사양했고, 다시 광릉부원군에 봉해졌다.


묘역은 서울특별시 강동구 암사동에 있고, 이 가운데 이극배의 묘는 연산군 1년(1495)에 조성된 것으로 부인 경주 최씨와 쌍분을 이루고 있다. 묘 앞에는 묘비.상석.장명등(長明燈:무덤 앞에 세우는 돌로 만든 등)이 있고 좌우로는 문인석.무인석이 각 2쌍씩 있다. 신도비(神道碑:왕이나 고관 등의 평생 업적을 기리기 위해 무덤 근처 길가에 세운 비)는 연산군 2년(1496)에 세워졌다. 비문은 명필가로 유명한 예조판서 겸 예문관 제학 신종호가 지은 것이다. 머릿돌에 새겨진 특이한 구름무늬와 비문의 서체, 정교한 석공기술은 커다란 예술적.기술적.학술적 가치를 지닌다.


# 효간공 이정영 묘역

유형문화재 제94호


효간공 이정영 묘역(孝簡工 李正英 墓域)은 조선후기 문신 서곡 이정영의 묘으로, 1994년 5월 10일 서울특별시의 유형문화재 제94호로 지정됐다.


조선 후기의 문신인 서곡(西谷) 이정영(1616∼1686)의 묘이다.


효간공 이정영 묘역/사진-문화재청인조 14년(1636) 별시문과에 병과로 합격했고,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소현세자가 볼모로 중국 심양(지금의 북경)에 갈 때 따라 갔고 귀국해서는 여러 벼슬을 역임했다. 효종 2년(1651) 교리로서 술에 취해 경연에 나갔다가 탄핵을 받아 파직했고 그후 현종 1년(1660) 대사간이 됐고, 이듬해 진위겸 진향부사로 중국 청나라에 다녀와 평양도 관찰사가 됐다. 


1672년 한성부판윤으로 다시 동지부사가 되어 청나라에 다녀왔다. 1674년 현종이 죽자 산릉도감당상을 거쳐 이조판서가 됐고, 숙종 3년(1677) 형조판서로 시관이 되어 부정을 저지른 죄목으로 철원에 유배됐다가 풀려났다. 이어 판돈녕부사가 됐고 1685년 기로소에 들어갔다.


묘소는 서울특별시 동작구 사당동에 있고, 묘 앞에는 묘비.상석이 있고 좌우로는 망주석(望柱石:멀리서도 무덤이 있음을 알려주는 돌기둥).문인석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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