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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시 문화재 57] 양효공 안맹담과 정의공주 묘역 外
  • 박광준 기자
  • 등록 2023-12-02 01:14:33
  • 수정 2023-12-02 01:24: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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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유형문화재 제50호 양효공 안맹담과 정의공주 묘역-유형문화재 제59호 충헌공 김구 묘역-유형문화재 제60호 성안공 상진 묘역-유형문화재 제70호 충숙공 이상길 묘역-

양효공 안맹담과 정의공주 묘역_원경/사진-문화재청[박광준 기자] # 양효공 안맹담과 정의공주 묘역

유형문화재 제50호


양효공 안맹담과 정의공주 묘역(良孝公 安孟聃과 貞懿公主 墓域)은 서울특별시 도봉구 방학3동에 있는 조선시대의 무덤이다. 1982년 11월 13일 서울특별시의 유형문화재 제50호로 지정됐다.


이 묘역은 연창군 양효공 안맹담(延昌君 良孝公 安孟聃, 1415~1462)과 그의 부인 정의공주(貞懿公主:?~1477)를 합장한 곳이다. 이 묘역의 봉분은 쌍분이고, 신도비, 묘표 2기, 상석 2기, 문인석 2쌍, 3단 계체석 등의 석물이 남아 있다.


양효공의 본관은 죽산으로 함경도 도관찰출척사 안망지의 아들이다. 1428년(세종 10)에 14세의 나이로 세종의 둘째딸 정의공주와 결혼했는데 부부의 금슬이 매우 좋았다고 전한다. 세종은 한강 가운데 있는 저자도와 낙천정을 하사했다. 그는 초서를 잘 써서 서예가로 이름이 높았고 음악과 의학에도 통달했다. 묘역의 묘표 2기는 쌍분 앞에 있어 정의공주가 왼쪽에 합장됐음을 알 수 있다. 묘표의 관석에는 여의 두문과 운문을 새겼는데 이는 조선 초기 일부 묘표에서만 찾아볼 수 있다.


정의공주묘비/사진-문화재청1466년(세조 12) 묘소 동남쪽 아래에 신도비를 세웠다. 정인지가 비문을 지었고 안맹담의 4남안빈세가 비문과 전액의 글씨를 썼다. 비는 이수, 비신, 귀부로 되어 있다.


현지 안내문에 의하면, 이곳은 양효공 안맹담(1415~1462)과 세종의 둘째 딸인 정의공주(?~1477)의 무덤으로, 서측이 안맹담, 동측이 정의공주 무덤이다. 이들은 1428년에 결혼하여 4남 2녀의 자녀를 두었다. 안맹담[본관 죽산(竹山)]은 초서를 잘 써 서예가로 이름이 높았고, 활쏘기와 말타기에도 출중했다.


정의공주는 성품이 총명하고 지혜로우면서 책력과 산술을 잘 이해했다. 세종대왕은 특별히 정의공주를 아껴 저자도(옥수동 동쪽 한강에 있었던 섬)와 낙천정(광진구 자양동에 있었던 정자)을 내려주기도 했다.


안맹담이 세상을 떠나자 조정에서는 양효공(良孝公)이라는 시호를 내려 주었다. ‘양(良)’은 온화하고 선량하다는 의미이고, ‘효(孝)’는 어질고 은혜롭게 어버이를 섬겼다는 의미이다.


양효안공묘비/사진-문화재청불심이 깊었던 정의공주는 남편의 명복을 빌기 위해 1469년 ‘지장보살본원경’(보물 제966호)이라는 불경을 간행하기도 했다. 무덤 앞에는 안맹담의 행적을 기록한 신도비(神道碑), 석등(石燈), 문관의 형상을 한 문인석(文人石), 묘 앞에 세우는 비석인 묘갈(墓碣) 등이 세워져 있다.


조선 시대에는 2품 이상의 관직을 역임하고 뛰어난 업적을 남긴 사람의 생애와 업적을 기리는 신도비를 만들어 세웠다. 1466년에 세워진 안맹담의 신도비는 조선 초기의 신도비 양식을 대표하는 작품으로 손꼽힌다. 신도비의 윗부분에는 양효안공묘비라는 글씨가 전서체로 새겨져 있고, 몸돌에는 안맹담의 생애와 업적에 대한 기록이 실려 있다. 


신도비의 비문은 부부와 사돈이기도 한 하동부원군 정인지(1396∼1478)가 지었고, 글씨는 부부의 넷째 아들인 안빈세(1445∼1478)가 썼다. 신도비 아랫부분의 거북돌은 경복궁에 한 쌍으로 있던 거북돌 중 하나를 왕명으로 가져온 것이라고 한다.


# 충헌공 김구 묘역

유형문화재 제59호


충헌김공신도비/사진-문화재청충헌공 김구 묘역(忠憲公金構墓域)은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59호다. 충헌 김공 신도비는 조선 후기의 문신 충헌공 김구의 신도비이다. 비문에는 숙종 연간에 활약했던 그의 행적과 청렴하고 단정했던 그의 성품이 잘 기술돼 있고, 말미에는 자손의 약력과 명문이 새겨져 있다.


신도비는 영조 19년 10월 건립됐는데, 화강암으로 만든 대좌 위에 대리석 질의 비신을 세우고, 그 위에 화강암으로 지붕 모양의 개석을 얹은 형태이다. 대석에는 아무런 꾸밈이 없으나 개석에는 서까래와 기왓골을 새기고 네 귀퉁이에 봉황을 새겼고 용마루에 쌍룡을 새기는 등 조각 장식이 화려해 조선 후기의 석비 가운데 우수한 예라고 하겠다. 신도비 북쪽의 묘소 주위에는 묘갈.망주석.석등.석양 등의 석물이 있는데, 모두 조각 솜씨가 뛰어나다.


비문은 영의정 이의현이 짓고 좌의정 서명균이 썼고 우의정 유척기가 머리전서를 썼다. 서명균은 바로 김구의 둘째 사위로 비문 글씨에 뛰어났고, 유척기는 전서 글씨로 유명했다. 당시 김구의 둘째 아들 김재로가 1740년 이미 영의정에 올라있던 사실을 보면, 당시 삼상이 비문을 짓고 쓴 사연을 짐작하게 한다.


# 성안공 상진 묘역

유형문화재 제60호


성안상공신도비/사진-문화재청성안공 상진 묘역(成安公 尙震 墓域)은 서울특별시 서초구 서초동 상문고등학교내에 있는 조선시대의 묘역이다. 1984년 11월 3일 서울특별시의 유형문화재 제60호로 지정됐다. 


신도비란 임금이나 고관의 평생업적을 기록해 그의 묘앞에 세워두는 것으로 이 비는 조선 명종 때 영의정을 지낸 상진(1493∼1564) 선생의 공적을 기리고 있다.


상진은 어려서 부모를 잃고 매부의 집에서 자랐고, 중종 14년(1519) 문과에 급제해 여러 관직을 두루 거친 후 명종 4년(1549)에 우의정에 임명됐다. 그후 명종 18년(1563)까지 재상자리에 있으면서 충성되고 너그러운 마음으로 직무에 충실했다. 성품 또한 청렴결백해 두터운 신임을 받았는데, 그가 죽자 명종은 '성안(成安)'이란 시호를 내렸다.


상문고등학교 내에 자리하고 있는 비는 꽃과 호랑이를 새긴 받침돌 위에 비몸을 세우고 지붕돌을 올린 모습이다. 명종 21년(1566)에 세운 것으로, 비문은 선조 때 문장가인 홍섬이 짓고, 글씨는 송인이 썼다.


# 충숙공 이상길 묘역

유형문화재 제70호


충숙이공신도비/사진-문화재청충숙공 이상길 묘역(忠肅公 李尙吉 墓域)은 조선 중기의 문신 충숙공 이상길의 묘역이다. 서울특별시 노원구 하계동에 있고, 1988년 4월 20일 서울특별시의 유형문화재 제70호로 지정됐다.


신도비란 임금이나 고관의 평생업적을 기록해 그의 묘앞에 세워두는 것으로, 이 비는 조선 중기의 문신인 이상길 선생의 공적을 기리고 있다.


충숙이공신도비/사진-문화재청이상길 선생은 선조 18년(1585) 문과에 급제해 벼슬길에 올랐다. 인조 때에는 공조판서를 지내기도 했고, 인조 14년(1636)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조정의 명을 받아 영위사가 되어 80세의 노령에도 강화도에 들어갔다. 이듬해 청나라 군대가 강화도로 몰려오자 아들에게 뒷일을 부탁한 뒤 스스로 목을 매어 생을 마쳤다. 이러한 그의 충절을 기려 '충숙공(忠肅公)'이라는 시호가 내려졌고 좌의정에 추증됐다.


비는 사각의 받침돌 위로 비몸을 세우고, 지붕돌을 얹은 모습으로, 조선 중기의 양식이 그대로 나타나 있다. 비문은 성균관제주였던 송시열이 짓고, 글씨는 송준길이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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