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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궐이야기 38] 덕수궁의 전신인 경운궁의 역사 ‘석어당’에서 시작
  • 이승준 기자
  • 등록 2023-12-04 19:59:17
  • 수정 2024-04-15 17:34: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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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월산대군의 저택 ‘석어당’


[이승준 기자] 덕수궁의 전신인 경운궁은 1897년 아관파천에서 환어한 고종이 심기일전해 대한제국을 선포한, 자주적인 근대국가의 황궁으로 궁궐 체제를 두로 갖추고 있었다. 궁궐의 상징인 정전은 중화전(中和殿)이고 침전은 함녕전(咸寧殿)이다. 또 국가 의식을 행한 곳은 중화전이었고, 고종이 줄곧 기거하다 세상을 떠난 곳도 함녕전이다. 




그러나 덕수궁 중화전에서는 대한제국의 위용은 커녕 경복궁 근정전이나 창덕궁 인정전 같은 장엄함은 보이지 않는다. 단층 건물인 데다 월대도 낮아 궁궐의 정전다운 위엄이 전혀 없다. 그러나 고종이 이어할 중화전의 모습은 그렇치 않다. 당당한 중층 건물을 회랑이 반듯하게 감싸고 있었다. 그러나 1904년 4월 14일 경운궁의 대화재로 인해 중화전, 함녕전 등 주요 전각들이 모두 소실되어, 황급히 복구사업을 벌인다. 하지만 을사늑약을 당하는 상황에서 국력을 경운궁 복원에 쏟을 수 없어 단층 건물로 지었던 것이다. 이러한 환경에서도 궁궐의 명맥과 명색이 유지되었던 것은 왕조를 끝까지 지키려던 고종의 의지를 엿볼 수 있다.


덕수궁의 전신인 경운궁의 역사를 살펴보면 중화전 곁에 있는 석어당(昔御堂)에서 시작해야 한다. 덕수궁 안에는 유일하게 단청이 칠해지지 않은 이 건물은 임진왜란 때 의주로 피난했던 선조가 한양으로 돌아와 임시 행궁으로 기거하다 세상을 떠난 곳이라 옛 석(昔) 자, 어거할 어(御) 자를 써 석어당이라는 이름을 갖게 됐다. 




석어당 역시 1904년 경운궁 대화재 때 소실됐다. 사실 궁궐 체제에 꼭 필요한 건물은 아니었지만 이듬해에 다시 복원했다. 특히 석어당 뜰 앞에는 살구나무 한 그루가 마치 역사의 상처를 보듬듯 서 있다. 


한양도성 건설 당시 황토마룰 언덕빼기이던 덕수궁 일대는 신덕왕후의 정릉이 조성되었을 때까지도 여전히 녹지같은 곳이었으나, 태종이 등극해 능역 100보 밖으로 주택짓기를 허락하고 나중에 정릉을 도성 밖으로 이장하면서 덕수궁 일대는 왕족과 권세가들의 집들이 차지하게 되었다. 그때 지금의 덕수궁 자리에 왕가의 저택 한 채가 들어선다. 이 건물이 월산대군 이정의 집으로 훗날 덕수궁의 기원이 된 석어당이다. 



월산대군은 세조의 장손으로, 아버지는 세조의 장남이다. 훗날 덕종으로 추존된 의경세자로일찍 세상을 떠나는 바람에 왕통이 세조의 둘째 아들인 예종에게 넘어갔고 의경세자의 부인인 한씨는 궁을 떠나게 된다. 이때 세조가 남편을 잃고 출궁하는 며느리와 두 손자가 함께 살도록 마련해준 저택이 지금의 석어당이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났을 때 한양에 처들어온 왜군이 경복궁.창덕궁을 모두 불태우고 정릉동 주택가에 주둔했기 때문에 이 저택은 피해갈 수 있었다. 선조가 다시 한양으로 돌아오면서 임시 거처로 삼은 곳이 바로 월산대군의 고택으로 덕수궁의 전신의 경운궁의 역사는 이렇게 시작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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