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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시 문화재 65] 서울 봉국사 지장시왕도 外
  • 박광준 기자
  • 등록 2023-12-10 03:16: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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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유형문화재 제352호-봉국사 지장시왕도, 유형문화재 제351호-봉국사 아미타괘불도, 유형문화재 제353호 명부전 시왕도 및 사자도, 유형문화재 제355-봉국사 석조지장삼존상과 시왕상 및 권속

[박광준 기자] # 서울 봉국사 지장시왕도


서울 봉국사 지장시왕도는 서울특별시 성북구 봉국사 명부전 중앙단의 지장삼존상 뒷면에 봉안되어 있다. 2013년 12월 26일 서울특별시의 유형문화재 제352호로 지정됐다.


봉국사 명부전 중앙단의 지장삼존상 뒷면에 봉안돼 있는 지장시왕도(地藏十王圖)이다. 화면 중앙에는 도명존자(道明尊者)와 무독귀왕(無毒鬼王)을 협시로 한 지장삼존을 중심으로 하단에 선악동자(善惡童子)가 자리하고, 좌우측 주위로는 각각 5대왕씩 10대왕을 비롯해 판관(判官)과 사자(使者), 옥졸(獄卒), 천동․천녀(天童․天女), 마두․호두신(馬頭․虎頭神) 등의 권속들을 배치했다.


둥근 머리 광배와 몸 광배를 구비한 채 연화좌 위에 결가부좌하고 앉아 있는 중앙의 지장보 살은 어깨가 넓게 벌어져 건장한 신체로 두 손을 가슴 앞에 모아 구슬을 감싸 받쳐 들고 있고, 무릎 아래쪽의 두 선악동자 중 왼편의 동자는 지장보살의 석장을 어깨에 비켜 잡았고 오른 편의 동자는 어깨에 인장함(印章函) 모양의 상자를 매고 있다.


서울 봉국사 지장시왕도, 2013년 12월 26일 서울특별시의 유형문화재 제352호로 지정됐다./사진-문화재청지장보살의 몸 광배를 따라 둥글게 열 지어 배치돼 있는 권속들 가운데 십대왕은 관을 쓴 문관 복장에 홀 또는 지물을 들었고, 두건 또는 투구를 쓴 사자는 합장을 하거나 삼지창 또는 무기를 들고 강한 인상을 풍긴다. 관모를 쓴 판관은 두루마리 형태의 권을 들고, 천녀는 손에 공양물을 받쳐 들고 있다.


권속들 맨 바깥쪽으로 붉은색 혹은 보라 빛깔의 머리칼을 휘날리고 있는 옥졸들과 마두․호두 신을 배치해 지장보살무리와 배경을 경계 지어 공간감을 부여하고 있음은 물론, 앞쪽과 뒤쪽 존상의 크기를 달리 하여 자칫 적색 위주로 단조로워지기 쉬운 화면에 변화를 주고 있다.


이 지장시왕도는 권속들의 크기를 앞쪽에서 뒤쪽으로 갈수록 작게 표현하고 지장보살 주위로 둥글게 열 지어 배치한 점, 본존상 무릎 아래쪽에 선악동자를 둔 점 등은 서울 흥천사(1867년 )․ 서울 개운사(1870년).서울 성북구 미타사(1873년).강화 정수사(1878년).화성 봉림사(1883년)․ 서울 성동구 미타사(1887년) 지장시왕도 등 19세기 후반 이후 서울.경기지역에서 유행한 형식이다. 특히 19~20세기 서울․경기 지역 불화를 주도해온 체훈의 화풍을 이해하는데 중요한 작품이다.


# 서울 봉국사 아미타괘불도


서울 봉국사 아미타괘불도는 서울특별시 성북구 봉국사에 있는 조선시대의 불화로, 2013년 12월 26일 서울특별시의 유형문화재 제351호로 지정됐다.


아미타불․관음보살.대세지보살의 아미타삼존을 화면에 가득 묘사하고, 그 아래 가섭존자.아난존자, 하단에 사자를 탄 문수동자와 코끼리를 탄 보현동자를 배치한 괘불도이다.


이와 같은 도상은 비로자나삼신불괘불도(1832, 흥천사 괘불도) 및 석가모니괘불도(1886, 봉은사 괘불도) 등과 동일한 도상을 공유하면서 상단 부분만 아미타삼존으로 바꾼 것이 특징이다.


오른손을 아래로 내리고 왼손은 엄지와 중지를 맞댄 아미타불을 본존으로 한 괘불도는 19세 기 말 20세기 초 서울․경기 지역에서 유행, 이러한 예로 1901년 서울 연화사 및 봉원사 괘불도, 1902년 고양 흥국사 괘불도(경기도 유형문화재 제189호)등이 있다.


봉국사 아미타괘불도, 12월 26일 서울특별시의 유형문화재 제351호로 지정됐다./사진-문화재청

화기의 "三角山 奉國寺"는 원래의 글씨를 지우고 덧쓴 흔적이 뚜렷해서 향후 정확한 출처를 확인할 필요가 있다.


이 괘불도는 서울, 경기도 일대에서 화명을 떨쳤던 수화승 金谷永煥, 漢峰瑲曄, 德月應崙, 明 應允鑑, 錦華機炯, 啓恩奉法, 義庵現照, 蓉潭奎祥, 亘照, 戒雄, 元益, 性蓮, 奉玉 등 14명의 화승이 제작했다.


괘불을 주도한 金谷永煥은 백련사 괘불도(1892년), 남양주 불암사 괘불도(1895)를 조성한 사례가 있고, 1902년에 봉국사 괘불도에서 새롭게 구성한 존상표현은 이후 1902년 연화사 괘불도와 봉원사 괘불도에 이어진다.


제작 화승 뿐 아니라 조성에 관여한 인물로 상궁 하씨, 공씨, 정씨, 이씨, 백씨를 비롯해 총 26인이 시주에 참여. 특히 상궁 5명은 괘불 제작을 주도한 것으로 여겨지는데, 상궁이 불화제작에 적극 참여한 것은 이 시기의 서울과 경기지역에서 나타나는 사회적인 양상 가운데 하나이다.


서울지역에서는 연대가 올라가는 괘불도에 속하며 형태, 필선, 채색, 문양, 장식 등 각 세부 묘사 등이 당시 불화와 비교하여 완성도가 높아, 19세기 말 서울지역에서 제작된 새로운 괘불도 형식의 선행적인 사례로 미술사적 가치를 지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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