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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궐이야기 43] 수원화성과 함께 빼놓을 수 없는 건축의 백미로 꼽히는 ‘수원화성행궁(1)’
  • 박광준 기자
  • 등록 2023-12-30 22:14:56
  • 수정 2024-04-15 17:37: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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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광준 기자] 사적 제478호 화성행궁은 1789년(정조 13년) 수원 신읍치 건설 후 팔달산 동쪽 기슭에 건립됐다.


행궁(行宮)은 왕이 지방에 거동할 때 임시로 머물거나 전란(戰亂), 휴양, 능원(陵園) 참배 등으로 지방에 별도의 궁궐을 마련해 임시 거처하는 곳을 말한다. 화성행궁은 왕이 지방의 능원 (陵園)에 참배할 때 머물던 행궁이었다.




567칸으로 정궁(正宮) 형태를 이루면서 국내 행궁 중 가장 큰 규모를 자랑하고 있는 '수원화성행궁'은 일제강점기 낙남현을 제외한 시설이 일제의 민족문화와 역사 말살 정책으로 사라졌다.


1980년대 말, 뜻있는 지역 시민들이 복원추진위원회를 구성해 꾸준하고 적극적인 복원운동을 펼친 결과 1996년 복원공사가 시작돼 마침내 482칸으로 1단계 복원이 완료돼 2003년 10월, 일반에게 공개됐다. 사적 제478호 화성행궁은 1789년(정조 13년) 수원 신읍치 건설 후 팔달산 동쪽 기슭에 건립됐다.




행궁(行宮)은 왕이 지방에 거동할 때 임시로 머물거나 전란(戰亂), 휴양, 능원(陵園) 참배 등으로 지방에 별도의 궁궐을 마련해 임시 거처하는 곳을 말하고, 화성행궁은 왕이 지방의 능원(陵園)에 참배할 때 머물던 행궁이었다. 화성행궁은 567칸으로 정궁(正宮) 형태를 이루며 국내 행궁 중 가장 큰 규모를 자랑한다.


정조는 1789년 10월, 아버지 사도세자의 무덤인 현륭원을 옮긴 이후 1800년(정조 24년) 1월까지 12년간 13차례에 걸쳐 수원행차를 거행했고, 이때마다 화성행궁에 머물렀다. 1795년에는 화성행궁 봉수당에서 어머니 혜경궁 홍씨의 환갑을 기념하는 진찬연을 여는 등 여러 가지 행사를 거행했다. 화성행궁은 평상시에는 화성유수부 유수가 집무하는 관청으로도 활용됐다. 그러나, 일제강점기 이후 갖가지 용도의 건물로 이용되면서, 그 모습을 잃게 됐다. 화성축성 200주년인 1996년부터 복원 공사를 시작해 2003년 일반인에게 공개했다.


신풍루(新豊樓)




신풍루는 화성 행궁의 정문으로 1790(정조 14)에 누문 6칸을 세우고 진남루 (鎭南樓)라고 하였다. 1795년 정조는 신풍루로 고치라고 명해 조윤형으로 하여금 다시 편액을 쓰게 했다.

'신풍'이란 이름은 일찍이 한나라 고조가 '풍 땅은 새로운 또 하나의 고향' 이라고 한 고사에서 유래한 것으로 정조에게 있어 화성은 고향과 같은 고장이라는 의미로 편액을 걸게 한 것이다.


좌익문(左翊門)좌익문은 중양문 앞에 있는데, '좌익은 곧 곁에서 돕는다'는 뜻으로 내삼문을 바로 앞에서 도(道)와 행궁을 지키는 중삼문(中三門)이다. 1790년 완성됐고 편액은 정동준이 정조의 명을 받들어 썼다. 남쪽 행각의 끝은 외정리소와 연결되어 있다. 


중양문(中陽門)‘양문은 궁궐 건축의 삼문 설치 형식에 따라 행궁의 정전인 봉수당을 바로 앞에서 가로막아 굳게 지키는 역할을 하는 내삼문(內三門)이다. 1790년(정조 14)에 완성됐고, 중앙의 정문과 좌우의 우협문, 좌협문으로 이루어져 있고 문 좌우로 긴 행각을 두어 출입을 통제 했다.


1795년 봉수당 진찬례 때 봉수당 앞으로는 정조와 혜경궁을 비롯한 왕실의 종친과 대신들이 자리했고, 중양문 밖으로 대문을 활짝 열어 승지와 사관, 각신이 반열을 이뤘던 바 있다.


봉수당(奉壽堂)/삼도-중양문을 지나 봉수당으로들어가는 길은 세 부분으로 나눠져 있는데, ㄴ얽고 약간 높고 가운데 길은 왕이 다니는 길을 의미하는 어도이고, 양 옆의 같은 길은 신하들이 다니는 길로 오른쪽은 문관, 왼쪽은 무관, 이 통행했다. 궁궐에서 어도는 국왕 이외에는  함부로 걸을 수가 없었다. 



봉수당의 뒷편

화성행궁의 정전 봉수당/ 봉수당은 임금 행차시 정전으로 쓰인 건물로, 중심 4칸을 왕권을 상징하는  편전공간으로 연출했다. 을묘원행시 이 곳은 혜경궁 홍씨의 진찬연이 열린 공간으로 이때 정조는 '만년의 수를 받들어 빈다'는 의미의 '봉수당'이라는 당호를 지어 조윤형으로 하여금 현판을 쓰게 하면서부터 이 건물을 봉수당 이라 불리게 됐다.  

봉수당에서의 진찬연/1795년 을묘원행시 진찬연 정면을 부분 연출한 공간으로 정조대왕이 어머니 혜경궁 홍씨에게 예를 드리고 있고, 여관들은 왕과 혜겅궁 홍시를 보좌하고 있다. 이날 진찬연에서 혜경궁 홍씨에게  12기의 소별미와 70가지의 음식 그리고 42개의 상화가 바쳐졌다. 

정조대왕의 처소/정조대왕이 화성행궁 행차시 신하를 접견하고 쉬던 장소를 연출한 공간이다. 원래는 유여택이신하를 접견하고 쉬던 장소였으나 관람의 편의를 위해 이곳 봉수당에 연출했다. 관람포인트:특히 주부자시의도 병풍은  당대의 최고 화원 김홍도가 정조시대 정조를 위해 주자의 시를 그림으로 그려 진상한 것으로 정조는 이를 극찬하여 항상 곁에 두고 보았다고 한다. 봉수당은 화성 행궁의 정전(正殿)건물이자 화성 유수부의 동헌 건물로 장남헌 (壯南軒)이라고도 한다. 1795년(정조 19) 정조는 혜경궁의 회갑연 진찬례를 이 건물에서 거행 했다. 이 때 정조는 혜경궁의 장수를 기원하면서 '만년(萬年)의 수(壽)를 받들어 빈다'는 뜻의 봉수당이라는 당호를 지어 조윤형으로 하여금 현판을 쓰게 했다. 이 건물은 원래 1789년(정조 13)8월 19일 상량하고 9월 25일 완공됐다. 일제 강점기에 파괴된 봉수당은 1997년 복원됐다.


유여택(維與宅)


공신루

앙부일구/보물 제845호로 직경 35.2cm, 높이 14cm인 앙부일구는 조선 세종 16년에 처음 만들어진 가마솥 모양의 해시계이다. 이것은 24절이를 13개의 위선 으로 나타내고 시각선은 수직으로 그어 놓았는데, 북극을 향한 영침의 그림자에 다라 시각과 계절을 알 수 있도록 되어 있다. 유여택은 평상시에 화성유수가 거처하다가 정조가 행차시에 잠시 머무르면서 신하를 접견하는 건물이었다. 유여택은 복내당 동쪽 행각과 외정리소 사이에 있다. 유여택이라는 이름은 '시경' 중에서 주나라 천명을 받아 나라를 크게 하고 집을 주었다는 데서 따온 것으로 정조의 입장에서는 화성 유수를 임명해 내려보내는 곳이라는 의미가 된다./다음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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