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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향교 23] 조선시대 최고 교육기관 ‘성균관(3)’
  • 이승준 기자
  • 등록 2024-01-04 09:44: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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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성균관의 부속건물(2)-대성전.동무와 서무.전사청.면륜당.동재와 서재.탕평비

[이승준 기자] ‘성균’이란 음악에서 ‘음을 고르게 조율하는 것’을 뜻하며, ‘주례’의 ‘대사악’에서는 ‘성균의 법을 관장하여 국가의 학정(學政)을 다스리고 나라의 자제들을 모아 교육한다’고 규정하고, 그리고 주소(각주)에서는 그 뜻에 대해 ‘성(成)이란 그 행동의 이지러진 것을 바르게 하는 것이고, 균(均)이란 습속의 치우침을 균형 있게 하는 것’이라고 풀이했다. 이번회에서는 성균관의 중심내용인 대성전과 명륜당과 부속건물과 탕평비에 대해 살펴보자. 


대성전대성전은 명륜당과 명확히 구분되어 있는데, 명륜당 앞뜰 은행나무 뒤편인 남쪽이 대성전 구역이다. 육중한 담을 경계로 확실히 표시하고 양옆으로 출입문이 나 있다. 



신문에서 대성전을 바라보면 다섯벌대의 높직한 기단 위에 정면 4칸, 측면 4칸의 다포계 겹처마 팔작건물이 있다. 양옆으로는 긴 지붕 아래에 열주가 정연히 늘어서 있는 동무(東廡)와 서무(西廡)가 서로 마주 보며 대성전을 시립하고 있다. 동무 한쪽에 묘정비와 느티나무가 있고 서무 가까이 소나무가 있다. 



대성전으로 오를 때 동서로 비켜나 있는 돌계단이 있다. 서쪽은 빈계(賓啓)로 신문에서 신도를 타고 들어온 성현들의 넋이 오르는 계단이고 동계는 조계로 향사 대 제관들이 오르는 계단이다. 그리 돌축대 좌우에는 측백나무가 대성전을 호위하고 있다. 



대성전은 태조 7년(1398)에 창간된 뒤 소실됐다가 선조 35년(1602)에 중건한 것으로 지붕의용마루, 내림마루, 귀마루는 흰 강회로 양성해 지붕선이 선명하다. 월대 또한 널찍하다. 건물의 측면 4칸 중 앞쪽 1칸을 툇간으로 개방해 향사 때 헌관들이 출입하는 동선을 편하게 했다. 


또한 단청도 매우 간결해, 아무런 무늬도 구사하지 않고 세 가지 색깔만으로 칠했다. 즉 기둥과 벽면은 붉게, 그 밖의 목조 부재들은 한결같이 흰빘 또는 녹색(뇌녹색)으로 칠했고, 공포(拱抱) 사이에 생겨난 작은 벽면인 포벽에만 황색을 올렸다. 


내면는 사면을 벽을 치고 앞면 벽에는 어간과 좌우 툇간에 여닫이 널 문을 달았다. 그 사이 협간에는 살창을 냈고 좌우 벽면과 뒷벽의 아랫부분은 전돌을 화방벽처럼 쌓아올렸다. 현판은 한석봉의 글씨로 규모도 크고 장중해 명륜당 현판의 조지번 글씨와 쌍벽을 이루는 명필이다.



‘조선왕조실록’을 보면 왕조 초기만 하더라도 성균관에는 현판이 달리지 않았었다. 세종 때 중국 사신이 와서 성균관에 알성하고서 액자가 없는 것을 지적해 안평대군이 ‘대성전’이라 써서 달았다. 그 후 단종 때 온 중국 사신이 대성전(大成殿)으로 고치는 것이 마땅하다고 해 단종 1년(1453)에 고쳐 달았다고 한다. 그 현판은 임진왜란 때 대성전과 함께 소실됐고 현재는 한석봉 글씨가 걸려 있다. 


지금 대성전 안에는 공자를 모시고 첫째 줄에는 4대 성인, 둘째 중에는 공문 10절과 송조 6현, 셋째 줄에는 동국 18현의 위패가 모셔져 있다. 


# 동무와 서무



대성전 앞뜰 좌우에 있는 동무와 서무는 측면은 1칸 반이지만 정면은 11칸으로 남북으로 긴 홑처마 맞배지붕 건물로, 무(蕪)는 처마가 긴 집을 말한다. 



동무와 서무는 태조 7년(1398)에 창선된 뒤 임진왜란 때 소실됐다가 선조 37년(1604)에 중건한 것으로 건물 내부는 칸막이 없이 길게 트여서 하나의 공간을 이루고 원래는 중국 94현과 동국 18현의 위패는 동서로 나누어 모셨으나 1949년 유림대회의 결정으로 동국 18현의 위패는 대성전에 올리고 중국의 94현의 위패는 땅에 묻어 안치했고 그후로 동무와 서무의 내부는 비어 있다. 


# 전사청



대성전 얼대 앞에는 측백나무 두 그루가 있다. 그중 오른쪽은 줄기가 5개로 뻗어 올라갔다. 그런가 하면 전사청(典祀廳) 대문 앞에 있는 잣나무는 세 줄기로 자랐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 두 나무를 삼강오륜에 빗대며 나무도 대성전 앞에서는 그렇게 예를 갖추어 자랐다고 신통해한다. 




전사청은 향사를 위한 공간으로, 서무의 북쪽 벽에 있는 돌담에 2개의 작은 문이 나 있다. 안으로 들어가면 문묘의 향사를 위한 건물들이 모여 있다. 향사 대 사용하는 제수를 준비하는 전사청, 문묘를 관리를 담당하는 남자 하인들이 거처하던 수복청(守僕廳), 향사에 사용되는 재물을 검사하고 손질하던 포주(庖廚), 제기를 보관하는 제기고(祭器庫) 등이 있다. 제기고의 굳게 닫힌 문짝 기둥에는 자금도 ‘대전고(大殿庫)’ ‘동무고(東蕪庫)’ ‘서무고(西廡庫)’라는 검은 나무관에 흰 글씨로 쓴 문패가 달려 있다. 


# 명륜당


명륜당으로 들어서면 넓은 마당에 자리 잡은 명륜당 건물로 동서로 길게 늘어선 동재와 서재, 그리고 은행나무 두 그루가 있다. 또 세벌대 돌축대 위에 있는 명륜당 건물의 본체는 정면 3칸, 측면 3칸에 맞배지붕이다. 





좌우에는 키를 낮춘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의 익사(翼舍)를 날개처럼 달고 있어 안정감도 있고 권위도 있다. 익사는 지붕 높이를 낮추었고 월대도 크기를 달리했고 따로 돌계단을 두었다. 기단은 화강암 장대석으로 높직하게 쌓아올렸다. 특히 강당채 앞에서 궁궐 건물에서나 볼 수 있는 월대가 널찍하다. 



명륜당 현판의 글씨는 임진왜란 뒤 성균관의 복원이 완료된 선조 39년(1606)에 명나라 사신으로 온 주지번(朱之蕃)으로 쓴 것이다. 엄청 큰 글씨체로 그 정중한 필체에서 학자의 풍이 느껴진다. 당시 ‘조선왕조실록’에 자세한 과정이 실려 있다. 명나라 황제가 특별한 사신으로 한림원(翰林院) 수찬(修撰)인 주지번을 보낸다고 알려오자 조정에서는 그에 관한 정보를 수집해 그의 글씨 실력이 뛰어남을 알게되었고, 이에 주지번이 의주에 도착했을 떼 이 글씨를 받아 그가 성균관에 알성 하기 전에 현판을 완성해 걸었다. 당시 명나라는 임진왜란 후 조선의 복구사업으로 성균관의 문묘의 복원뿐만 아니라 관양묘의 건립에도 지원금을 준 바 있다. 




명륜당 대청 위 벽체와 들보에는 수많은 현판이 걸려 있다. 그중 정중앙에는 주자의 글씨를 집자한 ‘명륜당’ 현판이 있고 그 위에 잔 글씨로 장문을 새긴 큰 현판은 정조대왕의 ‘태학 은배 시사’를 문신인 아만수(李晩秀)의 글씨로 썼다. 가장 근래에 걸린 현판은 공자의 77세손으로서 중국의 초대 개성지성선사(大成至聖先師) 봉사관(奉祀官)을 지낸 공덕성(公德成, 1920-2008)의 ‘박문약례(博文約禮)’이다. 


# 동재와 서재



명륜당 앞에는 학생들이 기거하는 기숙사인 동재(東齋)와 서재(西齋)가 좌우로 있다. 각각 정면 20칸으로 서로 마주보고 있고 두 칸마다 아궁이를 설치하고 온돌을 놓았고, 14개의 방이 있고 한 방에 평균 5명씩 거처했다. 측면은 3칸이지만 정면 1칸을 툇마루로 개방해 학생들이 유용하게 공간을 운영할 수 있도록 배려했다. 



명륜당의 동재와 서재는 등을 대고 동재는 동쪽, 서재는 서쪽으로 출입문이 나 있다. 명륜당에서 보았을 때 동재와 서재의 3번째, 8번째, 13번째 칸에는 출입을 위한 날문이 달려 있다. 생활공간이기 때문에 난방을 위해 불을 때던 아궁이가 방마다 설치되어 있으나, 불을 땔 때 연기가 빠져나갈 굴뚝이 보이지 않는다.   


# 탕평비



성균관을 답사하고 나가다보면 주차장 건너편에 하마비(下馬碑)가 있다. 하마비는 본래 성균관 일대 반촌 어귀에 세워져 있었으나, 현재 위치로 이전됐다. 비석 뒷면에는 중종 14년(1519년)에 세웠다는 간기가 쓰여 있고 앞면에는 ‘크건 작건 지나는 자는 모두 말에서 내리라’고 쓰여 있다. 궁궐.종묘.사적.왕릉 및 관아 입구에 세운 하마비 중 명확한 연대를 알려주는 아주 오래된 비석으로, 이 하마비 곁에는 본래 반수교(泮水橋)라는 다리가 있었다고 한다. 


영조 18년(1742)에 세운 이 탕평비에는 영조가 ‘논어, 위정편’에 나오는 친필을 풀어서 보면 ‘두루 아우르고 치우치지 않는 것은 군자의 공적인 마음이요. 치우치고 두루 아우르지 못하는 것은 곧 소인의 사사로운 생각이다’라는 글이 있다. 


‘탕평’이라 말은 ‘서경, 홍범편’에 실린 이상적인 정치를 피기 위한 9가지 규범 중 다섯 번째 에 ‘치우침이 없으면 왕도가 탕탕하고 평평하다’는 말이다. 



왕세자 시절부터 탕평의 폐해를 직접 경험한 영조는 즉위하자마자 영조 1년(1725) 붕당을 자생하는 자는 종신토록 금고해 국정에 참여시키지 않겠다고 강한 의지를 표명하면서 노론과 소론의 영수를 친히 불러 화합케 하고 각 과의 온건론자를 등용해 탕평책을 펼쳐나갔다. 청요직의 자리에 각 과의 인물을 균형 있게 등용해 서로 견제하게 하면서 당파에 따라 인물을 가리지 않고 능력에 따른 등용이 가능하게 됐다. 그래서 영조는 자신의 국정철학을 돌에 새겨 지성의 상징인 성균관 들머리에 세우게 한 것이다.<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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