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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유공자를 찾아 99] 몰락한 집안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부터 머슴살이...머슴 출신으로 의병장의 길 걸어간 '안규홍'
  • 이승준 기자
  • 등록 2024-01-04 08:28: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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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준 기자] 안규홍, 1879 ~1910, 독립장 (1963)


왜구를 죽여 그 새떼 같은 무리를 제거함으로써 우리나라의 근본을 보호하고 우리나라의 명맥을 길이 보존한다. - ‘담산실기(澹山實記)’, 안규홍 선생의 거병 목표와 활동 방향 중에서 -


# 몰락한 집안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부터 머슴살이...머슴 출신으로 의병장의 길 걸어가


안규홍(安圭洪, 1879.4.10 ~ 1910.6.22) 선생은 1879년 4월 10일 전라남도 보성군 보성읍 우산리 택촌에서 아버지 달환(達煥)과 어머니 정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죽산, 호는 담산(澹山), 이명으로는 계홍(桂洪) 등이 있다. 선생의 집안은 오래 전에 몰락했기 때문에 태어났을 당시의 경제력은 매우 궁핍한 상태였다. 특히 4살 때 부친이 세상을 떠나자 가난했던 어머니 정씨는 선생을 데리고 먼 친척 뻘 되는 박제현의 집에 의탁하였다. 여기서 성장하던 선생은 10여 세의 어린 나이에 머슴살이를 시작하였고, 이후 약 20여 년 동안 머슴 노릇을 하였다. 이 때문에 선생은 담살이라 불렸고, 의병부대도 ‘안담살이 의병’이라고들 했다. 이는 전남 지방의 방언으로 머슴을 담살이라 불렀기 때문이다. 담산이라는 호 또한 여기에서 유래된 것이다.


선생의 인물 됨됨이나 성품에 관한자료는 많이 남아 있지 않지만, 선생이 돌아가신 후에 선생의 의병 활동을 기록한 ‘담산실기(澹山實記)’에 의하면 매우 강직한 성품을 지닌 인물이었던 것 같다.


청년 시절 세금을 징수하는 관리가 동네에 와 횡포를 부리자 선생이 혼내주었다고 하는데, 바로 이러한 사실을 보면 선생이 얼마나 의협심이 강한 사람인가를 엿볼 수 있다. 선생이 나이가 어리고 체구가 작았음에도 불구하고, 의병장에 추대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이러한 강직한 성격과 용기 있는 행동 때문이었을 것이다.


# “우리도 나라를 구한다.” 빈농과 머슴들 모아서 관동 출신 의병들과 거병. 해산 군인 합세


물론 선생의 의병 봉기는 성품으로만 설명될 수 없다. 러일전쟁 이후 일제는 을사늑약과 광무황제의 퇴위, 그리고 군대해산 등을 강요함으로써 한국의 정치적 지배를 가속화하고 있었다. 경제적으로도 한국을 일본 상품의 판매 시장으로 만들어 가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토지 침탈과 수산자원 확보를 위해 일본 농어민의 대량 이주를 적극 추진하고 있었다. 선생은 이러한 국망의 현실을 매우 걱정하였다. 특히 일제의 토지 침탈과 일본인 농어민의 이주는 농촌에서 생활하던 선생에게 있어서는 피부에 와 닿는 침략의 실상이었다. 더구나 각지에서 진행되던 의병 전쟁은 선생이 거의를 결심하는데 자극제가 되었던 것이다. 1907년 군대해산을 전후하여 전라도 곳곳에서는 의병이 크게 일어나고 있었다. 이와 더불어 의병을 가장한 도적들의 등쌀 또한 적지 않았다. 이에 민간에서는 도적을 예방하기 위한 방도(防盜)조직을 운영하였는데, 그러한 것이 선생이 살던 법화 마을에도 있었다.


선생은 이 조직을 모체로 의병을 일으키려 하였다. 그러나 선생을 따르는 자가 대부분 머슴이나 가난한 농민들로서 무기라곤 낫이나 곡괭이, 나무작대기가 고작이었다. 이에 선생은 거사 계획을 양반 유생들에게 알려 경제적 도움을 청하였지만, 그들은 선생과 함께 거의하는 것을 수치로 생각하여 거절하였다. 그러자 선생은 가난한 농민들과 머슴들을 데리고 관동 출신 의병장 강용언(姜龍彦) 의병부대에 투신하여 부장(副將)이 되었다.


강용언은 강원도에서 활동을 하다가 일본군의 탄압을 피해 1907년 말쯤 전라도 순천으로 옮겨 와 의병투쟁을 계속하고 있었다. 강용언이 선생을 부장에 임명한 것은 지리에 어두운 그들 의병부대의 약점을 선생을 비롯한 토착 의병들이 보완해 주고, 또 활동 지역 농민들과 관계 유지에도 큰 도움이 되리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강용언 의병부대는 선생이 듣던 바와는 달리 주민들에게 피해를 입히고 있었다. 이에 선생은 1908년 4월 강용언이 주민들의 재물을 탈취한 것을 계기로 토착 의병들과 함께 그를 제거하고 의병장이 되었다.


안규홍 선생이 사용했던 나침반

하지만 선생의 의병부대가 독자적으로 활동하기에는 아직 많은 장애물이 있었다. 무엇보다도 의병 모집과 전투경험이 풍부하고 전술에 뛰어난 전략가가 필요하였다. 이에 선생은 주변 시장을 순회하면서 농민을 적극 설득하여 의병에 가담시켰다. 이러한 방법은 양반 유생들이 학연이나 지연을 중심으로 의병을 모집했던 방법과는 대조를 이루는 것이다. 그리하여 선생의 의병부대에는 새로운 사람들이 합류해 왔다.


해산 군인이었던 오주일 등이 가담한 것이 그것이다. ‘담산실기’에 병법에 밝은 서울의 오주일이란 자가 소년 수십 명을 데리고 보성에 왔다가 선생을 만나, “일을 하자면 반드시 맹주가 있어야 한다고 하고서 의병부대에 합류했다.”는 기록이 보인다. 해산 군인 출신인 오주일은 특히 병법에 밝은 전략가로서 선생의 의병부대에 큰 도움이 되었다. 마침내 선생의 의병부대는 보성 출신의 머슴과 소작농을 근간으로 하는 토착 농민, 시장을 순회하면서 확보한 인근 지방의 농어민, 그리고 관동 의병과 해산 군인 등으로 조직이 확대 개편된 것이다.


이러한 조직의 확대는 의병부대의 항일 투쟁에 매우 유리한 조건이 되었다. 토착 농어민 출신 의병은 지리에 밝고 지역 주민과 밀접한 연고를 맺고 있었으며, 관동 의병은 전투 경험이 풍부하였고, 해산 군인이었던 오주일 등은 전략 전술의 이론과 실제를 두루 갖추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를 계기로 선생은 염재보를 부장, 이관회를 선봉장, 임병국·손덕호·정기찬·장재모·송경회를 좌우익장, 안택환·소휘천을 한후장(捍後將), 오주일·나창운을 참모장, 임정현을 서기, 그리고 박제현을 운량관으로 삼아 조직을 정비하였다. 그리고 1908년 4월 보성군 소재의 동소산에서 의병부대의 기치를 들었던 것이다.


# “탐관오리의 주구(誅求)를 금한다. 친일 무리를 먼저 없앤다. 왜구를 무찔러 나라를 보존한다.”


이때 결정한 거병 목적과 활동 방향은 ‘담산실기’에 잘 나타나 있다. ‘담산실기’를 보면, “이들은 본래 농민들로서 비록 상하의 지시나 도움을 받은 바 없지만 원수를 갚고 애국 구민하기 위해 죽음을 무릅쓰고 거병하였다.”고 밝히고 있다. 즉 다음과 같은 활동 목표와 방향을 제시하였다.


1. 의병으로서 민간을 침폭하는 것을 금한다.

2. 민간인이 밖으로 곡식을 파는 행위를 금지시킨다.

3. 여러 명목으로 파견된 관원이 민간에 해를 끼치면 모두 잡아들인다.

4. 마을에서 공공연히 주구(誅求)를 행하는 자를 금지시킨다.

5. 일본 세력을 끌어들이는 자부터 먼저 죽여 우익(羽翼)을 없앤다.

6. 왜구를 죽여 그 새떼 같은 무리를 제거함으로써 우리나라의 근본을 보호하고 우리나라의 명맥을 길이 보존한다.


안규홍 선생이 사용했던 유건(儒巾)이러한 선생 의병부대의 활동 방향은 크게 세 가지로 정리될 수 있다. 첫째 탐학한 관리의 근절, 둘째 친일 세력의 제거, 셋째 일본세력 구축 등이 그것이다. 즉 선생 의병부대는 탐관오리의 가렴주구와 친일세력의 활동 역시 일본세력의 침투와 마찬가지로 국가의 근본을 위태롭게 한다고 판단하고 있었던 것이다. 선생 의병부대의 이러한 활동 방향은 당시 주민들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았다. 그것은 강용언 의병부대와는 달리 민폐를 끼치지 않도록 군기를 엄히 하여 주민들에 대한 침탈행위를 금지시켰던 때문이었다.


하지만 토착 농민이 중심이 된 선생 의병부대의 애국 구민 활동 중 가장 큰 고충은 활동자금의 확보 문제였다. 우선 선생 의병부대는 운량관이던 지주 박제현과 같은 숨은 후원자들의 도움을 받았으며, 세금 징수원들을 공격하여 빼앗은 공금을 군자금으로 사용하기도 했다. 또한 횡포한 지주의 소작료나 재산의 일부를 징발하여 사용하기도 하고, 농민들의 자발적인 지원을 받았다. 그러나 이것만으로는 부족하여 활동 지역내의 각 면장들에게 일정액의 군자금을 할당하여 징수하기도 하였다. 즉 선생의 의병부대는 후원자의 협조를 비롯하여 세금탈취, 농민의 자발적인 도움, 그리고 각 면장으로부터 거둬들인 군자금 등을 재원으로 삼아 항일투쟁을 전개하였던 것이다.


# 엄한 군기, 농민 대중의 지지, 군자금 확보 바탕으로 1년 6개월간 일본군과 수십 차례 격전


이렇게 확보한 재정적 기반을 바탕으로 선생 의병부대는 다음과 같은 활동을 펼쳤다. 첫째, 가렴주구를 일삼는 관리와 탐학한 토호의 제거에 앞장섰다. 특히 농어민에게 많은 피해를 주던 세금 징수원에 대한 공격은 농민들의 큰 환영을 받았다. 이들 관리들에 대한 공격뿐만 아니라 탐학한 토호의 소작료를 빼앗아 그 일부를 농민에게 나누어주는 데도 앞장섰다. 이러한 활동으로 선생 의병부대는 농민대중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았을 뿐만 아니라 의병활동에 부족한 재원을 보충하는 데에도 적지 않은 보탬이 되었다.


둘째, 친일세력의 제거에 진력하였다. 주된 공격 대상은 일진회원이었다. 이는 이들이 정찰대를 조직하여 의병 토벌대에 참가하고, 일본 헌병대의 앞잡이가 되어 의병의 동향을 밀고하거나 양민들의 재물을 함부로 빼앗는 등 친일 매국 활동의 선봉 노릇을 하였기 때문이었다.


셋째, 가장 궁극적인 목표는 일본 세력의 구축활동이었다. 선생의 의병부대는 1908년 4월 거의 직후부터 1909년 10월까지 약 1년 6개월 동안 수십 차례의 항일투쟁을 전개하였다. 구체적인 공격 대상은 일본군 헌병대·수비대·순사대·토벌대 등이었는데, 일본에서 이주해 온 농어민들도 포함되어 있었다. 이들도 한국 침략의 첨병으로 간주되었기 때문이었다.


선생 의병부대의 활동 무대는 보성·순천을 중심으로 하는 전라남도 중동부 지역이다. 그 중에서도 보성이 중심 무대였다. 최초로 의병을 일으킨 동소산, 일본군의 기습을 받아 크게 패했던 서봉산, 그리고 재기했던 석호산이 모두 보성에 위치한 사실을 보아도 알 수 있다. 보성의 근거지가 일본군측에 노출되자 나중에는 광양의 백운산으로 근거지를 옮기기도 했다.


담산실기# 노획한 일본군 대포, 보병총 등 만만찮은 화력으로 전남에서 일제에 큰 타격을 가해


의병부대의 무기로는 거병 초기에는 자체 제작한 군도나 창 혹은 화승총이 전부였다. 그러나 항일투쟁이 거듭되는 과정에서 구입하거나 일본군으로부터 노획한 대포나 30년식 보병총과 양식총, 그리고 화승총을 개조한 천보총 등을 보유하게 되었다. 새로운 신무기의 확보는 선생 의병부대의 화력이 결코 만만치 않음을 보여준다. 이같은 화력, 지리와 지형지물에 익숙한 이점을 살린 전술의 운용, 엄격한 군기 등으로 선생의 의병부대는 일제에게 큰 타격을 가하였다.


일제도 다양한 작전을 구사하면서 선생의 의병부대를 탄압하여 갔다. 이를테면 의병 진무책과 전담 토벌대 조직, 그리고 변장정찰대 운용 등이 그것이다. 의병 진무책으로 실시된 대규모 토목공사의 실시는 주민들의 외면으로 거의 효과를 거두지 못하였다. 이에 일제는 1909년 4월 선생의 의병부대를 진압할 목적으로 광주와 남원의 일본군 2개 수비대대를 차출하여 이른바 토벌작전을 개시하였다. 이러한 일본군의 토벌작전은 실패로 돌아갔지만, 이같은 의병 탄압책은 전남지역 의병부대에게 심각한 위기의식을 불러일으켰다.


# 의병 간 합동으로 일본군 격파했으나…일제, 육해군 대규모로 동원해 ‘남한대토벌작전’ 전개


그 결과 1909년 음력 3월에는 유생 의병장 전해산·심남일 부대와 머슴출신인 선생의 부대를 중심으로 전남 의병 연합부대를 구성하고, 나주 남평 거성동과 영산강 일대에서 합동 작전을 전개하였다. 그리하여 일본군 수십명을 살상하고, 일본 화물선을 소각하는 전과를 거두기도 하였다. 그러자 일본측은 1909년 6월에 이르러 주요 의병부대의 소재와 근거지를 파악하기 위한 변장정찰대를 편성하였다. 변장정찰대의 편성은 당시 가장 우세한 의병장인 선생을 비롯하여 전해산·심남일 등의 근거지를 찾는데 주된 목적이 있었다. 변장정찰대의 활동으로 주요 의병의 근거지가 어느 정도 파악되자 일제는 전남 의병운동에 대한 대대적인 탄압 계획을 수립하였다. 이것이 바로 '남한대토벌작전'이었다. 이 작전에는 보병 2개 연대, 공병 1개 소대, 기선 1척, 기정 약간, 그리고 해군 11함대 등 대규모의 병력이 한꺼번에 투입되었다. 그리하여 육지는 물론 해상에 이르기까지 완벽한 포위선을 구축하여 ‘토끼 몰이식’으로 전남 의병을 탄압하기 시작하였던 것이었다.


# “밖으로는 개미만큼의 후원도 없고. 안으로는 범이 잡아 먹으려고드니…”


1909년 9월 1일부터 10월말까지 전개된 이 작전으로 일본군의 거미줄 같은 포위망이 시시각각으로 압축되자, 그동안 적극적인 반일투쟁을 전개해 왔던 선생의 의병부대도 동요하였다. 결국 9월 18 ~ 19일 사이에 약 60여 명의 부하 의병들이 투항하자, 선생도 다음과 같이 해산명령을 내리지 않을 수 없었다.


본래 의병을 일으킨 것은 국가를 위하고 민생을 보호하기 위한 것인데, 천운이 일정하지 못하고 적의 세력이 이와 같으니 적은 숫자로 많은 수를 당해낼 수 없는 것은 또한 이치로서도 그러하다. 밖으로는 개미만큼의 후원도 없고, 안으로는 범이 잡아먹으려는 위급한 지경에 있다. 게다가 선량한 백성에게 해독이 미치고 있으니 나의 죄가 참으로 크다고 하겠다. 여러분들은 각자 잘 계획하여 다시 후일의 거사를 도모하라.


이와 같이 후일을 기약하면서 의병을 해산하고 고향으로 돌아가던 중, 선생은 9월 25일 부장 염재보·정기찬 등과 함께 보성 법화촌에서 일본군에 체포되었다. 선생은 광주 감옥에 수감되었다가 대구 감옥으로 옮겨졌다. 선생은 이곳에서 1910년 6월 22일 교수형을 받고 형장의 이슬로 순국하셨다.


정부에서는 선생의 공훈을 기리어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사진출처-국가보훈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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