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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유공자를 찾아서 106] 강연활동으로 민족의식 고취 힘쓴 '이필주'
  • 이승준 기자
  • 등록 2024-03-03 18:58: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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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준 기자] 이필주, 1869 ~1932, 대통령장 (1962)


조선은 독립국이다. 조선인은 자주민이란 것을 생각하고, 어디까지나 그 의사를 발표하려고 한 것이다. 우리들의 힘이 있는 한 조선의 독립에 다 함께 노력하자. - 선생의 신문조서 중에서(1919. 8. 26) -


# 13세의 어린 나이에 생업 전선에 뛰어들다


이필주(李弼柱, 1869.12.22 ~ 1942. 4. 21) 선생은 1869년서울 정동에서 출생하였다. 부친은 한학을 한 선비로 알려져 있으나 선생이 태어날 당시 집안은 이미 퇴락하였으며 생활 또한 매우 빈곤하였다. 선생은 8세부터 한문 글방에 들어가 5년 동안 한문을 공부했지만 집안 사정으로 학업을 계속할 수 없었다. 13세의 어린 나이에 생업 전선에 뛰어든 선생은 제사(製絲)일을 배워 가사를 도와야 했다. 그러던 중 18세 되던 해 부친이 별세하고 자신도 흑사병에 걸려 사경을 헤매는 수난을 겪어야 했다. 이때부터 선생은 가장으로서 헤어날 수 없는 생활고에 시달려야 했다. 그러다 1890년 봄, 친구의 권유로 구한국 군대에 사병으로 입대하게 되었는데, 군입대는 선생에게 그나마 활로가 되었다. 졸병이나마 매월 받는 월급으로 최소한의 생활을 유지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구한국 군대 사병으로 근무하던 중, 선생은 1894년 동학농민전쟁이 일어나자 농민군 진압에 동원되어 전라도 전주, 완산 접전에 참가하였다.


# 두 자녀를 잃고 신앙 생활을 시작


훗날 회고에서 밝혔듯이, 선생은 ‘골육이 서로 싸우는 난리’에서 괴로움을 떨치지 못하였다. 그 같은 괴로움은 끝내 군대를 박차고 나오는 원인이 되기도 했지만, 군대 시절 선생은 군규(軍規)를 잘 지키고 기예운동에도 남달리 노력하여 시험 때마다 승급할 수 있었다. 그리하여 말단 사병에서 하사관급의 참교(지금의 분대장)로 승진하였고, 얼마 안 있어 시위대가 설립될 때, 선생은 다시 부교(副校)로 승진하면서 하급지휘관이 되었다. 이와 함께 선생은 1897년 29세 되던 해 김해 김씨 인숙(仁淑) 여사와 결혼하여, 이후 5년여 동안은 군대 생활에 만족하며 자식 남매를 낳아 단란한 가정을 꾸릴 수 있었다.


구한국 군대 사진그러나 1902년 전염병으로 뜻하지 않게 두 자녀를 잃게 되자, 선생은 한없는 회의와 좌절을 맛보게 되고, 결국 기독교 귀의를 통해 새로운 삶을 모색하게 된다. 그 해 봄 상동교회에 다니기 시작한 선생은 처음 1년 동안은 별다른 감화 없이 기독교의 목적이 ‘하나님을 섬기며 사람을 사랑한다’하니 옳은 도(道)라 여기고 다니는 정도였다. 상동교회는 감리교 의료 선교사인 스크랜턴(W. B. Scranton)에 의해 1889년 가을 서울 남대문 근처에 달성교회로 세워졌다가, 1900년 7월 중구 남창동으로 옮기면서 이름도 바꾼 것이었다. 대부분 중류층 이하의 가난한 사람들이 다니던 교회였지만, 전덕기 목사와의 만남은 선생의 인생에서 획기적 전환을 가져다 주었다. 당시 전도사인 전덕기는 선생보다 7세 연하였지만, 신앙과 인생에서 가장 큰 스승이었다. 숯장사를 하던 전덕기는 1892년 스크랜턴의 인도로 교인이 되어, 1896년 세례를 받고 상동교회의 정식 교인이 되었으며, 1902년 전도사 안수를 받고 1903년부터 상동교회의 담임자가 되어 있었다.


전덕기를 통해 신앙의 힘을 기르던 선생은 ‘자신의 죄’를 깨닫고, 이후 주색을 완전히 끊어 버리고 기도와 세례문답 공부에 힘을 쏟아 1903년 4월 부활주일에 스크랜튼 목사로부터 세례를 받았다. 이 무렵 선생은 군대생활을 계속하고 있었는데, 몇 번의 영적 경험을 체험하면서 군대생활에 회의를 느끼고 1903년 가을에 홀연히 군대를 그만두었다. 유일한 생계수단이던 군대생활을 그만두니 생활대책이 막막한 상황이었지만, 선생은 ‘옳은 일을 행하면 된다’는 신념으로 가득 차 있었다. 남다른 열성과 돈독한 신앙심이 인정을 받게 되어 선생은 1903년 겨울 상동교회에서 교회당 청소일을 맡게 되었다. 이 무렵 선생은 청소일 뿐 아니라, 스크랜턴과 전덕기로부터 열심히 성경을 배웠으며, 사경회(査經會)에 빠짐없이 출석하면서 신앙생활에 열의를 다했다.


전덕기 목사와(왼쪽) 상동교회 사진(오른쪽)# 상동청년학원에서 체육 교사로 활동


1904년 1월 선생은 속장의 성직을 받았으며, 1904년 봄부터 스크랜튼 목사의 어머니가 설립한 공옥학교(攻玉學校)의 체육교사로 근무하기 시작하였다. 선생의 신앙생활은 더욱 신실해져 1904년 여름 권사의 직분을 받게 되었고, 교회 일에 누구보다 열성이었다. 학교에서 체육을 가르치는 한편 목사와 같이 심방도 다니고 속회 회우를 심방하는 등 전도생활에 충실하였다. 이 무렵 상동교회는 초등교육기관인 공옥학교에 이어 중등교육기관을 세우기 위해 노력하였다. 미국의 교포 청년 강천명이 기부금을 교육사업에 써달라고 부탁하면서 시작된 상동청년학원의 건학운동은 회원과 뜻 있는 유지들로 확대되어 700원의 기금을 모았으나, 학교를 짓기에는 부족하였다. 그러한 상황에서 1904년 10월 미국에서 돌아온 스크랜턴이 상동교회 내의 집 한 채를 기증하고, 스크랜턴 대부인과 헐버트가 각각 영어와 역사 과목을 자청하여 맡기로 하여 상동청년학원 개설 문제가 해결될 수 있었다.


1904년 10월 15일 개교한 상동청년학원의 교장에는 이승만, 부교장에는 박승규가 임명되었다. 상동청년학원이란 상동청년회에서 청년들을 가르쳐 인재를 배양한다는 뜻에서 붙여진 이름이었다. 상동청년학원에는 기라성 같은 교사들이 포진하였다. 우선 성경을 필수 과목으로 정하여 전덕기가 직접 가르쳤으며, 주시경은 국어를 담당하며 한글보급운동을 전개했다. 또 장도빈과 최남선 등이 국사를 맡았으며, 남궁억과 현순이 영어와 영문법을, 조성환이 한문을 가르쳤다. 그리고 신체 및 정신 단련을 목표한 체육은 공옥학교의 체육을 맡았던 선생이 가르쳤다. 군인시절 강건한 체력을 연마했던 선생은 체육 시간에 도수 체조 및 구기운동을 가르치는 한편 군사훈련도 겸하였다.


# 신민회에서 활동


선생의 활동에서 주목할 것은 신민회 활동이다. 1907년 안창호가 국내에 들어와 조직된 신민회는 양기탁, 전덕기, 이동녕, 안창호, 이동휘, 이갑, 유동열 등을 중심으로 조직된 비밀결사였다. 신민회는 총감독에 양기탁, 총서기에 이동녕, 재무에 전덕기, 집행원에 안창호 등을 임원으로 정하고, 대한매일신보와 상동청년회 계열의 인사들, 무관 출신과 서북 지역 인사들이 참가하고 있었다. 회원의 규모는 대략 3,4백 명에 달했다. 이 같은 신민회는 몇 개의 집단으로 구성되었고, 그 중 상동청년학원은 중심 세력으로 역할하면서 전덕기와 이회영 등이 참여하고 있었다. 전덕기는 상동청년회를 중심으로 신민회의 재무를 맡았고, 상동교회의 삼총사라 불리는 선생을 비롯한 최성모, 김진호 등이 전덕기를 도왔다. 이때 선생은 주로 상동청년학원을 주축으로 하는 활동 임무를 맡았던 것으로 보인다. 1907년 가을 이후 평양의 대성학교나 정주의 오산학교가 신민회의 교육기관이 되었듯이 상동청년학원도 신민회의 교육기관이 되었던 것이다. 선생을 비롯하여 상동교회의 삼총사들은 모두 전덕기 목사의 감화를 받아 교회에 입교하여 후일 목사가 된 사람들이었다. 최진사 양반으로 불렸던 최성모는 훗날 선생과 함께 33인 민족대표로 서명했고, 김진호는 3.1운동 때 배재학당에서 학생들의 동원책임을 맡기도 했다.


이필주 목사비

그러나 1910년 경술국치 직후 신민회가 발각되어 주요 인사들이 대거 피체되는 상황에서 일제의 검거망을 피한 선생은 40이 넘은 나이에 목회자의 길을 가기 위해 1911년 경 협성신학교에 입학하게 되었다. 졸업 후 선생은 1913년 새로 개척한 왕십리교회의 전도사 자격으로 파송되었으며 1918년에는 정동교회의 담임자로 발령받았다.


# 민족대표 33인 중 기독교 감리회 대표로 참가


이즈음 국제정세는 커다란 변화를 맞이하고 있었다. 1차 세계대전이 종결되면서 국제사회는 개조의 분위기가 고조되어 갔다. 전쟁의 참화로부터 인도와 정의를 부르짖는 인도주의가 부상하며, 핀란드와 폴란드가 독립을 선언하고 약소국의 독립문제가 크게 일고 있었다. 이때 한국 독립운동계에서도 독립선언을 위한 노력이 국내외에서 물결치고 있었다. 중국 상해를 무대로 활동하던 신한청년당은 이 같은 국제정세의 흐름을 독립 달성의 절호의 기회로 포착하고 김규식을 파리강화회의에 파견하는 한편, 새로운 시대가 도래하고 있음을 국내외 민족사회에 알리고 국내외 동포가 호응하는 전민족적 독립운동을 구상해 갔다. 즉 3.1운동이 태동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 가운데 1919년 1월 21일 마지막 군주인 광무황제가 갑자기 붕어하자, 그러한 움직임은 급속한 속도로 확산되어 갔다. 평소 건강이 좋았던 광무황제가 1월 21일 밤 갑자기 붕어했다는 발표를 그대로 믿는 사람은 없었다. 광무황제의 독살설은 잠자는 민중을 일깨우는 각성제가 되었다. 광무황제의 붕어 소식은 망국의 한을 터뜨리는 도화선이 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일본 동경에서 거행된 2.8독립선언은 3.1운동의 기폭제가 되었다. 독립운동 계획은 1919년 1월 하순 동경에서 송계백이 건너와 동경에서 진행되는 사정을 전하면서 천도교측에서 먼저 추진되었다. 그리고 학생단에서도 1월 27일 관수동의 중국음식점 대관원(大觀園) 모임을 통하여 태동하였다. 이 모임은 중앙YMCA 학생부 간사 박희도가 회원모집을 명목으로 학생YMCA의 지도자로 신망을 얻고 있던 경성의전의 한위건과 연희전문 김원벽을 통해 주선한 자리로, 보성법률상업학교의 강기덕과 주익, 전수학교의 윤자영 등도 참석하였다. 이때 학생단은 세브란스의 이갑성과 YMCA의 박희도를 중심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이들은 당초에는 학생측만으로 독립운동을 추진할 계획이었다. 그러한 상황에서 천도교측과 기독교측의 합작이 2월초부터 제기되어 21일을 기점으로 본격화하자 학생단은 종교계 기성인사들의 계획에 합류하기로 결정하였다.


선생의 묘소이렇듯 천도교, 기독교, 학생측의 개별적 독립운동 추진계획이 통합 일원화되는 상황에서 불교측도 가담하면서 민족대연합전선을 이루어 구체적으로 추진되어 갔다. 2월 26일 최남선에게 위촉한 선언서의 초고가 완료되자, 26일과 27일 양일간에 걸쳐 기독교계 인사들이 선생의 집에서 모여 ‘민족대표’에 추대할 인물을 선정했다. 독립선언서에 서명할 민족대표의 인선은 천도교 15인, 기독교 16인, 불교 2인 등 33인으로 구성하였다. 이때 선생은 기독교 감리회 대표로 33인에 참가하였다. 선생이 감리회의 대표로 추대되었던 것에는 감리회 교회의 대표격인 정동교회의 담임목사였다는 점과 전덕기 이후 사실상 감리회를 대표하는 지도적 위치에 있었던 점 등이 작용한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 종교 이념을 뛰어 넘어 독립선언식 거행


신문조서에 따르면 선생이 2월 24, 5일경 최성모의 연락을 받고서 3.1운동의 계획을 알고, 또 그때서야 33인의 서명에 찬동한 것처럼 되어 있으나, 이는 전후 상황을 살필 때 사실과 전혀 다른 것이었다. 겉으로 드러나지는 않지만, 선생은 박희도의 지도아래 1월 하순부터 추진되던 기독교청년회를 중심으로 한 학생단의 독립운동 계획에 관여하고 있었다. 그러한 사실은 기독교청년회와 밀접한 관계를 이루던 선생의 처지와 또한 정동교회 내 선생의 집이 학생단의 회의 장소가 되고 있었던 점 등을 통해서도 충분히 파악될 수 있는 것이다.


거사가 임박해지면서 선생의 집은 연일 학생단의 회의 장소로 사용되었다. 이때 학생단은 3월 1일 이후에도 연속적으로 만세시위를 전개한다는 계획을 세우고 구체적 방도를 모색해 갔다. 그리고 이를 통해서 선생이 단순히 33인에 참가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3.1운동의 확산을 위해 학생단을 지도해 갔던 점도 파악된다. 즉, 3월 1일 독립선언 이후 자신은 감옥에 가더라도 이후 전개될 독립운동의 구도를 준비해 놓고 있었던 것이다. 단편적 사실이기는 하지만, 훗날 신채호의 아내가 되는 박자혜 여사가 이 무렵 선생과 연결되어 조선총독부 부속병원 조산원으로 구성된 간우회 회원을 규합하여 만세시위를 계획해 갔던 사실은 그와 같은 사실을 예증해 주고 있다.


이필주 판결문2월 28일 손병희 집에서 마지막 모임을 갖은 ‘민족대표’들은 3월 1일 오후 2시 탑동공원에서 독립을 선언키로 했던 계획을 변경하여 같은 시각 태화관에서 거행키로 했다. 독립선언식장을 갑자기 음식점으로 바꾼 것은 탑동공원에는 젊은 학생들이 모이게 되어 있어 혹시 불상사가 생겨 행여 큰 일을 그르칠까 염려한 때문이었다. 그리하여 거사일인 3월 1일 오후 2시 태화관에는 길선주, 김병조, 정춘수, 유여대 등 4인을 제외한 29인의 대표자가 모여 역사적인 독립선언식을 거행할 수 있었다.


독립선언식의 거행 장소가 하루 전날 급작히 태화관으로 바뀐 것을 놓고 비판적 시각이 있는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3.1운동의 계획단계에서 천도교와 기독교, 불교계 인사들이 서로의 종교 이념을 초월하여 독립운동의 광장에서 합류하여 만세운동을 추진해 갔던 사실은 독립운동사에서 특별한 의미를 지니는 것이었다. 그것은 종교 이념을 뛰어 넘은 상태에서 민족독립의 이념과 의지가 관철되었던 한국 독립운동의 특징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이었다.


# 강연활동으로 민족의식 고취에 힘 쏟다


선언식 거행 직후 일제에 피체된 선생은 1920년 10월 30일 결심공판에서 징역 2년을 받아 옥고를 치르다가 1921년 11월 4일 공덕동 경성감옥에서 출옥했다. 출옥 후 선생은 목회활동에 전념했다. 표면으로 독립운동을 전개하지는 않았어도, 민족적 지조와 절개를 잃지 않았다. 1922년 9월 장로목사 안수를 받은 선생은 정동교회에서 개회된 연회에서 정식으로 감리교 정회원이 되었다. 그러나 한 교회에 머물지 않고, 주로 전도회, 부흥회 등을 통하여 활발한 강연활동을 전개했다. 선생의 강연에는 구름 같이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선생은 기독교 신앙의 전파 못지 않게 민족의식 고취에도 힘을 쏟았다. 1930년대 초반 선생이 재직하던 창천교회에는 연희전문학교 학생속회가 있었는데, 그들은 선생을 통해 많은 민족적 감화를 받았다고 전해지고 있다.


1934년 65세 나이로 중부연회에서 은퇴한 선생은 수원의 남양교회를 중심으로 활동하다가, 1942년 4월 21일 신사참배와 태평양전쟁으로 기독교와 민족의 시련이 극심할 때 영면하였다.


정부에서는 선생의 공훈을 기리어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다./사진-국가보훈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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