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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궐이야기 46] 수원화성과 함께 빼놓을 수 없는 것이 건축의 백미로 꼽히는 ‘수원화성행궁(3)’
  • 박광준 기자
  • 등록 2024-01-18 08:05:16
  • 수정 2024-04-15 17:4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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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광준 기자] 사적 제478호 화성행궁은 1789년(정조 13년) 수원 신읍치 건설 후 팔달산 동쪽 기슭에 건립됐다.


# 북군영(北軍營)



조선 정조 18년(1794) 화성행궁을 증축하면서 정문인 신풍루 좌우에 군영을 지었는데 남쪽은 남군영, 북쪽은 북군영이라고 부른다. '화성성역의궤'에는 두 군영의 건물이 동일하다고 기록돼 있으나 '행궁전도' 그림을 보면 남군영은 일자형이고, 북군영은 ㄷ 자형이다. 반면 '정리의궤'의 '행궁전도'에는 북군영이 ㄱ 자형으로 그려져 있다. 이에 2002년 복원 시의 발굴 조사 결과를 바탕으로 북군영을 ㄱ 자형으로 복원했다.


 # 남군영(南軍營)





화성행궁의 정문인 신풍루 좌우에 남군영과 북군영 건물을 짓고 약 100명의 군사가 교대로 행궁을 지켰다. 남군영은 국왕 친위 부대인 장용영 외영 군사들이 주둔하는 건물이다. 장용영 군사는 왕이 화성에 내려올 때는 물론 평소에도 화성을 보호하는 역할을 했다. 봄, 가을로 두 번 시험을 치러서 수석을 차지한 군사에게는 곧바로 관직을 높여 주는 등 특별한 혜택을 주었다. 장용영 외영(壯勇營外營)은 정조의 친위군사조직 중 화성을 지키는 부대를 말한다. 


 # 서리청(書吏廳)




서리청은 화성유수부 관청의 여러 사무를 담당하는 하급 관리들이 근무하는 건물이다. 조선 정조 13년(1789) 수원읍을 옮길 당시에는 장남헌 동쪽에 서리청을 지었다. 화성 축성이 마무리되면서 서리청의 건물을 비장청으로 사용하고, 그 동쪽에 있던 금도청을 고쳐서 서리청으로 사용했다. 행궁 안의 건물들이 보통 10칸 내외 규모인데 비해 서리청은 22칸에 달한다. 서리청 마당 건너 남쪽에는 문서창고가 있다. 금도청(禁盜廳)은 도적이나 법을 어긴 자들을 잡는 군사들이 머무는 건물이다. 


 # 비장청(婢將廳)



비장청은 고을 수령을 보좌하는 비장들이 근무하는 건물로, 화성 유수는 정2품 당상관이었기 때문에 여러 명의 비장을 두었다. 조선 정조 19년(1795)에 혜경궁 홍씨의 회갑연을 치를 때 비장은 음식을 차리는 일을 비롯해서 행사의 모든 절차를 담당했다. 비장청은 유수를 보좌하는 업무 성격에 맞게 고을 수령이 공무를 처리하는 건물인 동헌(봉수당) 가까이에 두었다. 화성 축성이 마무리되던 1796년에 서리청의 건물을 수리해서 비장청으로 사용했다.


 # 미로한정(未老閒亭)




미로한정은 화성행궁 후원에 세운 소박한 정자로, 조선 정조 13년(1789) 수원읍을 팔달산 아래로 이전한 이후에 지었다. 처음 이름은 육면정六面亭이었으나 1795년에 미로한정未老閑亭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이는 ‘늙기 전에 한가로움을 얻어야 진정한 한가로움이다未老得閑方是閑’라는 시구를 인용한 것으로 보인다. 아들 순조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수원에 내려와 한가하게 노년을 즐기고자 했던 정조의 뜻이 담겨 있다. 




화성 축성을 막 시작한 1794년 정월, 정조는 미로한정에 올라가 허허벌판이던 수원부에 1천여 집이 들어서 번성한 모습을 바라보면서 관리들을 칭찬했다. 정조 재위 기간 동안에 활약한 화가 김홍도는 미로한정 주변에 가을 국화가 가득한 모습을 ‘한정품국閒亭品菊’이라는 그림으로 남겼다.


 # 내포사(內鋪舍)




내포사는 위급한 상황이 발생하면 행궁에 소식을 알리는 역할을 하던 군사 시설이다. 화성행궁 후원에서 높고 탁 트인 곳에 있어서 사방을 관찰하기에 적절하다. 평상시에는 장교 1인과 군졸 3인이 근무했지만 왕이 행궁에 머물면 장교 2인과 군졸 4인을 배치해 경비를 강화했다. 전면 반 칸은 개방하고 좌우에 낮은 벽을 쳐서 비바람을 막았고, 군사들이 머무를 수 있도록 후면 1칸에는 온돌을 설치했다.


 # 외정리소(外整理所)




외정리소는 화성에서 거행되는 국왕의 행차나 행사에 드는 모든 비용 문제를 총괄하는 곳이다. 조선 정조 19년(1795) 혜경궁 홍씨의 회갑연을 화성에서 치를 때 행사준비를 담당한 임시기관으로 만들었다. 화성 성역이 끝난 후에는 행사준비뿐 아니라 화성행궁의 수리와 군사들의 식량과 말 먹이까지 관장했다. 1796년에 유여택 동쪽의 빈의문 밖에 건물을 짓고, 대문에 외정리아문外整理衙門이란 현판을 걸었다. 마루로 된 대청 6칸을 중심으로 주위에 행랑과 창고를 두었다.


 # 화령전(華寧殿)/사적 제115호, 1801년(순조1년) 창건 





화령전은 정조의 어진(御眞) 즉 초상화를 모시고 제사지내던 곳이다. 정전인 운한각을 중심으로 이안청, 복도각, 재실, 전사청과 향대청 등을 갖추고 내삼문과 외삼문까지 구비했다. 화령전은 당대 최고 기술자들이 참여해 약 2개월이라는 짧은 기간에 완성됐다. 일부 공간은 복원했으나 전체적으로 원형이 잘 남아 있다.





정조는 1800년 6월 28일에 49세 나이로 승하했다. 정조의 무덤을 아버지 사도세자의 무덤인 현륭원 가까이에 조성하기로 결정하자 당시 나라 일을 보던 정순왕후는 현륭원 재실에 모시고 있던 정조 어진을 화성행궁으로 옮기고 별도로 어진을 봉안할 전각을 짓도록 명령했다. 이 명에 따라 순조 1년인 1801년 4월 29일 화성행궁 옆에 화령전을 완성하고 현륭원 재실과 창덕궁 주합루에 모셔져 있던 어진을 옮겨와서 봉안했다.




정조의 아들인 순조는 1804년에 처음으로 화성에 내려와서 현륭원과 건릉에서 제사를 올리고, 화령전에서 술잔을 올리는 작헌례를 올렸다. 재위 기간 동안 총 10차례 화령전에서 작헌례를 올렸던 순조를 본받아 헌종, 철종, 고종도 화성에 내려올 때마다 작헌례를 올렸다. 평상시에는 화성 유수가 중심이 되어 5일마다 어진과 화령전 건물을 살폈으며 매년 정조 탄신일과 납일에는 제사를 올렸다. 화령전은 정조 이후의 모든 왕들이 직접 방문하여 제사를 지냈다는 점에서 그 위상이 높다.


화령전의 정전인 운한각과 이안청.복도각은 창건 당시의 원형을 잘 유지하고 있다는 점이 인정되어 2019년 보물로 지정됐다./사진-문화재청(화령전은 현재 복원공사 중으로 현장 촬영 불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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