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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시 구석 구석 167] 대한제국의 상징 공간 '환구단'
  • 우성훈 기자
  • 등록 2024-01-27 07:54:18
  • 수정 2024-04-10 11:0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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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고종이 대한제국 선포한 장소



[우성훈 기자] 서울시청 앞 광장 한쪽에 고풍스러운 건물이 자리를 잡고 있다. 바로 고종 황제가 대한제국을 선포한 장소인 환구단(?丘壇)이다. 환구단은 1897년 고종이 대한제국을 선포하고 황제로 즉위한 장소로, 서울시는 현재 측면 계단으로만 올라갈 수 있는 환구단 정문도 개방했다.


1896년 2월 경복궁에서 러시아 공사관으로 옮겨 1년여간 생활한 고종은 1897년 2월 거처를 경운궁으로 옮겼다. 경운궁은 임진왜란 이후 모든 궁궐이 소실된 상황에서 선조가 머물면서 궁궐로서의 역사가 시작됐다. 선조의 거처 이후에 광해군과 인조는 이곳에서 즉위식을 올렸다. 그러나 조선 후기 경희궁의 건설과 창덕궁과 창경궁이 중건되면서, 경운궁은 궁궐의 기능을 하지 못했다. 그러다가 고종이 이곳에 거처를 정하면서 근대사의 중심 공간으로 주목을 받게 되었다.




환구단은 제천의식을 행하는 곳으로 여기에서 하늘로부터 국가의 정통성을 확인받는다. 중국 북경의 천단에 해당하는 곳이다. 중국은 외교.국방 정책상 황제만이 하늘에 제사를 지내고 달력을 만들 수 있다며 주변 국가들로 하여금 해마다 한 해의 시작인 동짓날에 맞추어 동지사를 연경에 보내 달력을 받아가게 했다. 본래 우리나라도 고려시대엔 환구의식을 따로 치렀으나 조선왕조가 명나라는 황제국, 조선은 제후국을 용인하면서 1461년 폐지했다. 


고종이 경운궁으로 환어한 1897년 9월부터 환구단 건설이 논의됐고, 10월 11일 건물이 완공되자 전.현직 대신들을 불러놓고 환구단의 첫 제사와 국호를 정하기 위해 논의했다. 이로써 조선왕조는 505년 만에 막을 내리고 대한제국이 개국됐다. 다음날인 12일 고종은 황제로 즉위하고 왕후를 명성황후로 책봉했고, 13일에는 국호를 대한이라 공포했다. 연호는 건양에서 광무로 바꾸었다. 갑오개혁으로 들어선 김홍집 내각때 태양력과 함께 건양이라는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한 이후 건양 2년이 곧 광무 원년이 된 것이다. 14일 대한제국은 이 사실을 각국 공사 공사관과 영사관에 통보했다. 




왕과 황제의 위상에서 가장 큰 차이가 나는 부분은 왕은 토지와 곡식의 신인 사직단에 제사를 지내지만, 황제는 직접 하늘에 제사를 지낼 수 있다는 점이다.


환구단은 지금의 조선호텔 자리에 있었다. 이곳은 태종의 둘째 딸(경정공주)이 개국공신 조준의 아들인 광양군(조대림)이 살던 곳이어서 소공주댁이라 불렀다. 이것이 오늘날 소공동의 유래이다. 


환구단은 화강암으로 쌓은 3층 단에 금색으로 칠한 원추형 지붕에 얹은 제단이었다. ‘천원지방(天圓地方:하늘은 둥글고 땅은 평평함)의 원리에 따라, 하늘의 단은 둥글게 땅의 단은 모나게 쌓았고, 내부에는 하늘의 신, 땅의 신을 비롯해 산.바다.별.강.바람.비 등 천지자연의 신위 등을 모셨다.  환구단이 조성된지 2년후에는 단 북쪽에 남아 있는 팔각 3층 전각인 황궁우를 세우고 태조, 하늘, 당 세 위를 모셨다. 황궁우의 건물 내부는 통층으로 개방하고 각 3면에 3개씩 창을 냈고, 천장엔 발톱이 7개인 칠조룡을 조각해 황제를 상징했다. 




일제는 1913년 환구단을 헐었고 이듬해 그 자리에 총독부의 조선철도호텔이 들어섰다. 이것이 조선호텔의 내력이다. 이로써 환구단의 자취는 찾아볼 수 없게 됐고, 현재는 황궁우 3층 전각만 남아 있다. 환구단의 대문은 1960년대에 해체되어 사라졌다가, 2007년 우이동 옛 그린파트호텔 대문으로 사용되고 있음이 확인, 2009년 12월 지금은 도로가 된제자리의 근처에 복원됐다. 


환구단 곁에 있는 3개의 석고는 1902년 고종 즉위 40년을 기념해 세운 석조물로서, 이 석고의 실제 용도는 고종황제의 공덕을 기록하기 위한 일종의 비석이라고 한다. 석고는 제천의식 때 사용되는 악기를 본뜬 것이고, 몸체에는 황제를 상징하는 용이 화려하게 조각되어 있다. 



석고종이 황제 즉위식을 올리며 대한제국을 선포한 과정에 대해 ‘고종실록’은 “의정부 의정 심순택이 백관을 거느리고 아뢰기를, ‘고유제를 지냈으니 황제의 자리에 오르십시오’라 하였다. 신하들의 부축을 받으며 단(壇)에 올라 금(金)으로 장식한 의자에 앉았다. 심순택이 나아가 십이장곤면(十二章袞冕:12개의 무늬가 들어간 곤룡포와 면류관)을 올리고 성상께 입혀드렸다. 이어 옥새를 올리니 상이 두세 번 사양하다가 마지못해 황제의 자리에 올랐다. 왕후 민씨를 황후로 책봉하고 왕태자를 황태자로 책봉하였다. 심순택이 백관을 거느리고 국궁, 삼무도(三舞蹈), 삼고두(三叩頭), 산호만세(山呼萬世), 산호만세, 재산호만세(再山呼萬世)를 창(唱)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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