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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제천 정착 새터민 의사, 역경 딛고 해마다 제천시 인재육성을 위한 선한 영향력 펼쳐
  • 박광준 기자
  • 등록 2024-01-28 22:23:28
  • 수정 2024-01-28 22:4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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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광준 기자] 새터민(북한이탈주민)으로 현재 제천시에 정착해 의사로 활동하고 있는 S병원 손OO 원장(59세, 여)을 만났다.


북한을 떠나 십여 년 전 한국에 입국한 그녀는 하나원 적응 교육을 마치고 바로 제천에 터를 잡았다. 그에게는 제천이 문자 그대로 ‘제2의 고향’인 셈이다.


왜 하필 제천을 택했냐는 질문에 대한 답변이 재미있다. “서울·경기는 인기가 너무 많고… 그나마 지도를 보니 제천이 서울하고 가장 가깝더라고요?” 제천의 위치적 장점은 이렇게 빛을 발했다.


“처음 한국에 왔을 때 저는 40대 후반이었지만 모든 면에서‘신생아’ 수준이었어요. 북에서는 비교적 어렵지 않게 지냈거든요. 한국행은 순전히 의학과 세상에 대한 갈증으로 택했어요. 한국 드라마에서 봐온 새로운 세상과 남한 의사들의 학문적 성취가 궁금했죠”


제천에 정착한 지 12년이 흘렀지만 손 원장은 탈북 후 의사 국가고시 시험(이하 ‘국시’) 준비할 때를 엊그제처럼 또렷이 기억한다.


“북한에서 의학 학위는 인정되지만, 국시를 여기서 다시 치러야 의사가 될 수 있어요. 탈북 당시 북한에서는 진단명을 라틴어로 표기하고 있었으므로 의학 용어나 한국의 수많은 제약회사에서 쏟아져 나오는 약 이름 등을 익히기가 어려웠죠. 여기에 월 40만 원 정도 기초생활수급비로는 국시 준비를 위한 책값조차 부담할 수 없었어요. 낮에는 식당에서 설거지 아르바이트를 했고 주로 밤에 공부하며 준비했어요”


의외로 그가 처음부터 국시를 선택한 것은 아니었다. 처음에는 대원대학교에서 간호학과에 입학해 간호사가 되고자 했다.


왜냐하면 하나원 졸업 시 진로상담사가 대한민국 의사는 상위 1%에 해당하는 사람들이라 50을 바라보는 나이에 의사 자격 취득이 쉽지 않을 것이라고 했기에 의사의 꿈을 마음속에 접어둔 채 간호학과에서 아들 또래의 친구들과 함께 간호학 공부를 시작하게 된 것이다.


“차도 없이 버스를 타고 왔다갔다 하며 20대들 틈바구니에서 악착같이 한 달을 버텼어요. 그러다 결국 폐렴으로 병원에 입원하게 되었고, 결국 이 일이 내 인생의 전환점이 됐죠”


손 원장은 이때를 인생의 전환점이자 인생에서 가장 비참한 시기로 꼽았다.


병원에 입원해 있는 동안 너무 바빠 자판기를 두드리면서 환자 얼굴 한번 안 쳐다보고 진료차트만 작성하는 의료진도 그랬지만, 더욱더 마음 아팠던 건 입원 후 며칠 동안 전화는커녕 아무도 자신을 찾지 않을 때 느낀 고립감, 외로움은 지금도 그 어떤 말로도 표현하기 어렵다고 한다.


이민수용소 시절 한 탈북자가 ‘우리와 출신이 다른 세계에서 살던 엘리트’라 비난하며 돌칼로 살해위협을 했을 때도 이런 기분은 아니었다고 회상한다.(물론 지금은 그 친구와 연락하며 지내고 있다고 한다.)


“찾아오는 사람도 없고, 딱히 할 일도 없으니 병원에 있던 잡지책이라도 보자 싶었어요. 거기에서 한 새터민 의사가 겪은 역경과 극복 이야기를 읽는데 온몸에 전율이 흐르더라고요. 그제야 비로소 목숨 걸고 한국행을 택한 이유가 생각났죠”


병원에서 퇴원한 다음 날 손 원장은 바로 간호대학에 자퇴 원서를 내고 그날부터 의사 국시 준비에 매진했다. 1년 반을 ‘주경야독’해 단번에 국시에 통과했다. 그리고 제천에서 배우자를 만나 가정도 꾸렸다. 의사면허증을 받은 다음 날 바로 제천의 한 병원에 취직해 2년간 봉직 의사로 일하다가 지난 2017년에 병원을 개원 했다.


역시 맨 손이었고 시부모님도 남편도 대한민국 사회가 그리 만만한 사회가 아니라며 개원을 극구 말렸으며 단 한 푼의 지원도 해주기를 꺼렸었기에 그는 자신의 의사면허증을 담보로 대출을 받아 병원을 시작하였다고 한다.


“개원 후에도 3-4개월은 대출을 받아 직원들 급여를 줬어요. 개원했는데 약국 입점이 안 돼서 직원이 자전거 타고 200m 정도 떨어진 약국까지 가서 처방약을 받아다 환자들에게 줬어요. 남한 사회에는 학연도, 지연도, 아무런 인맥도 없으니 너무나 당연한 결과였는데 내가 너무 순진했던 거죠”


그러나 그는 좌절하지 않았다. 좌절감이 밀려올 때면 오히려 전국 곳곳에서 열리는 학회나 세미나를 찾아다녔다. 거의 매 주말마다 서울로 지방으로 학회가 열리는 곳마다 찾아다녔다고 한다. 미를 향한 여성들의 도전을 돕고 싶다는 생각으로 미용학회, 비만전문학회에 빼먹지 않고 참석했다.


“입원했을 때 차트나 컴퓨터만 보는 의사가 되지 말자고 마음속으로 다짐했어요. 지금도 그 다짐은 진료 시 제 첫 번째 원칙이에요. 물론 우리 직원들에게는‘냉정한 원장님’으로 통하지만요”


현재 5명의 직원을 두고 있다는 그의 병원은 얼마 전 개원 7주년을 맞이했다. 직원들과 조촐한 파티도 했다며 자랑하듯 말하는 모습은 소녀 같았다.


그는 지난 2020년 2백만원, 2023년 3백만원을, 2024년에도 3백만원을 제천시 인재육성재단에 각각 기탁했다. 왜 인재육성재단이었는지 이유를 물었다.


“병원을 개원하고 원장으로 있으니 환자 진료뿐 아니라 경영자적 자질이 없이는 우리 병원을, 직원들을 지킬 수가 없더라고요. 그래서 세명대 민송CEO 과정을 듣게 됐죠. 여기서 지중현 현 제천시 인재육성재단 이사장님과 친분이 생기며 인재 육성에 대한 관심을 갖게 됐어요. 실은 북에 아들이 하나 있었는데, 그 아이가 19살 되던 해 세상을 떠났거든요. 그래서인지 그 또래 아이들을 보면 마음부터 먹먹해요. 가슴에 묻었다고 생각하다가도 불현듯 떠오르죠. 이것도 인연이다 싶어 소소하게라도 아이들에게 도움이 되길 바라는 마음에서 시작하게 되었고 앞으로도 꾸준히 기탁을 이어가고 싶어요”


마지막으로 시민을 위한 건강관리 방법을 물었다.


“건강은 건강할 때 지켜야 한다는 말씀을 꼭 해드리고 싶어요. 젊더라도 당뇨, 혈압수치가 높으면 반드시 의사와 상담 후 약을 꼭 챙겨 드세요. 왜냐하면 당뇨, 고혈압 합병증은 무서운 삶의 질 하락을 가져오게 되므로 때늦은 후회는 하지 마시길 바라요.


비만은 만병의 씨앗이에요. 100세 시대는 현재부터 만들어지는 거예요. 여러분의 건강한 100세 인생을 응원합니다”


그는 지금도 매일매일 병원을 찾는 모든 환자에게 항상 좋은 진료를 드리기 위해 환자를 가족처럼 생각하는 따뜻한 마음으로 컴퓨터 화면이 아닌 환자들의 눈을 마주 보며 책임감과 사명감을 가지고 진료에 최선을 다하고 있다고 한다.


40대 후반에 정착해 지금은 60세를 바라보고 있는 손 원장은 지금도 주말이면 전국 각지 학회, 세미나를 챙기며 자신을 담금질한다. 인터뷰 내내 탈북 비화, 외로움, 고립감은 담담하게 읊다가도 건강관리 비법과 의학에 대한 말을 건네면 불타올랐다. 삶의 시련에서는 강함을, 자신의 신념 앞에서는 열정 어린 모습을 한 그는 영락없이 ‘제천 의병의 후손’처럼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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