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 메일전송
서울시 구석 구석 195] 구 독일영사관
  • 이승준 기자
  • 등록 2024-02-01 20:57:00
  • 수정 2024-04-10 21:48:53

기사수정

사진출처-서울 중구청 [이승준 기자] 구(舊) 독일영사관(獨逸領事館)은 1883년 조선과 한독수호통상조약(韓獨修好通商條約)을 체결하고, 1884년 10월 14일 낙동(駱洞, 현 충무로1가 서울중앙우체국 뒤편)에 처음 개설됐다. 이후 박동(현 종로구 수송동 종로구청 자리)을 거쳐 정동으로 이전했다가, 상동(尙洞)에 건물을 신축.이전한 뒤 1903년 독일공사관으로 정식 승격됐다. 을사늑약(乙巳勒約) 체결 이후 다시 독일영사관으로 격하됐고, 1914년 외교단절로 폐쇄됐다가 1928년 재개설했다.


현재 서울시립미술관이 위치하고 있는 서소문동 38번지는 원래 1890년에서 1902년까지 구(舊) 독일영사관(獨逸領事館)이 자리했던 지역이었다. 독일은 1883년 11월 26일 조선과 한독수호통상조약(韓獨修好通商條約)을 체결하고 일본 요코하마주재 총영사인 짜페(Karl Edward Zappe, 1843~1888)를 파견했고, 우리 측은 교섭통상사무아문독판(交涉通商事務衙門督辦) 민영목(閔泳穆, 1826~1884)을 전권대신으로 삼았다.


그 후 1884년 6월 24일에 부영사 버들러(H. Budler)가 서울로 찾아와 조약비준을 위한 준비업무를 추진했고, 같은 해 10월 14일 총영사 쳄쉬(Captain Otto G. Zembsch, 1841~1911)가 정식으로 부임해 조약비준서를 교환한 뒤 독일의 공관개설이 진행됐다. 공관은 협판교섭통상사무아문(協辦交涉通商事務衙門)으로 활동하던 독일인 묄렌도르프(Paul George von Moellendorf, 穆麟德, 1847~1901)의 알선으로 낙동(駱洞, 현 충무로1가 서울중앙우체국 뒤편)에 정했다.


이곳은 3개월에 한 번씩 불입하는 조건으로 매달 15원에 임대해서 사용하는 한옥(韓屋)이었는데, 독일은 건물이 좁고 낡았다는 이유로 인근 서쪽에 있던 빈집을 빌려 사용하기 위해 여러 차례 조선정부 측에 청원했다. 하지만 그곳은 이미 프랑스의 공관(公館)으로 사용하기 위해 비워놓은 집이었기 때문에 끝내 거절당했다고 알려진다.


이후 독일영사관은 1886년 11월, 박동(현 종로구 수송동 종로구청 자리)의 저택으로 이전했다가, 세창양행(世昌洋行, Edward Meyer&Co.)과 조선정부의 소유권 분쟁이 일어나면서 정동의 육영공원자리로 자리를 옮기게 됐다.


이후 1900년 3월 대한제국 궁내부에서 독일영사관 일대의 부지를 매수하고 상동(尙洞)소재의 관유지를 넘겨주자, 독일은 1901년 3월 공사를 시작해 지하1층 지상2층에 연건평 252평 규모의 건물을 신축하고, 1902년 완공해 이전했다. 그리고 1903년 5월 변리공사 잘데른(Conrad von Saldern, 1847~1909)이 새로 부임하면서 마침내 정식으로 독일공사관으로 바뀌게 됐다.


그러나 1905년 을사늑약(乙巳勒約)이 이후 다시 영사관으로 격하돼, 1906년 초 서대문 밖 평동(平洞, 현 교남동)의 저택으로 자리를 옮겼고, 1914년에는 일본의 독일에 대한 선전포고로 외교관계가 단절되어 폐쇄됐다. 이후 약 14년만인 1928년 6월 재개설됐으나 광화문통 210번지, 서소문정 55번지, 서소문정 41번지로 전전했던 것으로 확인된다.

0
  • 목록 바로가기
  • 인쇄


 한국의 전통사찰더보기
 박정기의 공연산책더보기
 조선왕릉 이어보기더보기
 한국의 서원더보기
 전시더보기
 한국의 향교더보기
 궁궐이야기더보기
 문화재단소식더보기
리스트페이지_004
모바일 버전 바로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