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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시 구석 구석 197] 조선시대 국가제의.나라의 안정과 번영 기원하는 신당 '국사당' 외
  • 이승준 기자
  • 등록 2024-02-01 22:43:48
  • 수정 2024-04-10 21:5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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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준 기자] 국사당(國師堂)은 조선시대에 국가 제의를 행하고, 나라의 안정과 번영을 기원하는 신당으로, 원래 남산 팔각정 부근에 있던 사당이었다. 일제강점기에 조선총독부가 남산에 조선신궁(朝鮮神宮)을 건설하고 남산을 일본 신토(神道) 신앙의 본거지로 조성함에 따라 국사당은 인왕산 기슭의 현재 위치로 옮겨졌다. 


국사당(國師堂)은 조선시대에 국가 제의를 행하고, 나라의 안정과 번영을 기원하는 신당으로, 원래 남산 팔각정 부근에 있던 사당이었다. 일제강점기에 조선총독부가 남산에 조선신궁(朝鮮神宮)을 건설하고 남산을 일본 신토(神道) 신앙의 본거지로 조성함에 따라 국사당은 인왕산 기슭의 현재 위치로 옮겨졌다. 


국사당의 유래와 관련해, 무속신앙으로 무학대사를 모시고 있어 국사당이라 불렀다는 설과 함께, 태조가 즉위할 것을 예견한 함경도의 어느 노파와 그 딸의 영혼을 위로하기 위해 지어진 것이라는 설화가 전해 내려온다.


국사당(國師堂)은 서울을 수호하는 신당으로 원래 지금의 남산 팔각정 부근에 있었으나, 일제가 남산에 신궁(神宮)을 지으면서 신궁보다 높은 곳에 사당이 있을 수 없다 해 인왕산 기슭의 선바위 밑으로 이전시켰다. 사당 안에는 여러 신이 모셔져 있는데, 그중 무학대사가 있어 국사당이라 불렀다는 이야기와 함께 또 다른 흥미로운 설화가 전해진다.



함경도 영흥(永興) 어느 마을에 노파가 살았는데, 슬하에 딸이 있었다. 태조(太祖) 이성계(李成桂)가 아직 어렸을 때 그 집을 지나는데, 노파가 몰래 말하기를, 장차 임금이 될 몸이니 항상 조심하고 무언가 의심나는 일이 있거든 찾아올 것을 부탁했다. 그러던 중, 하루는 태조가 노파의 집 근처를 지나는데, 비가 몹시 내려 그 집에서 하룻밤 묵게 됐다. 노파는 마침 조용히 할 말이 있다며 태조를 반겼다. 


저녁이 되어 태조는 아랫목에 눕고, 노파의 딸은 윗목에 누웠다. 밤이 깊어지자 노파는 태조에게 앞으로의 일과 임금이 되거든 도읍을 한양에 정할 것 등의 여러 가지 일을 말하는데, 갑자기 딸이 말참견을 하였다. 노파가 딸을 꾸짖고는, 태조에게 딸을 때리라고 했다. 이에 태조는 비밀이 누설되면 큰일이라는 생각에 딸을 세게 쳤다. 그러자 노파의 딸은 사지를 떨더니 죽고 말았다.


당황한 태조가 사람을 죽였으니 관에 자신을 고발해 죄를 받게 하라고 했으나, 노파는 태연한 얼굴로 이 일은 자신의 잘못이고 운명이니 아이를 묻어야 한다고 했다. 뒷산에 올라 딸의 시체를 묻은 노파는 그제야 태조의 소매를 잡고 울면서, 태조가 큰일을 이루는 데에 누가 될까 두려워 딸이 죽을 줄 알면서도 때리라 했다 하는 것이었다. 그리고는 곧장 이 길로 가서 대업을 이룰 것을 당부했다.


이후, 태조는 노파를 찾기 위해 함경도 전역으로 수소문했으나 영영 찾을 수가 없었다. 나중에 조선을 세우고 한양에 도읍을 정한 태조는, 남산 중턱에 집을 지어 모녀의 초상을 그려 달고서 국사당이라 칭하고, 봄과 가을에 무당을 시켜 그들의 영혼을 위로했다고 한다.



한편, 서울의 남산 정상에 있는 팔각정에 올라서면 서울 시내가 한눈에 다 보인다. 북쪽을 바라보면 경복궁, 창덕궁 그 뒤로 북악산까지 보이고 남쪽을 바라보면 한강과 그 건너 여의도와 강남의 빌딩, 관악산이 보인다. 조선 시대에는 남산을 안산이라고 하여 조선의 수도인 한성부를 지켜주는 수호산으로 여겼다. 팔각정 자리에는 목멱대왕이라 불리는 산신을 모신 목멱신사가 있었는데, 태조 이성계와 여러 호신신장(護身神將)을 모시면서 국사당이라 불렸다.


국사당은 조선 초기부터 일제강점기까지 왕실과 국가의 안녕을 빌던 굿터이다. 조선시대 국사당에서는 매년 봄.가을마다 나라굿을 지냈고, 비가 오랫동안 내리지 않으면 비가 오길 기원하는 기우제도 지냈다. 나라굿은 주로 왕실 여인들의 의뢰로 행해졌다. 굿은 국가의 소원을 빌어주는 나라무당이 주관했다. 


국사당에서 나라굿을 하는 날이면 많은 민중들이 험한 산길도 마다치 않고 올라와 잔치처럼 구경하면서 나라굿을 의뢰한 왕실의 소원을 함께 빌었다. 그렇게 민중은 왕실과 소통하고 하나가 되었다. 국사당은 유교사상으로 움직이는 조선시대에도 권위가 매우 강했다. 민간에서 전해지는 설화에 의하면 성종과 중종 때 무속신앙을 폐지하는데 앞장 선 조광조도 국사당 폐지에 대해서는 한마디도 입에 올리지 못했다고 한다.


일제강점기인 1925년 조선총독부가 남산 중턱(남산공원)에 큰 규모의 조선신궁을 세우려고 했다. 국사당은 그 당시 남산 정상(팔각정 자리)에 있었는데, 일본인들은 조선신궁 보다 국사당이 더 높이 있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아 옮길 것을 지시한다. 국사당은 일제강점기에도 관리인을 두고 국가가 관리했는데, 그 당시 관리자였던 김용원씨가 당시 돈 50엔을 지불하고 국사당을 사들여 건물 그대로 인왕산으로 옮겼다고 한다.

 


자리를 옮긴 이후 1930년대까지도 궁중에 소속된 나인들이 찾아와 빌고 굿을 올리는 일이 빈번했다고 한다. 그 후 제1공화국 때 남산 국사당 자리에 탑골공원 팔각정과 같은 모양의 정자를 짓고 이승만 대통령의 호를 따 ‘우남정’이라 부르다가 1960년 4.19혁명 때 철거하고 1968년 11월 11일 다시 건립해 팔각정으로 이름을 달리 불렀다.


남산(南山) 팔각정(八角亭)은 1959년 이승만 대통령을 기리기 위해 그의 호를 딴 우남정(雩南亭)을 지었다가 1960년 4.19혁명 때 철거, 1968년에 재건립됐다. 남산 정상에 세워진 이 정자는 서울특별시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탁월한 전망을 자랑하는데, 현재는 남산국제문화축제를 비롯한 여러 문화행사의 무대로 활용되고 있다.


N서울타워 한편에 있는 남산(南山) 팔각정(八角亭)은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가 한양으로 도읍을 옮긴 뒤 이곳에 목멱대왕(木覓大王)이라 불리는 산신을 모시는 국사당을 짓고 제사를 올린 장소이다. 국사당은 조선시대 태조가 한양에 도읍을 정하고 한양의 수호신사(守護神祠)로 북악신사(北岳神祠)와 함께 남산 꼭대기에 두었던 목멱신사(木覓神祠)의 사당이었다.


이후 일제강점기인 1925년 일본인들이 남산(분수대 자리)에 일본신사인 조선신궁(朝鮮神宮)을 지을 때 신궁보다도 높은 곳에 있다는 이유로 철거를 강요, 현판과 사당 일부를 인왕산으로 옮겼다. 광복 후인 1959년 이승만 대통령을 기리기 위해 그의 호를 딴 우남정(雩南亭)을 지었다가, 1960년 4.19혁명 때 철거, 1968년에 재건립됐다./사진-이승준 기자


남산 전상에서 바라본 서울시 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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