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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시 구석 구석 198] 민족주의-사회주의 사이에서 중립적인 노선 견지한 '염상섭'
  • 이승준
  • 등록 2024-02-03 05:37:08
  • 수정 2024-04-10 21:5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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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준 기자] 염상섭(廉尙燮)(1897-1963)의 본명은 상섭(尙燮), 호는 횡보(橫步). 1897년 8월 30일 서울에서 출생했다. 보성소학교를 거쳐 일본 게이오대학(慶應大學) 문학부에서 수학했다.


1920년 4월 '동아일보' 창간과 함께 진학문(秦學文)의 추천으로 정경부 기자로 활동, 같은 해 7월 김억(金億).김찬영(金瓚永).민태원(閔泰瑗).남궁벽(南宮璧).오상순(吳相淳).황석우(黃錫禹) 등과 함께 동인지 '폐허'를 창간했다. 김환(金煥)의 '자연의 자각'에 대한 평가를 둘러싸고 김동인(金東仁)과 논쟁을 벌였다. 1921년 '표본실의 청개구리'를 발표하면서 소설가로 등단한 이후 '암야' '제야' 등을 발표했다.


1922년에는 '묘지'(후에 '만세전'으로 개제)를 발표했다. 이에 이르러서야 작가의 현실을 바라보는 눈이 안정감과 구체성을 획득했다. 같은 해 '폐허 이후'를 발간하고, ‘해바라기'를 출간했다. 주간종합지 '동명'의 기자를 거쳐 1929년 '조선일보' 학예부장으로 활동하면서 '민족사회운동의 유심적 고찰' '소설과 민중' 등의 평론을 발표하기도 했다. 




1920년대 염상섭은 대체로 당시 문단에서 양대 세력을 형성하고 있던 민족주의와 사회주의 사이에서 중립적인 노선을 견지하기 위해 노력, 단편 '윤전기'를 통해 그의 가치중립적 태도를 엿볼 수 있다. 1931년 '조선일보'에 연재된 '삼대'는 식민지 현실을 배경으로 삼으면서 가족간에 벌어지는 세대갈등을 그려낸 그의 대표작이다.



서울의 한 중산층 집안에서 벌어지는 재산 싸움을 중심으로 1930년대의 여러 이념의 상호관계와 함께 유교사회에서 자본주의사회로 변모하고 있는 현실을 생동감있게 그려내고 있다. 이 작품의 속편으로 '무화과'를 내놓은 이후 '모란꽃 필 때' '그 여자의 운명'과 같은 통속소설을 발표하다가 1936년 만주로 건너가 '만선일보'의 주필 겸 편집국장으로 활동했다.



8.15 광복 후 귀국해 1946년 경향신문 편집국장이 됐고, '두 파산' '일대의 유업'을 발표했다. 한국전쟁 중에는 한때 해군소령으로 복무했고, 1954년에는 한국전쟁 중의 서울의 모습을 담담하게 그려낸 장편 '취우'로 서울시문화상을 수상했고, 예술원 창설과 함께 종신회원으로 추대됐다. 1955년 서라벌예대 초대학장을 지냈고, 이듬해 제3회 아시아자유문학상, 1957년 예술원공로상, 1962년에는 삼일문화상 예술부문 본상을 수상했다. 1963년 3월 14일 직장암으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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