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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시 구석 구석 206] 박문사 터
  • 이승준 기자
  • 등록 2024-02-04 23:38:15
  • 수정 2024-04-10 21:57: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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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준 기자] 박문사(博文寺) 터는 일제강점기 서울 중구 장충단공원 동쪽, 지금의 신라호텔 자리에 있던 일본 조동종(曹洞宗) 계열의 사찰인 박문사가 있던 곳이다. 일제의 아시아 침략에 앞장 선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 1841~1909]를 추모하기 위해 세운 것이다. 1948년 대한민국 정부수립 이후 철거됐다.


장충단(獎忠壇)은 원래 을미사변 때 순직한 궁내부대신 이경직(李耕稙)과 연대장 홍계훈(洪啓薰) 등 호위 장졸들의 넋을 기리기 위해 1900년 고종 황제의 명으로 쌓은 제단이 있었다. 이곳에서 봄.가을로 제사를 지내다가 1908년부터는 이마저도 폐지되고 잇따라 나라는 일본에게 빼앗기고 말았다.


우리나라를 장악한 일제는 이 자리가 명성황후를 살해한 일본에 대한 반일감정을 상징적으로 나타내는 장소라는 이유로 1919년 장충단 자리를 공원으로 바꾸었다. 


그리고 1932년에는 당시 조선총독부 정무총감이었던 고다마 히데오[兒玉秀雄]의 주도하에 장충단공원 동쪽에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를 추모하기 위한 사찰을 지어 박문사(博文寺)라 이름 짓고 사찰이 자리잡은 언덕은 춘무산(春畝山)이라 이름 지어 이토의 23주기 기일인 같은 해 10월 26일에 맞추어 완공했다. 이때 박문사(博文寺)라는 이름은 이토의 이름 이등박문(伊藤博文)에서 따온 것이고, 춘무(春畝)는 이토의 호였다. 


건평은 387평, 설립목적은 조선 초대총감 이토 히로부미의 훈업을 영구히 후세에 전하고 일본불교 진흥 및 일본인과 조선인의 굳은 정신적 결합을 도모하기 위한 것으로 명시되어 있다.


일제는 이 박문사 건축에 광화문의 석재, 경복궁 선원전과 부속건물, 남별궁의 석고각 등을 가져다가 사용했고, 경희궁 정문인 흥화문을 이전해 정문으로 사용했다. 낙성식에는 조선총독 우가키 가즈시게[宇垣一成]와 이광수.최린.윤덕영 등의 친일부역자와 기타 1,000여 명이 하객으로 참석했고, 히로히토 천황과 황족들의 하사품도 전해졌다.


한편 일제는 1937년 이곳에 일본군 육탄3용사의 동상을 세워 대륙침략을 위한 정신적 기지로 삼기도 했다. 그리고 1939년에는 이곳에서 이토를 포함해 이용구.송병준.이완용 등 경술국치 공로자를 위한 감사 위령제가 열리기도 했다. 


이용구의 아들 이석규가 흑룡회와 함께 개최한 이 행사에는 다시금 이광수.최린.윤덕영 등 친일부역자와 1,000여 명의 하객들이 참석했다. 이렇듯 치욕의 역사를 상징하던 박문사 사찰은 대한민국 정부수립 이후 철거됐고, 현재 그 자리에는 신라호텔이 자리잡고 있다./사진-중구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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