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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시 구석 구석 209] 남산도서관 옆에 '산유화'가 새겨져있는 '소월시비'
  • 박광준 기자
  • 등록 2024-02-05 04:31:18
  • 수정 2024-04-10 21:59: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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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광준 기자] 소월시비(素月詩碑)는 1968년에 한국신시(韓國新詩)60주년을 기념해 한국일보사에서 소월(素月) 김정식(金廷湜, 1902~1934)을 기리기 위해 세운 비석이다. 남산공원 내 남산도서관 옆에 있는 소월시비에는 그의 대표작인 '산유화'가 새겨져있다.


1924년 '영대(靈臺)'3호에 발표된 '산유화'는 피고 지는 꽃의 생명원리, 태어나고 죽는 인생원리, 생성하고 소멸하는 존재원리에 관한 깊은 통찰을 드러낸 생에 대한 깨달음이 잘 나타나있다.


김소월은 1902년 평안북도 구성에서 태어났고 평안북도 곽산군에서 성장했다. 본관은 공주(公州)이고, 소월(素月)은 호이자 필명이다. 어려서 한문을 배웠고, 남산보통학교를 거쳐 1915년에 평북 정주에 있는 오산학교(五山學校)에 입학했다. 오산학교에 다니던 중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 학교가 잠시 폐교되자 1922년 서울 배재고등보통학교 5학년에 편입.졸업했다. 이후 1923년 일본 도쿄(東京) 상과대학교 예과에 입학했으나 관동대지진으로 인해 중퇴하고 귀국했다.



오산학교를 다니던 때에 교장 조만식(曺晩植)을 필두로 서춘(徐椿), 이돈화(李敦化), 김억(金億)에게 가르침을 받았다. 특히, 김억은 소월의 시적 재능을 인정하고 그가 시인으로 등단하는데 도움을 주었다. 김억에게 깊은 영향을 받았던 소월은 1920년 오산학교에 재학할 때 '창조' 5호에 '낭인의 봄' '야(夜)의 우적(雨滴)' 등 시 5편을 발표하면서 등단했다. 이어 1922년부터 '개벽'에 그의 대표작인 '금잔디' '엄마야 누나야' '진달래꽃' 등을 활발히 발표했다. 이때의 시는 여성의 목소리로 곱고 애달픈 서정적인 민요조의 가락이 주조를 이뤘다. 1924년 '영대'의 동인에 가담해 스승 김억, 친구 나도향(羅稻香)과 함께 활동했다.


1923년 9월 관동대지진 이후 일본에서 귀국한 김소월은 할아버지가 경영하는 광산업을 도왔다. 그러나 사업의 실패로 살림이 어려워지자 처가가 있는 구성군으로 이사했다. 1926년 구성군 남시에 동아일보지국을 개설하고 경영했으나 실패한 뒤 심한 염세주의에 빠졌다. 1930년대에 들어서 작품 활동이 저조해졌고 생활고를 겪으면서 생에 대한 의욕을 잃기 시작했다. 결국 1934년 고향 곽산군으로 돌아가 아편을 먹고 자살했다.



생전에 출판된 유일한 시집인 '진달래꽃'은 1925년에 출판됐는데 한국 서정시 발전에 큰 획을 그었다. '들도리' '건강(健康)한 잠' '돈과 밥과 맘과 들' '팔벼개 노래' '돈타령' 등 이후의 시는 현실인식과 민족적 현실각성을 통해 남성적이고 참여적인 목소리를 내며 민족주의적인 색채가 강하게 부각됐다.


1939년 스승인 김억이 엮은 '소월시초(素月詩抄)'가 출간됐다. 1977년 소월의 시작(詩作)노트가 발견되었는데, 사후 43년 만에 발견된 그 공책에는 스승 김억의 시로 발표된 작품들이 있어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김소월은 1981년 예술분야에서 대한민국 최고인 금관문화훈장(1등급)에 추서됐다./사진-박광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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