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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시 구석 구석 213] 대한제국 시기의 주요 사변에서 순직한 대신.장병 충혼 기리기 위해 제사를 지내던 제단 '장충단 터'
  • 박광준 기자
  • 등록 2024-02-06 08:21:11
  • 수정 2024-04-10 22:02: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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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광준 기자] 장충단 터는 원래 대한제국의 현충 공간으로 설립된 장충단이 있던 곳으로, 서울특별시 중구 동호로 257-10 일대에 해당한다. 1900년 10월 27일에 건립된 장충단은 조선 고종(高宗) 연간과 대한제국 시기의 주요 사변에서 순직한 대신과 장병들의 충혼을 기리기 위해 봄과 가을에 제사를 지내던 제단이다.


장충단(獎忠壇)은 1895년 을미사변 당시 순직한 궁내부대신 이경직(李耕稙)과 훈련대장 홍계훈(洪啓薰) 이하 여러 장병들을 비롯하여 임오군란, 갑신정변 당시 순국한 장병들의 충절을 기리기 위해 봄과 가을에 제사를 지내던 제단이다. 장충단 터는 그 장충단이 있던 곳으로 지금의 서울특별시 중구 동호로 257-10 일대에 해당한다.



1900년 고종(高宗)은 원수부(元帥府)에 명해 을미사변 당시 순국한 이경직과 홍계훈 이하 여러 장병의 제사를 지낼 수 있는 단(檀)을 설치하도록 했다. 이에 원수부는 조선시대 어영청(御營廳)의 분원인 남소영(南小營)이 있던 자리에 단을 설치했고, 고종이 장충단이라 명명했다. 이듬해인 1901년, 육군법원장 백성기(白性基)의 상소로 임오군란, 갑신정변, 을미사변에서 순직한 여타 장병들을 함께 제향하게 됐다.


장충단은 현재 장충단비가 있는 곳에서 국립극장까지를 아우르는 넓은 규모의 공간이고, 제단을 비롯해 상당히 많은 시설과 부속건물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주건물인 장충단 제단은 현 신라호텔 자리에 건설됐고, 부속건물들은 현 장충단공원(獎忠壇公園) 자리에 건설됐다. 장충단에는 3층 기단 및 그 위의 15칸 제단, 장충단비, 1칸짜리 비각이 있었다.


그러나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박탈한 일제가 1908년부터 대한제국 정부에 장충단에서 지내는 제사를 중단하도록 요구했다. 그리고 국권피탈 후에 장충단 비석을 들어내 숲속에 버리고, 사전(祀典)과 부속건물을 폐쇄했다. 그러다 일제는 1919년 장충단과 동대문 근처의 훈련원(訓練院) 터를 묶어 공원운동장 조성계획을 발표하고, 같은 해 6월에 공원을 개원했다.


광복 후 장충단 터에 일제가 세웠던 건물과 기념비들은 모두 철거되고, 1956년 동작동 국립묘지가 조성되기 전까지 국립묘지로 사용됐다. 이후 장충단 일대에 장충체육관.영빈관.신라호텔.자유센터.타워호텔.국립극장.재향군인회관 등이 들어서면서 장충단은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다만 장충단 비석만이 현 남산공원 수표교 서쪽에 다시 세워져 그 영욕의 세월을 증거한다. 1988년부터 서울특별시 중구청에서는 매년 9월에서 10월에 장충단 제향을 이어가고 있다./사진-박광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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