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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시 구석 구석 218] 군기시 터
  • 우성훈 기자
  • 등록 2024-02-07 13:31:02
  • 수정 2024-04-10 22:06: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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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성훈 기자] 군기시(軍器寺)는 고려시대 이후 군사장비의 제조를 맡아보던 관아로서 몇 차례 군기감(軍器監)으로 명칭이 바뀌었다가, 1884년(고종 21)에 폐지되고 그 직무는 기기국(機器局)으로 옮겨졌다. 이곳은 조선시대 군기시가 있었던 곳이다. 그러나 일제강점기 경성부청(京城府廳) 청사가 이곳에 들어서면서 옛 모습을 잃었고, 정부수립 이후에는 서울특별시 청사로 사용되다가 2009년 철거 후 신청사 건축과정에서 군기시 관련 유물이 대량 발굴됐다.


보물 제861-2로 지정된 불랑기자포(佛狼機子砲)/사진-문화재청 군기시(軍器寺)의 전신은 군기감(軍器監)으로 고려 목종(穆宗) 때 병기의 제조와 보관을 책임지는 기관으로 설치됐다. 이후 1308년(충렬왕 34) 원나라의 간섭으로 폐지됐다가, 1362년(공민왕 11)에 군기시(軍器寺)로 개칭되어 부활했다. 조선이 창건된 후에도 이 제도는 답습돼 1392년(태조 1)에 군기감이 설치됐고, 도읍을 한양으로 옮긴 뒤인 1466년(세조 12) 이전의 군기감을 군기시로 다시 개칭하기에 이르렀다.



조선시대 군기시는 오늘날의 국방부에 해당하는 병조(兵曹)의 판서나 참판 중에서 1명, 무장(武將) 중에서 1명을 선발해 관리자로 임명했고, 휘하에 다수의 관리들을 두었다. 특히 세종시대 4군 6진으로 우리나라의 국경이 오늘날과 비슷하게 획정지을 때 군기시는 서북지방의 개척과 정벌을 뒷받침하는 관청으로 뚜렷한 활약을 보였다. 1485년(성종 16)에 펴낸 '경국대전(經國大典)'에 의하면, 당시 군기시에는 644명의 장인들이 활동했고, 무기제조 기술도 수준급이었다고 전해진다. 이후 오랜 기간 전쟁이 없으면서 약화일로를 걷던 군기시는 1884년(고종 21) 그 직무가 기기국(機器局)으로 이관되고 폐지됐다.



일제강점기에 옛 군기시 자리에는 경성일보가 이 일대에 세워지면서 이미 그 자취는 완전히 없어졌고, 1926년에는 오늘날 서울시청 격인 경성부청(京城府廳) 청사가 지상 4층 철근 콘크리트 건물로 지어지면서 옛 모습을 완전히 잃어버렸다. 그리고 광복 후 1946년 경성부청 청사는 서울시청 청사로,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인 1949년부터는 서울특별시청 청사로 줄곧 이용됐다. 그러다가 2008년부터 이전의 건물 일부를 허물고 서울특별시 신청사를 짓던 도중 2009년 조선시대 군기시 관련 유물이 대거 발굴됐다. 출토된 유물 중 특히 불랑기자포(佛狼機子砲)는 보물 제861-2호로 지정됐다. 이 유물들은 서울특별시 신청사가 완공된 후, 신청사 시민청 지하 1층 ‘군기시 유적 전시실’에 배치되어 일반에 공개됐다./사진-우성훈 기자, 문화재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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