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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시 구석 구석 225] 유관순열사동상
  • 박광준 기자
  • 등록 2024-02-09 06:06:30
  • 수정 2024-04-10 22:13: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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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광준 기자] 유관순열사동상(柳寬順烈士銅像)은 충청남도 천안(天安) 아우내 장터에서 독립만세운동을 주동하다 체포되어 옥중에서 순국한 유관순(柳寬順, 1902~1920) 열사(烈士)의 애국정신을 기리기 위해 1970년 10월 12일 애국선열조상건립위원회(愛國先烈彫像建立委員會)와 서울신문사가 숭례문(崇禮門, 남대문) 앞에 건립했다가, 지하철공사로 인해 건립 반년 만인 1971년에 현재의 남산공원으로 이전했다.


유관순열사동상(柳寬順烈士銅像)은 독립만세운동을 주동하다 체포되어 순국한 유관순(柳寬順, 1902~1920) 열사(烈士)의 애국정신을 후세에 알리기 위해 1970년 애국선열조상건립위원회(愛國先烈彫像建立委員會)에 의해 건립됐다. 1971년 이전해 현재 장충동 남산공원 장충자락에 위치해 있고, 2002년 국가보훈처 지정 현충시설 10-1-9호로 등록됐다. 



동상의 규모는 대석 높이 4m, 동상 높이 4.5m, 총 8.5m의 높이로 부지면적은 2,400㎡이다. 조각은 서울대 미대 김세중(金世中) 교수가 했고, 동상의 글과 글씨는 각각 서명학(徐明學)과 이기우(李基雨)가 담당했으며, 제작비용은 대한통운회장 최준문(崔竣文)이 헌납했다.


이 동상은 오른손에 횃불을 높이 치켜들고 있는 모습을 하고 있다. 이는 일제로부터 독립하겠다는 우리 민족의 간절한 염원을 담고 있다. 3층 기단 위에 놓인 원형 탑신(塔身)에는 독립운동가들이 태극기를 들고 만세를 외치거나, 일본경찰에 체포되어 밧줄에 묶인 모습 등 6개의 부조(斧藻)로 장식되어있다.



유관순은 충남 목천군 이동면 지령리에서 태어나 자랐다. 기록에 의하면 여자치고는 큰 키인 169cm에 다부진 체격이었다고 한다. 고집 세고 장난기가 많았는데, 한 번은 이런 일도 있었다고 한다. 유관순은 일제강점기의 독립운동가로 1902년(광무 6)에 충청남도 목천군 이동면 지령리에서 태어났고 본관은 고흥(高興)이다. 


1916년 이화학당에 입학해 재학하던 중 1919년 3.1독립운동이 일어나자 학생들과 함께 가두시위를 벌였고, 만세 시위를 지휘하기 위해 고향인 천안(天安) 병천면(竝川面)으로 내려갔다. 그리고 1919년 4월 1일 3,000여 명의 시위 군중이 모인 천안 아우내 장터에서 미리 준비한 태극기를 나눠주고 시위대열의 선두에 서서 독립만세를 외치면서 시위행진을 주도했다. 



유관순은 이화학당 내 비밀결사 이문회를 통해 3·1 독립만세운동 계획을 전해 듣고 6명의 친구들과 함께 시위에 참여하기로 한다. 3월 1일 탑골공원에서 독립선언식을 마친 사람들이 학교 앞을 지나가자, 유관순은 친구들과 함께 담장을 뛰어넘어 동참했다. 이후 서울 시내 곳곳의 독립만세운동이 식지 않자 조선총독부는 주동세력이 모인 학교에 임시휴교령을 내린다. 유관순은 그길로 고향에 내려간다. 


아우내 장터 만세운동을 이끈 유관순은 고향 병천에 내려와 일제의 감시를 피하기 위해 머리에 수건을 쓴 아줌마 차림으로 천안, 안성, 진천, 청주 일대의 교회학교와 유림을 찾아다니면서 아우내 장터에서 있을 만세운동에 참여할 것을 권한다. 1919년 4월 1일 오전 9시경 아우내 장터에 3,000명이 넘는 민중이 모여든다. 



유관순은 직접 만든 태극기를 주민들에게 나눠주고, 단상에 올라 "이 아름다운 금수강산에서 원수 일본을 몰아내고 독립을 쟁취합시다."라고 부르짖는다. 이후 흥분한 군중들이 거리 행진을 시작한다. 엄청난 인원과 열기에 놀란 일본군은 당황해서 물러났다가 다시 와 군중을 향해 무차별 총격을 가한다. 그 자리에서 유관순의 부모님을 포함해 19명이 세상을 떠나자 유관순은 부모의 죽음을 항의하다가 구속된다. 


범죄를 인정하면 풀어준다는 일본판사에게 그녀는 독립운동은 범죄가 아니며 침략한 일제가 물러나야 한다고 계속 저항한다. 이후 악명 높은 서대문형무소에 갇히지만 형무소 안에서도 1920년 3월 1일에 다시 동지들과 옥중만세운동을 펼쳤고 그로 말미암아 어둡고 축축한 독방에 갇혀 무자비한 고문을 받았다. 1919년 10월에 양명이란 여자가 출산으로 감옥에서 나갔다가 11월에 다시 들어왔다. 



유관순은 빨래를 해 축축한 어린애 기저귀를 자기 몸에 감아 체온으로 말려 주는 등 어려운 와중에도 인정을 잃지 않았다고 한다. 일제의 온갖 탄압에도 굴하지 않고 항일 독립의지와 민족의 기개를 잃지 않던 유관순은 1920년 10월 12일 고문의 후유증으로 18세의 나이에 순국했다.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에 추서됐다. 


유관순열사동상은 국가단위 공공예술프로젝트인 애국선열들의 조상(彫像) 건립 운동의 일환으로 건립됐다. 애국선열조상건립운동은 1964년 서울시내 미대생연합이 제작한 석고로 만든 37인의 역사인물 조상의 수리문제가 문화재위원회의 안건으로 올라가면서 시작된 것이다. 문화재위원회는 새로 위인동상건립위원회를 만들자는 결론을 냈다.



이후 1966년 제1회 5·16민족상 산업부문 장려상 수상자인 이한상(李漢相, 1917~1984)이 영구성 있는 동(銅) 또는 대리석으로 선열(先烈)들의 조상(彫像)을 건립하도록 의뢰하면서 상금 50만원을 서울신문사에 기탁했다. 


당시 김종필(金宗泌) 공화당 의장이 애국선열조상건립위원회의 총재를 맡았고, 서울신문사가 주관사가 되어 1968년부터 1972년까지 5년간, 15기의 동상건립프로젝트가 실행되었다. 그 중 8번째로 세워진 유관순열사동상은 위치선정의 문제로 김유신장군 동상과 함께 제작 반년 만에 이전하게 됐다.


1970년 건립된 유관순열사동상은 2002년 11월 2일 국가보훈처 지정 현충시설 10-1-9호로 등록됐다./사진-박광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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