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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시 구석 구석 235] 칠패로 & 칠패시장 터
  • 박광준 기자
  • 등록 2024-02-11 09:43:58
  • 수정 2024-04-10 22:22: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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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광준 기자] 칠패시장(七牌市場) 터는 지금의 서소문 밖에 있던 난전시장(亂廛市場)이 있던 곳으로, 칠패시장은 조선시대 이현(梨峴).종가(鍾街) 등과 함께 서울의 가장 큰 상업중심지 가운데 하나였다. 시전(市廛)과 마찬가지로 미곡, 포목, 어물 등을 비롯한 각종 물품이 매매되던 곳으로, 언제 형성됐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지금의 서울특별시 중구 칠패로 36 일대에 해당한다.


칠패시장(七牌市場)은 조선시대 한양의 대표적인 시장으로, 등록되지 않은 자나 허가받지 않은 상행위가 이뤄졌던 난전시장(亂廛市場)의 하나로, 각종 물품이 매매되던 칠패시장은 어물전이 유명했다. 칠패는 남대문과 서소문 사이에 자리잡고 있어서 사람들의 출입이 용이했고, 용산.마포 등과도 가까워 어물의 반입이 쉬웠기 때문이다. 칠패시장 터는 그 시장이 있었던 곳이다.



칠패시장이란 명칭은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치른 조선 후기에 남대문 밖의 칠패에 상인들이 모여들면서 시장이 생긴 것에서 유래한다. 칠패는 조선 후기 훈련도감(訓鍊都監)이나 어영청(御營廳) 등이 한성부(漢城府)를 8패로 나누어 순찰하던 데에서 비롯된 것이다. 곧 어영청의 칠패가 남대문 밖에서부터 청파와 마포, 용산 지역의 순찰을 담당하고 있었는데, 남대문 밖에 칠패의 초소인 복처(伏處, 조선시대 순라군들이 밤에 지키던 곳)가 있었기 때문이다.


칠패시장은 18세기 전반기에 이미 대규모의 시장으로 발전해 시전(市廛)의 중심지이던 종로시전을 넘어서고 있었다. 칠패는 형성 단계부터 불법으로 취급된 난전시장으로서, 칠패 상인들의 활동은 금난전권(禁難廛權)을 가진 시전상인들의 강력한 규제 대상이 됐다. 



특히 시전에서 어물을 많이 취급하고 있었기 때문에 어물전 상인들의 견제와 통제가 매우 심했다. 이에 칠패 상인들은 금난전권의 규제를 피하고 가격 경쟁력을 높이기 위해 직접 지방에 내려가 어물 등의 상품을 구입하거나, 지방에서 들어오는 어물을 중간에 매점해 도산매하는 전략을 취했다.


칠패 상인들이 이런 방법으로 상품을 대량으로 확보하고 물가를 마음대로 조정하게 되자 시전 상인들은 큰 타격을 받았다. 칠패 상인들은 자본과 조직을 바탕으로 물품의 구입과 확보, 판매 등에서 시전상인들을 압도해 서울 시장의 주도권을 쥐게 됐다. 칠패시장 터는 그 칠패시장이 있던 곳으로, 지금의 중구 봉래동1가 48번지 일대에 해당한다.



칠패로(七牌路)는 너비 25m, 길이 500m의 왕복 4차선(일부 7차선) 도로로서 서울특별시 중구 세종대로 40번지 숭례문(崇禮門, 남대문)에서 염천교(鹽川橋)를 건너 서소문(西小門)근린공원에 이르는 로, 1984년 11월 처음으로 이 구간의 가로명이 제정됐다. 이름은 숭례문과 염천교 사이에 있었던 칠패시장(七牌市場, 지금의 남대문시장)에서 따왔다. 남대문시장은 18세기 이후 종로시전(鐘路市廛)과 배오개시장(梨峴市場, 지금의 동대문시장)과 함께 서울의 3대 주요시장으로 꼽힌다. 


칠패시장(남대문시장)의 7패는 원래 지명이 아니었다. 조선 말 정부는 도적.방화.변란 등을 막기 위해 1670년(헌종 11)부터 5군영 중 금위영(禁衛營).어영청(御營廳).훈련도감(訓鍊都監)의 군인들로 하여금 교대로 도성 안팎을 8패로 나누어 해당구역을 순찰하게 했다. 이곳 봉래동 일대는 어영청의 7패 관할구역으로서 근처에 7패 순청(巡廳)이 있었으므로 칠패라 불리었다.



숭례문은 서울역과 경복궁(景福宮)을 잇는 수도 서울의 남쪽 관문으로서 한양 천도 때부터 도성의 남문(南門)으로 자리를 지켜온 국보(國寶) 제1호 문화유산이다. 조선시대에는 용산강(龍山江)과 마포 서강(西江)을 타고 올라온 재화들이, 철도가 놓인 뒤에는 전국에서 기차를 타고 올라온 물품들이 서울역과 남대문을 통해 도성 안에 전해졌다. 한양 3대시장의 명성이 태어나게 된 길목이다.


염천교는 옛날 이 자리에 화약을 제조하는 염초청(焰硝廳)이 있어서 생긴 이름으로, 원래는 염청교(焰廳橋) 혹은 염초청교(焰硝廳橋)라 했는데, 그 소리가 변해 염천교가 됐다. 염천교는 시냇물[鹽川]과 무관한 고가차도로서 1978년 5월 30일, 너비 30.8m 길이 52.1m의 염천고가차도가 개통하게 되자 칠패길을 운행하는 차량들이 열차 신호대기 없이 다닐 수 있게 됐다.


연천교 수제화거리염천교 서쪽으로 다리를 건너면 오른편으로 꽤 넓은 녹지가 나온다. 넓이 1만 7,340㎢의 서소문근린공원이다. 서문 밖 순교지로 불리는 천주교 성지로서 조선 후기 박해가 일어날 때마다 천주교인들을 처형하던 곳이다. 1801년 신유박해(辛酉迫害)부터 1866년 병인박해(丙寅迫害)까지 1백여 명의 천주교인이 처형됐다. 이 가운데 44명이 성인으로 추서되어 국내 최대의 천주교 성지가 됐다. 지금은 여러 단체에서 무료로 실직자 급식소와 건강진단, 일자리 안내분소 등을 운영하고 있다.


서소문공원에서 칠패로 건너편을 보면 낡은 상자형 4층 건물들이 길쭉하게 늘어서 있다. 2층에서 4층은 간판도 거의 보이지 않고, 1층에만 1970년대식 간판이 줄지어 붙어 있는 염천교 수제화거리가 있다. 광복 후 미군들의 중고 군화를 개조해 구두를 만들기 시작, 1970년대부터 19880년대까지 수제화의 전국 물량을 이곳에서 거의 다 제공할 정도로 번성했다. 최근 서울시와 중구가 활성화방침을 밝히면서 다시 활력이 되살아나고 있다./사진-박광준 기자, 자료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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