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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시 구석 구석 236] 한양도성 사소문 중의 하나인 '광희문'
  • 박광준 기자
  • 등록 2024-02-11 21:43:29
  • 수정 2024-04-10 22:22: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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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광준 기자] 국가지정문화재 사적 제10호인 광희문은 서울을 둘러싼 한양도성의 사소문 중에 동남방향에 있는 성문이다. 한양도성이 지어진 1396년에 같이 완공됐고, 수구문(水口門) 혹은 시구문(屍口門)이라고 불렸다.


광명의 문이라는 뜻의 광희문은 1396년(태조 5) 도성을 건설할 때 도성 사소문 중 하나로 세워졌다. 광희문은 소의문, 혜화문, 창의문과 함께 한양도성의 4소문 중 하나였다. 한양도성 땅 중 지대가 낮아 남산의 물이 이 부근을 통과하면서 수구문(水口門)이라 불리기도 하고, 또 다른 이유로 시구문(屍口門)이라고도 했다. 


광희문은 조선시대 한양에서 남쪽 지방으로 내려가는 주요 도로 중 하나로 이용됐고 일본 사신의 도성 출입문이기도 했다. 당시 외국 사신들은 한양도성 사대문과 사소문 가운데 조선 정부에서 지정해 준 문으로만 출입하도록 제한 받았다.



광희문은 격이 낮은 문이어서 왕실이나 사대부는 평시에 사용하지 않았지만 위급할 때는 사용하기도 했다. 1624년(인조 2)에 이괄이 난을 일으켰다가 이 문을 통해 도망간 일이 있고, 1636년(인조 14) 병자호란 때는 인조가 광희문을 통과해 남한산성으로 급히 거처를 옮긴 일도 있었다.


광희문은 조선시대 한양도성의 8개문 가운데 하나로 1396년(태조 5)의 도성 수축 공사 때 세운 동남쪽의 문을 일컫는다. 광명의 문이라는 뜻에서 정도전(1342~1398)이 광희문 이라는 명칭을 붙였다고 알려진다. 일제강점기에 문루가 파손되었던 것을 1975년 성곽복원사업의 일환으로 석문을 수리하고 문루를 재건해 오늘에 이르고 있다.


광희문은 1396년(태조 5) 한양도성이 완성될 때 창건됐고, 정도전(1342~1398)이 광희문이라는 명칭을 붙였다고 전해진다. 광희문은 다양한 이칭이 존재해 수구문, 남소문, 시구문 등으로도 불리었다. 수구문은 풍수지리에서 수의 기운이 빠져나가는 문이라는 의미에서, 남소문은 남대문과 동대문 사이에 위치한 문이라는 의미에서 그렇게 불리었다. 



하지만 민간에서는 시체가 빠져나간다는 의미에서 시구문으로 더 많이 통했는데, 조선시대에는 소의문과 광희문을 통해서만 상여가 성 밖으로 나갈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광희문은 조선시대에 몇 차례에 걸쳐 개.보수가 이뤄졌다. 1422년(세종 4)에 한 차례 광희문의 개축이 있었고, 1711년(숙종 37)에도 금위영에 명해 이 문을 개축했다는 기록이 '숙종실록'에 남아 전한다. 이후 문루가 제대로 세워지고 광희문이라는 현판이 걸린 것이 1719년(숙종 45)이었다.


일제강점기에 들어서면서 광희문의 수난은 시작된다. 일제는 도로를 넓히고 전차를 놓는다는 명목으로 한양도성 곳곳의 성벽을 철거하기 시작했다. 이때 동대문 밖에서부터 광희문 사이의 성벽도 철거됐고, 1915년에는 문루(성 위에 지어진 집)가 헐려 이후 오랫동안 홍예(아치형 석조문)만 남아있었다. 




광복 후 1975년이 되어서야 복원을 시작해 1977년 제 모습을 찾았다. 복원할 때 도로확장 관계로 원래의 자리에서 10여 m 남쪽으로 위치를 옮겨지었고 편액도 새로 써서 붙였다.


옛이야기들을 뒤로한 채 현재의 광희문은 많은 것이 바뀌었다. 광희문 옆으로 새롭게 정비된 한양도성이 100m 정도 이어져 있고 끝나는 지점에 수구문길이 뻗어 있어 산책길로 이용되고 있다. 길을 따라 걷다보면 수구문길 끝자락 방향을 그대로 연장한 장수길 건너편에서 주택의 담장으로 사용되고 있는 한양도성의 흔적을 찾을 수 있다. 



수구문길에서 장수길 그리고 성당길을 빠져나오면 동호로를 만나는데 이 도로를 건너면 철거되지 않은 성곽을 만날 수 있다. 이곳에서부터 오래된 성돌을 구경하면서 도성 밖 길을 따라 걸을 수 있다. 이 한양도성길을 따라 걷다보면 신라호텔, 서울클럽, 민주평화통일자문위원회, 자유센터 등을 차례로 만날 수 있다.



광희문의 파손이 시작된 것은 일제강점기에 이른바 문화주택지 조성이라는 도시개발계획이 수립되면서부터이다. 1913년 전차지선이 놓이게 되면서 북쪽 성곽이 헐렸고, 1915년에는 문루가 무너졌다. 광복 후 6·25전쟁으로 파괴된 문루가 그대로 방치되던 중 1966년에 퇴계로 확장공사가 진행되면서 퇴계로7가 쪽의 성곽마저 추가로 철거됐다. 


광희문 복원은 1975년 서울의 성곽에 대한 전체 복원사업이 수립되면서 본격적으로 이뤄지기 시작했다. 이 계획에 따라 광희문의 홍예문을 15m 남쪽으로 옮겨 쌓았고, 멸실된 문루를 원래대로 복원함과 동시에 주변 일대를 녹지화하는 조경사업이 실시됐다. 2003년에는 광희문에서 남쪽으로 120m 정도에 이르는 성곽에 대한 복원이 이루어졌다./사진-박광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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