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 메일전송
[서울시 구석 구석 257] 고종의 친서.신임장을 헤이그만국평화회의에 전달하려 했던 '이준열사동상'
  • 박광준 기자
  • 등록 2024-02-18 07:20:18
  • 수정 2024-04-10 22:53:47

기사수정


[박광준 기자] 이준열사는 고종의 특사로 1907년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개최되는 만국평화회의에 참석하려 했으나 일본과 영국의 방해, 열강의 무시로 참석하지 못해 헤이그에서 병을 얻어 순국했다. 이 동상은 1964년 사단법인 일성회(一醒會)가 순국열사 이준의 숭고한 애국충절을 기리기 위해 장충단공원 안에 건립한 동상이다.


그는 어려서 부모를 여의고 할아버지와 삼촌의 품에서 자랐다. 1887년(고종 24) 과거시험에 합격해, 함흥의 순릉참봉이 됐으나 이듬해 사직하고 법관양성소에 입학한다. 1896년 2월 한성재판소 검사보에 임명된다. 곧이어 고종이 러시아공사관으로 몸을 옮기는 아관파천이 일어나자 일본으로 건너가 와세다대학 법과를 졸업한 후 귀국한다.


한국으로 돌아온 이후 1898년 독립협회에서 계몽활동을 하고 만민공동회에서 가두연설을 했다. 1904년에는 일본의 황무지 개간권 요구에 대항해 대한보안회를 조직, 총무를 맡아 반대투쟁을 벌인다. 대한보안회가 일제의 강압에 의해 해산되자, 다시 이상설과 함께 대한협동회를 조직해 부회장을 맡아 결국 일본의 요구를 무산시켰다.



1898년(광무 2) 독립협회에 가입해 적극적으로 활동했고, 1902년(광무 6) 비밀결사인 개혁당(改革黨) 운동을 추진했다. 1904년(광무 8) 제1차 한일의정서 강제체결 이후 주도적으로 일제에 대한 반대시위운동을 일으켰고, 대한보안회(大韓輔安會)를 조직해 총무를 맡고 일본의 황무지개척권요구에 반대하는 투쟁을 했다. 강제해산 된 보안회의 후속단체인 대한협동회(大韓協同會)를 조직해 일제의 황무지개척권 요구를 저지시켰다.


이어 1904년(광무 8) 친일조직 일진회(一進會)에 대항하여 공진회(共進會)를 조직하고 반일투쟁을 전개하다가, 일제의 강압에 의해 황해도 철도(鐵島)로 유배당했다. 그러나 1905년(광무 9) 헌정연구회(憲政硏究會)를 조직해 다시 항일운동을 벌였고, 다음 해 평리원 검사를 거쳐 특별법원 검사로 임명됐다.


1905년(광무 9) 을사늑약이 강제체결 되자 이준은 상소문을 짓고 대한문(大漢門) 앞에서 을사늑약폐기 시위운동을 전개했다. 1906년(광무 10)에는 국민교육회(國民敎育會)를 조직해 회장으로 있으면서 교육구국운동을 시작하고 보광학교(普光學校)를 설립했다. 또 애국계몽운동단체인 한북흥학회(漢北興學會)를 조직해 함경도지방의 교육구국운동발흥에 큰 영향을 주었다.



1907년 네덜란드의 헤이그에서 세계평화회의가 열린다는 소식을 들은 그는 비밀리에 고종을 만나 이 평화회의에 특사를 파견해, 을사늑약이 고종의 의사에 의해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일본의 강압으로 체결된 거짓조약임을 알려야 함을 건의해 동의를 얻었다. 그리하여 1907년 4월 22일 서울을 출발해 블라디보스토크에 가서 이상설과 합류하고, 당시 러시아의 수도였던 상트페테르부르크(옛 명칭, 페테르스부르크)로 가서 이위종과 합류, 6월 25일 헤이그에 도착했다.


세계평화회의 의장인 러시아 대표 넬리도프에게 고종의 친서와 신임장을 전하고 평화회의장에 공식적인 한국대표로서 참석하려 했으나 이미 일본의 보호 속에 있는 국가는 참여할 수 없다는 이야기를 듣는다. 회의가 열리는 네덜란드 정부 측과 만나려 했으나 그것조차 이뤄지지 않았다. 이를 전후해 열강들에게 무시당하는 한국대표의 사정이 신문기자들에게 알려져 여러 신문에 나오고, 영국인 윌리엄 스테드가 회장인 국제협회의 후원을 얻어 회보인 '쿠리에르 드 라 콩페랑스(Courrier de la Conférence)'에 장서의 전문을 게재하기도 한다. 


이후 이위종이 국제협회에서 일제 침략을 규탄하는 연설을 하여 큰 호응을 얻고 연설 이후 각국 신문에서 일본의 무단폭력에 의한 조약을 보도해 힘을 얻는다. 그럼에도 각국 회의단 대표들은 대한제국 대표단을 외면한다. 노력을 해도 끝내 세계평화회의에 참석하지 못하게 되자 이준 열사는 병을 얻어 묵고 있던 호텔에서 7월 14일 생을 마감한다. 그가 남긴 유언은 다음과 같습니다. “살아도 살지 아니함이 있고 죽어도 죽지 아니함이 있으니 살아도 그릇 살면 죽음만 같지 않고 잘 죽으면 오히려 영생한다.”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에 추서됏고, 1963년 헤이그 공동묘지에 있던 유해를 옮겨와 국민장으로 서울 수유리 국립묘지에 안장했다. 1964년 장충단공원 안에 이준열사동상이 세워졌고, 1972년 헤이그 묘소에도 그의 흉상과 기념비가 건립됐다.1905년 11월 일제가 강압으로 을사늑약을 체결하자 조약폐기를 요구하는 상소문을 지어 동지들과 함께 상소운동을 전개했고 이후에도 다양한 애국.계몽 운동을 펼쳤다. 또한 1906년 평리원 검사를 거쳐 특별법원 검사로 활약하기도 했다.


1947년 ‘일성이준선생기념사업협회’가 결성되어 기념관과 대학창립 및 동상건립에 관한 논의가 일어났고, 1961년 헤이그(Hague)에 있는 이준열사의 유해봉환운동과 동상건립운동이 일어났다. 1963년 7월 동상 기공식을 열고, 1964년 7월 이준의 순국 57주년추도식과 동상제막식을 장충단공원에서 거행했다. 국민모금으로 건립된 동상은 7.8m 높이로 조각가 송영수(宋榮洙)가 만들었다./사진-박광준 기자 

0
  • 목록 바로가기
  • 인쇄


 한국의 전통사찰더보기
 박정기의 공연산책더보기
 조선왕릉 이어보기더보기
 한국의 서원더보기
 전시더보기
 한국의 향교더보기
 궁궐이야기더보기
 문화재단소식더보기
리스트페이지_004
모바일 버전 바로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