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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시 구석 구석 273] 동래 정씨 집거지 '정광필집터'
  • 우성훈 기자
  • 등록 2024-02-20 21:34:18
  • 수정 2024-04-10 23:06: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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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광필집터 표지석/사진-우성훈 기자

[우성훈 기자] 정광필(鄭光弼, 1462~1538) 집터는 조선 전기의 문신 정광필의 집이 있던 곳이다. 동래(東萊) 정씨(鄭氏) 집거지였던 정광필 집터에는 수령 500년이 넘은 은행나무 두 그루가 남아 있다. 은행나무에는 정광필과 얽힌 전설이 전해오고 있으며, 나무는 보존 가치가 높아 1972년부터 서울특별시가 보호수로 지정해 보호하고 있다. 나무의 역사적 가치와 아름다움을 기리기 위해 2012년부터 매년 10월 중순 은행나무축제를 개최한다.


정광필(鄭光弼, 1462~1538) 집터는 조선 전기의 문신 정광필의 집이 있던 곳으로, 정광필로부터 그의 후손들까지 약 400년간 동래 정씨 집거지(集居地)였다. 집은 현재 남아 있지 않고, 집이 있었던 서울특별시 중구 소공로 51의 우리은행 오른쪽 측면 화단 안에 정광필 집터임을 알리는 표지석이 설치됐다. 


정광필 신도비

정광필은 조선 중종 때 영의정을 지낸 인물이다. 정광필은 1492년(성종 23) 과거에 급제해 관직의 길에 들어섰고, 부제학과 이조참의를 거쳐 1502년(연산군 10)의 갑자사화(甲子士禍) 때 왕에게 극간하다가 아산으로 귀양갔다. 


이후 1506년(중종 1) 중종반정으로 관직에 복귀한 후 우의정, 좌의정을 거쳐 2차례 영의정에 올랐다. 조광조(趙光祖)의 급진적 개혁정치에는 반대했으나, 기묘사화(己卯士禍) 때 조광조에 대한 선처를 호소하다 좌천되기도 했다.


정광필 집터는 정광필로부터 그의 후손들까지 모두 12명의 정승을 배출해 속칭 ‘정씨 터’라고 불린다. 선조(宣祖) 때 좌의정 정유길(鄭惟吉)의 외손자인 김상용(金尙容).김상헌(金尙憲) 형제가 태어난 곳이기도 하다. 이곳은 고종 때에 정원용(鄭元容)이 집을 호화롭게 가꾸면서 더욱 유명해졌다. 




정원용은 과거에 급제한 1802년(순조 2)부터 사망할 때까지 4명의 임금을 모신 인물로, 그가 평생 기록한 일기인 '경산일록(經山日錄)'은 조선 말기 격랑의 정치사와 생활사의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정광필의 집터의 은행나무에는 영험한 전설이 전해져 내려온다. 어느 날, 정광필의 꿈에 하얀 수염을 길게 드리우고 흰 도포를 입은 선인(仙人)이 나타나, 이 터의 은행나무에 대대로 정승의 허리띠가 걸리게 될 것이라고 말한 뒤 홀연히 사라졌다고 한다. 


실제로 정광필의 집터에서 후대에 12명의 정승이 배출돼 그 꿈의 영험함을 증명했다. 2012년부터 매년 10월이면 정광필의 꿈을 모티브로 해 은행나무축제가 열린다. 축제는 회현동 주민들과 방문객들이 함께 즐기고 소원 성취를 염원하는 축제의 장으로 마련되고 있다./사진-우성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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