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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시 구석 구석 271] 우정창시자 '홍영식'
  • 박광준 기자
  • 등록 2024-02-20 17:59:50
  • 수정 2024-04-10 23:04: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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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우체국 앞에 있는 홍역식의 동상/사진-박광준 기자

[박광준 기자] 홍역식은 개항기 협판교섭통상사무, 병조참판, 우정국총판 등을 역임한 문신으로, 본관은 남양(南陽). 자는 중육(仲育), 호는 금석(琴石). 서울 출신. 아버지는 영의정을 지낸 홍순목(洪淳穆)이다. 


박규수(朴珪壽)의 문하에서 김옥균(金玉均).박영효(朴泳孝).서광범(徐光範) 등과 함께 개화사상에 눈을 떴다. 개항 직후 박규수가 죽자 중인 의관인 유홍기(劉鴻基, 호는 大致)의 지도를 받았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1873년(고종 10)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 규장각의 정자(正字).대교(待敎).직각(直閣) 등을 역임했다. 민영익(閔泳翊)과도 가깝게 지냈고, 1881년에 신사유람단(紳士遊覽團)의 조사(朝士)로 선발돼 주로 일본 육군을 시찰, '일본육군총제(日本陸軍總制)'와 '일본육군조전(日本陸軍操典)'을 작성했다.



귀국 후 통리기무아문(統理機務衙門)의 군무사부경리사(軍務司副經理事)가 되었고, 민영익과 함께 총무국을 담당했다. 1882년 홍문관부제학과 규장각직제학에 임명되었고, 부호군이 되어 임오군란의 수습에도 활약했다. 이어 참의통리내무아문사무(參議統理內務衙門事務).참의군국사무(參議軍國事務).참의교섭통상사무(參議交涉通商事務)를 역임하고 이조참의에 임명되었다가, 협판교섭통상사무(協辦交涉通商事務)를 지냈다.


1883년 6월에는 그 전해에 체결된 '한미수호조약(韓美修好條約)'에 따른 보빙사(報聘使) 전권대신 민영익을 수행, 전권부대신으로 미국을 다녀와 11월에 그 결과를 보고했다. 개화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던 그는 미국에서 돌아온 뒤부터 개화당(開化黨) 활동에 적극적으로 임했다.


1884년에는 함경북도병마수군절도사 겸 안무사로 임명됐다가, 곧 협판군국사무로 전임되고, 병조참판에 임명됐다. 같은 해 3월 27일에는 우정국총판(郵政局總辦)을 겸임해 우정국을 세우는 데 전력했다.


갑신정변의 주역 들의 사진10월 17일, 그는 김옥균.박영효 등과 우정국의 개국 축하잔치가 벌어지는 틈을 이용해 갑신정변을 일으켰다. 개화당과 일본 세력의 모의로 일어난 갑신정변은, 일본 세력에 의지해 친청온건개화파(親淸穩健開化派), 즉 사대당(事大黨)을 제거하고 개화당 정부를 수립한 큰 사건이었다.


정변 후 홍영식은 신정부의 좌우영사 겸 우포장(左右營使兼右捕將)에 제수되었다가, 곧 좌의정에 제수됐다. 그러나 정변이 3일 만에 청나라의 개입으로 실패하자, 지도층 대부분이 일본에 망명한 것과는 달리, 박영교(朴泳敎)와 함께 국왕을 호위하다 청군에게 살해됐다. 아버지 홍순목도 이 사건으로 인해 자살했다.


그는 문벌도 좋았고 성품도 온후해 누구에게나 존경을 받았다고 한다. 1894년 갑오경장으로 신원됐고, 정1품 대광보국숭록대부 규장각대제학(正一品大匡輔國崇祿大夫奎章閣大提學)에 증직됐다.


시호는 충민(忠愍)이다./사진-박광준 기자, 자료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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