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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궐이야기 50] 왕실 이야기 듣는 ‘창경궁(2)-명정전
  • 박광준 기자
  • 등록 2024-03-03 23:49:53
  • 수정 2024-04-15 17:43: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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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광준 기자] 창경궁(昌慶宮)은 서쪽으로 창덕궁과 붙어 있고, 남쪽으로 종묘와 통하는 곳에 위치하고 있다. 창경궁은 원래 1418년 세종이 즉위하면서 상왕(上王)인 태종을 모시기 위해 지은 수강궁(壽康宮)이 있던 곳이다. 1483년(성종 14)에 대왕대비인 세조의 비 정희왕후(貞憙王后) 윤씨, 성종의 생모 소혜왕후(昭惠王后) 한씨, 예종의 계비(繼妃) 안순왕후(安順王后) 한씨를 모시기 위해 수강궁을 확장해 세운 별궁이 바로 창경궁이다.



창경궁은 조선시대 왕궁 중에 유일하게 동향으로 자리잡고 있다. 남향을 하지 않고 동향을 한 이유는 이 궁이 별궁으로 조성됐기 때문으로 여겨지고, 지형상으로도 동향이 적합했던 듯하다.


성종 때 건립된 창경궁의 건물은 정전인 명정전(明政殿), 편전인 문정전(文政殿), 침전인 수령전(壽寧殿), 그리고 환경전(歡慶殿), 경춘전(景春殿), 인양전(仁陽殿), 통명전(通明殿), 양화당(養和堂), 여휘당(麗暉堂), 사성각(思誠閣) 등이었고, 궁의 둘레는 4,325척이었다. 창경궁은 임진왜란으로 모두 불타버렸다. 1615년(광해군 7) 4월에 주요 건물들을 재건하기 시작해 다음 해 11월 마무리됐다.




창경궁 재건보다 7년 앞서 창덕궁이 먼저 재건돼 법궁(法宮)이 됨에 따라 창경궁은 조선 전기에는 그다지 활용되지 않았으나, 창덕궁과 인접한 관계로 조선 왕조 역사의 중요한 무대로 활용되는 기회가 많아졌다.


창경궁은 잦은 화재로 건물이 소실됐다가 재건되기를 반복했는데, 인조 때와 순조 때에 큰 화재가 일어났다. 이처럼 창경궁에는 화재로 건물의 변화가 생기고 여러 사건도 일어났다. 그 중 특기할 만한 사건은 숙종 때 신사년(辛巳年)의 변고(變故)와 신임년(申壬年, 신축년(莘丑年)과 임인년(壬寅年))의 사화, 그리고 영조 때의 사도세자의 변고이다.




숙종은 장희빈(張禧嬪)을 총애하다가 장희빈이 숙종의 계비 민씨를 독살하는 등 많은 악행을 저지르자, 신사년(1701년)에 희빈을 처형하고 그의 일가를 숙청했다. 당시 희빈은 주로 궁내의 취선당(就善堂)에 거처했었다. 신축년(1721년)과 임인년(1722년)에는 왕세자의 즉위를 둘러싸고 노론(老論)과 소론(小論)이 대립하다가 노론의 대신들이 죽임을 당한 사건이 동궁 처소를 중심으로 벌어졌다. 영조는 사도세자를 뒤주에 가두어 굶겨 죽였는데, 당시 세자가 갇힌 뒤주는 궁내 선인문(宣人門) 안뜰에 있었다.


창경궁은 순종이 즉위하고 나서 급속히 변형되기 시작해 일제 강점기에 결정적으로 훼손됐다. 일제는 1909년 궁내 전각들을 헐어내고 동물원과 식물원을 설치했다. 권농장 자리에는 연못을 파서 춘당지(春塘池)라 불렀고, 연못가에 정자를 짓고 궁원을 일본식으로 변모시켰다. 그 뒤쪽에는 식물관을 짓고 동쪽에는 배양당을 지었고, 통명전 뒤 언덕에는 일본식 건물을 세워 박물관 본관으로 삼았다. 또한 일제는 남아 있는 건물들도 개조해 박물관의 진열실로 만들었다.




1911년에는 자경전터에 2층 규모의 박물관을 건립하고 창경궁의 명칭을 '창경원'으로 바꾸어 격하시켰고, 1912년에는 창경궁과 종묘로 이어지는 산줄기를 절단하고 도로를 설치해 주변 환경을 파괴했다. 1915년에는 문정전 남서쪽 언덕 위에 장서각(藏書閣)을 건립했고, 1922년에는 일본의 국화인 벚꽃을 수천 그루 심어 벚꽃밭을 만드는가 하면, 1924년부터 밤 벚꽃놀이를 시작했다.


창경궁은 해방 후에도 계속 동.식물원으로 이용되다가 1981년 정부에 의해 창경궁 복원 계획이 결정되면서 원형을 되찾기 시작했다. 1983년 12월 31일자로 공개 관람이 폐지되고, 명칭도 창경원에서 다시 창경궁으로 회복됐고, 이듬해인 1984년 1월 수정궁의 철거를 시작으로 6월에는 동물사육장을 폐쇄한 뒤 서울대공원으로 이관했다. 1986년 8월까지 동물원과 식물원 관련 시설 및 일본식 건물을 철거하고, 없어졌던 명정전에서 명정문 사이 좌우 회랑과 문정전을 옛 모습대로 회복해 1986년 8월 23일 일반에 공개했다.


# 명정전




명정전은 창경궁의 정전이고, 명정전의 출입문인 명정문은 중문이고, 궁궐의 정문은 홍화문이다. 홍화문의 좌우에는 익각(翼閣)이 있고, 홍화문을 들어서면 가로질러 흐르는 옥천에 옥천교가 있다. 이 다리를 지나면 바로 명정문이 나오는데, 창경궁은 경복궁의 흥례문, 창덕궁의 진선문에 해당하는 문이 없이 홍화문에서 바로 명정문으로 들어가도록 구성된 점에서 다른 궁궐에 비해 규모가 작고 격식이 떨어진다.


명정전은 다른 궁궐의 정전처럼 남향하지 않고 동향했다. 창건 당시 정치하는 곳이 아니라 대비들을 위한 이궁으로 지었기 때문으로 보인다. 



사적으로 지정된 창경궁에는 조선시대 건물로 명정전, 통명전, 홍화문(弘化門), 숭문당(崇文堂), 함인정(涵仁亭), 환경전, 경춘전, 양화당, 집복헌, 영춘헌, 관덕정, 월관문, 선인문, 명정문과 명정전 회랑 등이 있고, 석조물로는 옥천교(玉川橋), 풍기대, 관천대(觀天臺), 창경궁 내 팔각칠층석탑이 있다. 낙선재 자리는 원래 창경궁에 소속돼 있었으나 지금은 창덕궁 경내로 옮겨졌다.


정전(正殿)으로 정면 5간 측면 3간의 단층팔작기와집이다. 성종 15년(1484)에 처음 세웠으나 임진왜란으로 불타 광해군 8년(1616)에 다시 지은 조선 중기의 건축이다.


창경궁의 중심 건물인 홍화문.명정문.명정전은 중심축에 맞추어 놓여 있으나 지형을 살려 건물을 배치했기 때문에 반듯하게 좌우 대칭을 이루지 않고, 주변 행각도 이에 맞추어 약간 틀어져 있다.



화강석의 장대석들을 바른층쌓기한 2단의 높은 월대 위에 장대석 한벌대의 기단을 쌓고, 다듬은 돌초석들을 놓아 두리기둥을 세웠다. 월대 가장자리에는 돌난간을 두르지 않아 돌난간을 두른 경복궁보다 격을 낮췄는데, 이는 본래 법궁이 아니라 이궁(離宮)으로 건립됐기 때문이다. 공포의 양식은 다포양식인데, 내외삼출목으로 살미첨차의 끝은 날카로운 수서로 되어 있고 안쪽은 교두형으로 조선 중기의 공포양식을 잘 보여 주고 있다. .


가구(架構)는 전면 툇간에 고주를 세우고 고주의 윗몸 중간에 퇴보와 대들보를 걸고, 고주 위에 중보의 한쪽을, 또 대들보의 다른 쪽에 동자기둥을 세워 중보를 걸고, 다시 중보 위에 종보를 걸어 대공으로 종도리를 받치고 있다.



바닥은 전을 깔았고, 천장은 우물천장이다. 특히 보개천장(寶蓋天障)을 만들고 봉황 한쌍을 목조로 깎아 걸어 두었다. 어간의 안쪽에는 어좌를 만들고, 어좌 뒤쪽으로 일월오봉병풍(日月五峯屛風)을 둘러쳤다.


처마는 겹처마이고 용마루에는 양성을 했고, 용마루 끝에는 취두를, 합각마루 끝에는 용두를, 추녀마루에는 잡상을 늘어놓았다. 특히 정면 월대 앞으로는 봉황을 조각한 면석을 놓은 어계(御階)가 있고, 그 앞으로 어도(御道)가 명정문까지 뻗어 있다. 어도 좌우 동서로는 품계석들이 늘어서 있어 문무백관이 조하 때 품계에 맞추어 늘어서게 된다.



명정전은 1484년(성종 15) 창건됐다가 임진왜란으로 소실된 것을 1616년(광해군 8)에 중건한 건물로, 현존하는 조선시대 궁궐의 정전 중에서 가장 오래됐다. 2단의 월대 위에 정면 5칸, 측면 3칸의 단층(單層) 팔작지붕 건물로 지어, 중층인 경복궁이나 창덕궁의 정전보다 격식을 낮추었다.


건물 뒤쪽에 퇴칸 형식의 월랑을 둔 점, 건물 내부의 앞쪽으로 고주를 세우고 뒷부분 기둥을 모두 생략한 점, 정면 양 협칸의 벽면 하부를 전벽돌로 쌓은 점이 특이하다. 명정전은 뒤쪽 터가 높게 경사져 있어, 뒤를 제외한 세 면에만 경사지에 맞추어 월대를 조성했고, 좌향도 지세의 흐름에 맞추었기 때문에 정문인 명정문의 중심과 축이 일치하지 않는다./사진-박광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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