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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한산성 10] 남한산성 종각의 천흥사 동종 외
  • 이승준 기자
  • 등록 2024-03-28 22:59: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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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남한산성 종각의 천흥사 동종-서흔남 묘비-금림조합 비-

[이승준 기자] # 남한산성 종각의 천흥사 동종





종각은 아침과 저녁 일정한 시각에 종을 치던 곳으로 조선시대 때 주요한 지방에는 시내 한 가운데 종을 매달아 두고쳤다. 남한산성 종각에는 천흥사 동종이 있었는데, 남한산성으로 언제 옮겨졌는지 알 수 없다. 천흥사 동종의 몸체에 새겨진 글귀에 따르면 고려 현종 1년(1010년)에 주조된 것으로, 원래는 고려 태조4년(921년)에 태조가 창건한 충청남도 천안시 성거읍 천흥리의 천흥사에 있었다. 





이 동종은 고려시대의 동종을 대표할 수 있는 우수한 작품으로, 높이 170cm, 입지름 100cm의 크기이다. 천흥사 동종은 일제강점기에 이왕가박물관으로 옮겨졌다가 해방 이후 덕수궁미술관을 거쳐 현재는 서울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남한산성 종각의 종은 2012년에 원형의 문양 및 형태를 그대로 재현하되 타종시 종 울림을 좋게 하기 위해 약 3배 정도 더 크게 제작했다. 


남한산성 종각은 세계유산 남한산성의 탁월한 보편적 가치 중 하나인 통치경관(읍치요소)에 해당한다.


# 서흔남 묘비



서흔남 묘비는 병자호란 당시 수훈을 세운 서흔남(?-1667?)의 묘비이다. 서흔남은 수어청 병사의 사노로서 무당, 와장 등의 직업을 전전했다. 1637년(인조 15년) 청나라 군대가 남한산성을 포위해 외부와 연락이 단절되자, 서흔남이 연락업무를 자원했다. 그는 병사, 불구자, 거지 등으로 변장하고, 때로는 청군병사를 살해하면서 청군진영을 세 번이나 왕래했다. 이러한 공으로 노비 신분에서 면천되고, 당상관이 되었다. 1651년(효종2년)에는 남한산성 성벽과 4대문 문루, 동북창사의 보수공사에도 참여해서 목재 조달 업무를 관장했다. 후에 정2품 가의대부로 책봉되고 종2품 동지중추 부사가 되었다. 



묘비 중 하나는 1667년(현종8) 3월 13일에 건립했다. 또 하나의 비는 손상이 심해 건립연대를 알 수 없다. "한씨를 왼쪽에 묻었다"는 문구로 보아 부인이 사망한 후에 다시 세운 것 같다. 이 비들은 남한산성면 검복리병풍산에 있던 것을 광주시청과 광주문화원에서 발견하여 1998년에 이 위치에 안치하였다.   


# 금림조합 비


우리나라가 근대화되ㄷ기 이전의 생활 연료는 나무였기에 20세기 초반 대부분의 산들은 민둥산이었다.



1927년일제강점기 산성리 마을에는 산성 내 소나무를 보화하기 위해금림조합을 결성해 40여 명의 금림조합이 교대로 보초를 서면서 1945년까지 소나무 벌채를 감시하고 소나무를 보호하였다. 덕분에 남한산성은 지금의 울창한 소나무 숲을 보존할 수 있었다. 


금림조합 비는 금림조합원들이 금리조합장이었던 석동균과 이영래의 덕을 기리기 위해 세운 비석으로, 1934년에 세운 것으로 추정된다. 


# 포도청 터



오늘날 경찰서에 해당하는 포도청은 죄인을 체포하고, 심문하여, 순찰업무를 담당하였고, 규모는 9칸이다. 군의청은 포도청 옆에 죄인을 가두는 김옥으로 지름 20척의 언형이었다./사진-이승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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