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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궐이야기 60] 자연-조화 이룬 한국적인 궁궐 ‘창덕궁(1)’
  • 이승준 기자
  • 등록 2024-04-27 03:25:39
  • 수정 2024-04-29 01:07: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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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세계유산으로 등재된 우리나라 대표 궁궐


[이승준 기자] 서울에는 다섯 개의 궁궐이 있다. 법궁인 경복궁과 이궁인 창덕궁, 창경궁, 덕수궁 그리고 경희궁이다. 이 가운데 창덕궁은 1405년 조선의 세 번째 왕인 태종 때 건립됐다. 


조선을 세운 태조는 한양으로 도읍을 옮겨 법궁으로 경복궁을 지었으나, 개국한 지 얼마 안 돼 경복궁에서는 왕위를 두고 왕자들 사이에 큰 싸움이 벌어졌다. 이를 진압하고 왕이 된 정종은 도읍을 개성으로 옮겼다. 그러다 태종 때 다시 한양으로 옮기면서 머문 궁궐이 창덕궁이었다. 


창덕궁 전경태종이 경복궁을 두고 창덕궁에 머물면서 내세운 이유는 경복궁의 형세가 좋지 않다는 것이었지만, 추측컨데 혈육 간에 벌인 왕위 다툼의 현장을 멀리하고픈 마음이 아니었을까?


이후 여러 왕들이 창덕궁과 경복궁을 오가면서 거처하다보니, 자연히 창덕궁에는 계속 전각 수가 늘어났다. 국보 제249호로 지정된 ’동궐도‘를 통해 수많은 건물과 담장으로 둘러싸인 창덕궁의 규모를 가늠할 수 있다. 


경복궁은 넓은 터의 중심 축에 주요 건물을, 좌우 대칭으로 부속건물을 배치했다면, 창덕궁은 주변 지형과의 조화를 염두에 둔 자연스러운 공간배치가 돋보인다. 특히 북쪽의 응봉에서 내려온 산자락 아래, 왕실의 위엄과 권위를 살린 여러 전각이 높고 낮은 구릉 곳곳에 입체적으로 자리를 잡고 있기 때문에, 건축물과 공간이 반듯하게 구획된 궁궐에서 찾아 볼 수 없는 친근함과 자유분방함이 느껴진다. 또 인공적인 시설과 빼어난 자연 공간이 자연스럽게 어울리도록 꾸며진 창덕궁의 후원.  


동궐도하늘과 땅과 사람을 담았다는 부용지부터 바위 위로 흐르는 물길을 벗 삼아 풍류를 즐기고 상념을 떨쳤다는 옥류천 일원까지, 사람과 건축과 자연의 조화’를 아름답게 완성해 냄으로써 ‘자연과의 조화를 이룬 한국적인 궁궐’이라는 애칭은 얻고 있을 정도다.


창덕궁은 1592년 임진왜란 당시 다른 궁궐과 함께 잿더미로 변했다가, 1609년 광해군 원년에 주요 전각이 복구됐으나, 1623년 인조반정 때 소실된 이후 주요 전각이 화재로 소실되는 아픔을 겪었다. 


1990년부터 복원사업을 진행해 오늘날의 모습을 갖춘 창덕궁은 1997년 유네스코에 세계유산으로 등재되어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궁궐이 됐다. 이는 자연 그대로의 모습에 최소한의 손길만을 더해 완성해 낸 건축과 조경의 자연스러운 어우러짐, 그리고 그 속에서 느껴지는 펴난함과 아름다움이 창덕궁을 최고로 꼽는 이유인 것 같다.


# 돈화문


1907년 이전, 조선고적도보


창덕궁에 들어서기 전 가장 먼저 돈화문을 만나게 된다. 창덕궁 남서쪽 모서리에 자리 잡고 있는 동화문은 1412년(태종 12년)에 건립한 창덕궁의 정문으로, 왕실의 위엄상징하는 듯 너른 월대 위에 세워져 있다. 



서울의 궁궐 중 가장 오래된 이 문은 정면 5칸 규모의 이 층 목조건물로, ‘왕이 큰 덕을 베풀어 백성을 돈독하게 교화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중앙의 문은 왕의 전용문이고, 좌우의 문은 당상관 이상의 높은 관료들이 드나든다. 




특이한 점은 각 궁의 대문이라 하루 있는 경복궁의 광화문, 창경궁의 홍화문, 그리고 경희궁의 흥화문은 정면이 3칸인데, 돈화문만은 5칸이라는 것이다. 물론 좌우 양 끝의 협칸을 벽으로 막아 실질적으로는 3칸으로 사용됐지만, 여기에는 외관을 크고 장중하게 만들려는 의도가 담겨있음을 알 수 있다. 



돈화문은 왕의 행차가 있을 때나 외국 사신의 출입 등에 문이 열렸고, 신하들은 주로 서쪽의 금호문으로 드나들었다고 한다. 지금의 돈화문은 임진왜란 당시 불에 탄 것을 광해군 때  재건한 것으로, 보물 제383호로 지정됐다. 


# 돈화문 일원의 회화나무




창덕궁 정문인 동화문에 들어서면 너른 마당이 있다. 마당 서쪽으로 궁궐과 외부의 경계를 이루는 행각 주변에는 여덟 그루의 회화나무(천연기념물 제472호)가 있다. 


고대 중국의 이상적인 정치체제를 서술한 ‘주례’에 따르면, 궁궐의 조정에 세 그루의 회화나무를 심었는데 그 아래에서 삼공(가장 높은 관직에 있는 세 정승으로, 우리나라의 영의정, 좌의정, 우의정에 해당된다)이 앉아 집무를 보았다고 한다. 








회화나무는 또 가지를 자유롭게 뻗어나가는 모습이 학문을 자유롭게 탐구하는 학자의 기개와도 같다 하여 상서로운 나무라 일컬어 왔다. 이의 영향으로, 조정 관료들이 집무하는 관청이 배치되었던 돈화문 주변에도 회화나무를 심은 듯 하다. <다음 회에 계속>/사진-이승준 기자, 문화재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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