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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한산성 11]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된 '남한산성' 동문 주변(1)
  • 이승준 기자
  • 등록 2024-05-19 20:03:21
  • 수정 2024-05-21 04:53: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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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준 기자] 남한산성은 청량산을 중심으로 북쪽으로 연주봉, 동쪽으로 벌봉과 한봉을 연결한다. 해발 500m 내외의 자연지형을 따라 둘레 12Km가 넘는 성벽을 구축해 많은 병력으로 쉽게 공략할 수 없는 지리적 여건을 구비하고 있다. 동아시아 성곽 건축술의 원형과 시대별 발달을 잘 보여주는 남한산성은 672년 신라 주장성으로부터 시작해 1624년 본격적인 축성이 이루어졌고, 19세기에 이르기까지 지속적으로 개수축이 이루어졌다. 



특히 남한산성은 인조 14년(1636) 병자호란 당시 청 태종의 10만이 넘는 대군에 맞서 인조가 47일간 항전하였던 전쟁터였고, 동아시아 명.청교체기에 힘의 각축장이었다. 17세기 남한산성의 축성과 광주유수부 설치는 국토 방어와 주민 거주의 개념을 통합한 '산성거주론'을 실천한 처음이자 마지막 사례이다. 남한산성은 인조 2년(1624)에 축성된 이후 왕실의 보장처로서 역할을 하며, 300여년 넘게 체계적으로 관리하고 경영한 세계사적으로 보기 힘든 초대형 산성의 사례가 되었다. 



하지만, 1896년 을미의병의 거점이 된 남한산성은 1907년 일제에 의해 많은 건물이 파괴되었고, 1917년 성내에 있던 광주군청이 산성 밖으로 이전하면서 쇠퇴하기 시작했다. 이후 1054년 국립공원  지정, 1971년 도립공원지정으로, 남한산성은 정부에 의해 체계적으로 관리되기 시작했다. 유원지로 알려졌던 남한산성은 1999년부터 시작된 경기도의 남한산성 복원 사업으로 지금의 모습을 갖추었고, 2014년 6월 1439번째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 


# 동문 



남한산성에는 동.서.남.북에 4개의 대문이 있는데, 동문은 성의 남동쪽에 위치하며, 남문과 함께 가장 많이 사용했던 성문이다. 조선 선조 대 보수했고, 인조 2년(1624) 다시 건립하였으며, 정조 3년(1770) 성곽 개축시 함께 보수했다. 






이 때 성문마다 이름이 하나씩 붙여졌는데, 동문은 좌익문(左翼門)이라 했다. 행궁을 중심으로 국왕이 남쪽을 국정을 살피니, 동문이 좌측이 되므로 좌익문이라 한 것이다. 이 동문은 낮은 지대에 축조되었기 때문에 계단을 쌓고 그 위에 성문을 축조해 우마차의 통행이 불가능하다. 따라서 물자의 수송은 수구문 남쪽에 있는 11암문이 이용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 수문



해발 370m-40m 정동의 산 능선을 따라 축성된 남한산성은 지세가 서쪽이 높고 동쪽이 낮아 대부분 물이 이 수문을 통해 밖으로 흘러나가 있다. 산성 내에는 80개의 우물과 45개의 연못이 있은 정도로 수원이 풍부했다고 전해진다. 수구문 바닥과 천장에는 홈이 파여 있는데 적의 진입을 방지하기 위하며 쇠창살을 가로질러 놓았던 것으로 보인다. 


# 제11암문



암문은 적의 관측이 어려운 곳에 설치한 문으로, 일종의 비밀통로이기 때문에 크기는 작고 적에게 쉽게 식별될 수 있는 시설도 설치하지 않았다. 남한산성에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많은 암문이 마련되어 있는데, 모두 16개의 암문이 있다. 



좌익문(동문)에 인접한 제11암문은 홍예식이며 폭이 2.86m, 높이가 3.07m, 길이는 5.6m에 달해 암문 중 가장 규모가 크다. 동문에는 계단이 있어 우마차의 통행이 불가능하였으므로, 수레나 일반인들의 통행은 주로 이 암문을 이용했을 것으로 보인다. 



조선말 천주교 박해 때 희생 당한 신자들이 이 암문을 통해 아래 계곡으로 벼려져 시구문이라고 불리며, 천주교인의 성지순례 장소이다. 암문은 세계문화유산 남한산성의 탁월한 보편적 가치 중 하나인 군사경관(암문)에 해당한다. 


# 천주교인들의 성지순례 장소


천주교인들의 성지순례 장소 '표지석'

흐르는 물처럼 낮은 자리를 애써 찾았던 사람들, 빛을 맞이하는 동쪽을 향해 평생을 걸었던 사람들이 끝내 이 곳 남한산성의 동쪽 시구문을 지나서 하늘에 오르셨습니다. 박해시기 남한산성에서 순교한 천주교인 300여 명이 시구문을 통해 이 계곡에 버려졌습니다. 버려진 시신은 오랫동안 방치 되고 짐승에 의해 훼손되었습니다. (1801년 신유박, 1839년 기해박해, 1866년 병인박해)


“남을 섬기는 낮은 자리를 찾고 거기에서 그리스도를 만나십시오.”

“어둠 속을 걷지 말고 빛을 향해 나아갑시다”

우리 신앙의 후손들에게 순교자께서 주시는 기도제목입니다. .

이곳을 방문한 순례자들은 잠시 멈추어 서서 자신의 삶의 방향이 어디를 향하고 있는지 돌아보도록 합시다. 미움이 가득하고 슬픔이 많은 세상을 지나는 여정이지만 우리도 순교자들을 본받아 끝까지 사랑하겠노라 다짐하며 천상 교회의 승리자들께 필요한 도움을 청합시다.


# 영고터



영고가 있었던 현재 남한산초등학교남한산성에는 군량을 비롯해 남한산성 행궁 및 관청의 물품을 보관하기 위해 창고가 많이 필요했다. 그중에서도 영고는 조선시대 5군영의 하나이자 도성 남부와 남한산성을 수비하는 수어청의 관할 창고였다. 전처 201칸으로 이루어진 24개의 건물에 금, 은, 포백 및 소금 간장 등을 보관했다고 전해진다. 현재 남한산초등학교가 있는 곳은 영고가 있었던 곳이다. 


# 장터 


"한강 남부 교역의 중심지, 남한산성 성내장"


남한산성은 거래할 물건을 운송하기에는 매우 어려운 고지대이다. 심지어 동문과 ㄴㅁ문을 제외한 북문과 서문은 길도 좁고 경사도가 매우 가파르기까지 하다. 그런데 왜 이렇게 불편한 지역의 장터가 유명한 것일까? 그것은 바로 남한산성의 특수성과 남한산성 옛길(봉화로)이 지나가는  중심지역 이라는 조건 때문이었다. 중요한 도로망의 기착지이자 인구가 밀집된지역은 어김없이 큰 장터가 서기 마련이었다. 


한강 남부 교역의 중심지, 남한산성 성내장 표지석산성장(성내장)은 조선후기 한양 남부에서 송파장, 수원읍장 다음가는 장터였다. 수원읍장이 삼남대로의 중요한 장이었다면 성내장은 봉화로의 중요한 장터인 셈이다. 성내장에 우시장이 섰다는 점, 그리고 송파장에서도 팔지 않는 매우 독특한 거래 품목도 있었다는 점으로 미루어, 송파장보다 큰 규모는 아니지만 송파장의 배후 장시로 이용되었을 가능성이 크며 주둔지와 관아가 있는 군사와 행정의 중심지에 위치한 장시였기 때문에 송파장에 필적할 정도의 큰 규모였을 것이라는 점은 추측할 수 있다./사진-이승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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