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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의 멸망으로 섬겨온 왕 배반, 새로운 왕조에 참여 거부...‘두문불출’ 유래
  • 이승준 기자
  • 등록 2021-04-13 00:43:51
  • 수정 2024-02-20 07:16: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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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명재(昭明齋)/사진=이승준 기자 [이승준 기자] 방촌 황희는 고려 말.조선 초기의 대표적인 청치가로 청백리의 표상이다. 초명은 수로(壽老), 호는 방촌(厖村)이며, 본관은 장수(長水)이다. 1363년(공민왕 12) 개성 가조리에서 출생했다. 


어머니 용궁김씨가 그를 잉태했던 열 달 동안 송악산 용암폭포에 물이 흐르지 않다가 그가 태어나자 비로서 물이 쏟아져 내렸다고 한다. 1376년(우왕 2) 음직으로 복안궁녹사(福安宮錄事)가 됐다가 1383년 진사시(進士試)에 합격하고1389년(창왕 1) 문과에 급제, 이듬해 성균관학관(成均館學官)이 됐다. 고려가 망하자 두문동에 은거했으나 조선 조정의 요청과 동료들의 추천으로 1394년(태조 3) 성균관학관으로 세자우정자(世子右正字)를 겸임하고 그 후 직예문춘추관.사헌감찰.우습유.경기도도사를 역임했다. 


1400년(정종 2)형조.예조.이조 등의 정랑을 거쳐 1404년(태종 4) 우사간대부(右司諫大夫)가 됐다가 다음 해 지신사(知申事)에 올랐다가, 1408년 민무휼(閔無恤) 등의 횡포를 제거, 그 후 형조.병조.예조.이조의 판서를 역임했다. 


1416년 이조판서로 세자 서출을 반대해 공조판사로 전임됐고 이어 한성부판사(漢城府判事)가 됐다. 1418년 충녕대군(忠寧大君:世宗)이 세자로 책봉되자 이를 반대해 서인(庶人)이 되고 교하(交河)로 유배됐다가 다시 남원으로 이배(移配)됐으나 1422년((세종 4) 풀려나와 좌참찬에 기용되고, 강원도관찰사.예조판서.우의정 등을 역임했다. 



1427년 좌의정에 올랐고 1430년 투옥된 태석균(太石鈞)의 감형을 사사로이 사헌부에 부탁한 일로 탄핵을 받아 파직됐으나 이듬 해 복직 영의정에 올랐다. 1449년 벼슬에서 물러날 때까지 18년간 영의정에 재임하면서 농사의 개량, 예법의 개정, 천첩(賤妾) 소생의 천역(賤役) 면제 등 업적을 남겨 세종으로부터 가장 신망받고 있는 재상으로 명상이 높았다. 18년 동안 세종을 잘 보필해 태평성대를 이끌다가 87세에 관직에서 물러났다. 은퇴한 뒤에도 국가 중대사의 경우 세종의 자문에 응하는 등 영향력을 발휘했다. 파주 문산 반구정에서 갈매기와 같이 여생을 보내다가 향년 90세에 서거, 파주 탄현 금승리에 안장 됐다.


황희는 성품이 너그럽고 어질며 침착했다. 또 사려가 깊고 청렴하며 충효가 지극했다. 학문에 힘써 높은 학덕을 쌓아 태종으로부터 “공신은 아니지만 나는 공신으로 대우했고, 하루라도 만나지 못하면 반드시 불러서 만났으며, 하루라도 곁에서 떠나지 못하게 하였다.”할 정도로 두터운 신임을 받았다. 


그는 농사개량에 힘써 곡식 종자를 배급하고, 각 도에 명령해 뽕나무를 많이 심어 백성들의 의생활을 풍족하게 했다. 또한 ‘경제육전(經濟六典)’을 펴내면서, 내용이 중복되고 누락되거나 현실과 괴리돼 있는 많은 부분을 바로 잡았다. 


한편, 국방문제에도 관심을 기울여 북방 야인과 남방 왜에 대한 방비책을 강구했다. 그리고 예법을 바로 잡는 데에 노력해, 고려의 예법을 조선의 현실에 맞게 고치고 바로잡았다. 또한 인권에도 관심을 가져 천첩(賤妾) 소생의 천역(賤役) 면제하는 등 태종대의 국가기과늘 확립하는 데 공헌했다. 세종대에는 의정부의 최고관직인 영의정부사로서 영집현전경연예문관춘추관서운관사 세자사 상정소도제조 등을 겸임했다. 



그리고 중앙과 지방의 여러 세력을 하아로 묶는데 노력했고, 4군 6진의 개척, 왹와 문물제도의 정비, 집현전을 중심으로 한 문물의 진흥 등을 지휘, 감독했다. 특히 세종 말기에 궁중 안에 설치된 내불당(內佛堂)을 두고 일어난 세종과 유학자 중신 간의 마찰을 중화시키는 데 힘썼다. 


이처럼 그는 세종을 보좌해 나라의 기운과 문화가 번성한 시대를 이룩하는 데 기여했다. 조선왕조를 통해 가장 오랭 기간 동안, 가장 명망 있는 재상으로 칭송됐을 뿐만 아니라 인품이 원만하고 청렴해 모든 백성들로부터 존경을 받았고, 시문에도 뛰어나 몇 수의 시조 작품이 현재 전해지고 있다. 1452년(문종 2) 세종대에 가장 공이 많은 신하로 선왕과 같이 배향됐다. 


1455년(세조 1) 아들 수신(守身)이 좌익공신(佐翼功臣)에 책록되면서 순충보조공신 남원부원군으로 추종됐다. 


파주의 방촌영당(厖村影堂), 상주(尙州)의 옥동서원(玉洞書院) 등에 제향되고 세종의 묘정에 배향됐고, 시호는 익성(翼成)이다. 저서에 ‘방촌집(厖村集)’이 있다. 



# 소명재(昭明齋)


유구(悠久)한 역사(歷史)가 흐르고 시대(時代) 바뀌어도 변함 없이 유유(悠悠)이 흐르는 임진강변(臨津江邊) 기암절벽 위에  조선조(朝鮮朝) 명재상(名宰相)이신 익성공방촌황희(翌成公尨村黃喜) 선생이 관직(官職)에서 물러나 갈매기 를 벗 삼아 만년(晩年)을 즐길 반구정(伴鷗亭)과 영정(影幀)을 모신 영당(影堂) 그리고 선생(先生) 의 현손(玄孫)이고 예조판서(禮曹判書) 한성부윤군(漢城府尹) 경기도 관찰사(京機道觀察使) 여러 관직을 역임한 소양공월헌황맹헌  선생의 부조 묘(不祧廟) 가 안치(安置)돼 있다. 


이곳 파주시 문산읍 사목리 일대에 많은 후손(後孫)들이 거주(居住)하면서 조상(祖上)님들의 숭고한 유덕 을 이어 받아 선조(先祖)의 향사(享祀)와 유적(遺跡)을 보존(保存) 하고  종원 들의 친목(親睦)과 단결(團結)로 장수황씨사목종중운영위원회(長水黃氏沙鶩宗中運營委員會)가 더욱  발전 할 수 있도록  각종 회의(會議) 행사(行事)를 위한 재실(齎室) 종중운영기금(宗中運營基金)으로 2012년 3월14일 착공(着工), 소명재(佋明齋)라 칭하고 2012년 7월 27일 현판식(懸板式) 을 거행했다.


# 신문(神門)/신삼문(神三門)



신문을 셋으로 나눠 만든 것은 신의 출입과 사람의 출입을 구분키 위함이다. 3문 중 중앙은 신문(神門)이고, 양쪽의 문은 인문(人門)이라 한다. 신문은 항상 닫아두는 것이 상례이고, 인문은 열어 두어 일반 참배객의 내왕을 허용하고 있다. 신문은 춘추 제향이나 삭망(朔望)때 열어서 헌관(獻官)만 출입하고, 일반 제관은 동문으로 들어가서서문으로 나오도록 돼있다.


# 방촌영당(厖村影堂)/경기도 기념물 제29호



방촌 황희 선생의 유업을 기리기 위해 후손과 유림들이 선생의 영정을 모시고 제사를 지내는 곳이다. 선생의 호를 따라 방촌영당(厖村影堂)이라고 한다. 1452년(문종 2) 황희가 90세로 세상을 떠나자 새종의 묘정(廟廷)에 배향되고, 1632년(인조 10) 선생의 7세 손 현감 수(脩)가 백옥동(白玉洞) 유상(遺像)을 모사(模寫)해 본가에 봉안(奉安)했다가 이 후 본가 터에 영당을 짓고 영정을 모시게 됐다. 



그 후 한국전쟁으로 전부 불탄 것을 1962년 후손들이 복원했는데 정면 3칸, 측면 2칸인 초익공양식의 맞배지붕이다. 영당 내부에는 중앙에 감실을 두고 그 안에 영정을 모셨다. 건물 주위로는 방형의 담장을 둘렀고 정면 입구에는 솟을 삼문이 있다. 매년 선생의 탄신일인 음력 2월 10일 후손과 지역유림들이 모여 제향을 올리고 있다. 


# 반구정기(伴鷗亭記)/미수 허목


반구정 중건기이는 이전 성대(盛大)의 재상 황익성공의 정자(亭子)이다. 상공(相公)이 가신지 삼백년이 가까운데 정자가 무너져 밭으로 폐허로 변한지도 백년이나 되었다. 


지금 황생(黃生)은 상공의 후손으로 가 위에 집을 짓고살면서 이름을 이전대로 ‘반구정(伴鷗亭)’이라 해 이전의 ‘반구정’을 잊지 않고 있으니 역시 어진 사람이다. 상공의 혁혁한 업적은 온 백성이 저마다 칭송하는 바이다. 상공은 나아가 조정에 임하여서는 선왕(先王)을 도와 정치의 체제를 세우고 여러 관료를 바로 잡았으니 어질고 재능있는 이를 관직에 맡겨 온 사방이 걱정이 없고 백성이 생업에 안락하게 되었으며 물러나 강호(江湖)에 은퇴하여서는 갈매기나 해오라기와 같이 세상을 잊고 영귀(榮貴)를 뜬구름처럼 여겼으니 대장부의 훌륭한 사업이 반드시 이같아야 한다. 


야사(野史)에도 명인(名人)의 지난 사적을 전하고 있지만 상공은 한평생 말과 웃음이 적었고 사람들이 그 기뻐함과 노여워하는 표정을 볼 수 없었으며 일에 임하여서는 대체만을 힘쓰고 자질구레한 것을 따지지 않았다. 


그러므로 어진 재상이라 하여 그 이름이 수백대까지 인멸되지 않은 것이다. 정자는 파주에서 서쪽으로 五十里 지점에 있는 임진강 하류에 위치하였다. 매일 조수(潮水)가 나가고 뭍이 드러나면 한얀 갈매기들이 날아드는데 주위가 너무도 편편하여 광야(曠野)도 백사장(白沙場)도 분간할 수 없고 구월쯤 되면 철새들이 첫 선을 보이기 시작하며 서쪽으로는 바다의 입구까지가 20리 가량된다. 


# 반구정(伴鷗亭)/경기도 문화재자료 제12호



반구정은 황희 선생이 관직에서 물러나 갈매기를 벗삼아 여성을 보낸 곳이다. 임진강 기슭에 세워진 정자로 낙하진에 인접해있어 원래는 낙하정(洛河亭)이라 하였다. 선생이 돌아가신 후에도 그를 추모하는 8도이 유림들이 유적지를 수호하여 내려왔으나 안타깝게도 한국 전쟁때 모두 불타버렸다. 



그 뒤 이 일대의 후손들이 부분적으로 정자를 복원해 오다가 1967년 개축을 하고 1975년에는 단청과 축대를 손보았다. 그 후 1998년 유적지 정화사업의 일환으로 반구정과 앙지대 등을 목조건물로 새롭게 개축했다. 정자 내부에 조선 중기의 문신이며 학자인 미수 허목 선생이 지은 반구정기 현판이 걸려있는데 당시 정자 주변의 풍광이 잘 묘사돼 있다. 


# 황희선생 묘/경기도 기념물 제34호


황희선생묘/자료사진

황희선생 묘는 파주시 탄현면 정승로 88번길 23-73에 위치하며 황희선생 유원지로부터 약 8km 떨어져 있다. 경기도 기념물 제34호로 지정돼 있고 묘역은 3단으로 넓게 조성돼 있고 봉분 규모가 매우 크다. 


봉분의 구조는 다른 묘의 형태와 달리 전면을 ㄷ자 모양의 화강암 장대석을 이용해 호석을 쌓아 봉분과 연결시킨 특이한 구조이다. 봉분 앞에는 혼유석 상석 향로석이 있고 그 앞에 네 개의 화창이 투각된 장명등이 위치하고 있다. 


봉분 좌측에 묘비가 위치하고 그 아래로 동자상과 문인석이 좌우로 각각 한 쌍씩 설치돼 있다. 묘역 아래 비각에는 신도비가 세워져 있는데 1505년(연산군 11)에 세워졌고 신숙주가 글을 짓고 안침(安琛)이 썼다. 원래의 신도비 비문은 마모가 심해 판독이 어려워 1945년 그 옆에 새로 신도비를 제작해 세워 놓았다. 


# 앙지대(仰止臺)



앙지대는 반구정이 원래 위치했던 자리이다. 1915년 반구정을 현 위치에 옮겨 지으면서 그 자리에 황희선생의 유덕을 우러르는 마음을 담아 육각정을 짓고 ‘앙지대(仰止臺)’라 이름 하였다. 앙지대 상량문에 ‘오직 선(善)만을 보배로 여기고 다른 마음이 없는 한 신하가 있어 온 백성이 우뚝하게 솟은 산처럼 모두 쳐다 본다. 아름답구나! 이 앙지대란 이름은 시경(詩經)의 호인(好人)이라는 뜻을 취했다’라고 적고 있다. 


# 월헌사(月軒詞)



월헌사는 황희선생의 고손(高孫)인 소양공(昭襄公) 월헌 황맹헌(月軒 黃孟獻, 1472-1535) 선생의 신위를 모신 부조묘이다. 황맹헌은 황희선생의 증손인 부사(府使) 황관(黃瓘)의 아들로 문장과 글씨가 뛰어나 소세양(蘇世讓), 정사룡(鄭士龍)과 함께 당대에 이름이 높았고 그의 ‘죽지사(竹枝詞)’는 명나라에서 격찬을 받았다고 전해진다. 


# 방촌기념관



방촌기념관은 황희선생유적지 성역화 사업의 일환으로 1999년 7월 착공해 2000년 6월 완공됐다. 내부에는 대기를 비롯해 선생의 삶과 사상을 한 눈에 알 수 있도록 만든 각종 잘들이 전시돼 있다. 


세종은 자신의 즉위를 반대한 황희를 불러들였다. 두문동에서 나온 황희는 여러 관직을 두루 거치면서 태종의 두터운 신임을 얻었으나 양녕대군(세종의 형)의  세자 폐위를 반대하다 유배되는 신세가 되지만 황희의 사람됨을 눈여겨본 태종이 다시 불러 세종에게 천거했다. 그때가 세종 4년(세종 26세, 황희 60세)이었다. 


자신의 즉위를 반대하던 신하를 유배지에서 불러 과전을 돌려주며 관리를 등용한 것은 세종의 대단한 인사정책 이었다고 할 수 있다. 세종 또한 원칙과 소신이 있고, 관ㅇㅇ하고 배려하는 황희의 사람 됨됨이를 높이 평가하면 늘 곁에 두려 했다. 



세종은 분명하고 강력한 정치력이 요구되는 부분을 주로 황희에게 맡겼다. 황희로 하여금 변방의 안정을 위해 6진을 개척하고 4군을 설치하는데 관여토록 했고, 외교.문물.제도의 정비, 집현전을 중심으로 한 문물의 진흥 등을 지휘, 감독하는 일을 맡겼다. 


몇 번이나 노부의 병간호를 위해 벼슬을 내놓았지만 세종은 그의 사직을 허락하지 않았다. 황희는 24년간 내각에 있으면서 이조판서, 우의정, 좌의정을 거쳐 영의정에 올라 18년 동안 영의정으로 세종을 보필해 태평성대를 이끌었다. 황희가 탄핵을 받을 때마다 혹은 고령을 이유로 여러 번 사직을 청할 때마다 세종은 허락하지 않았고 결국 1449년(세종 310, 무려 87세까지 노익장을 과시하며 영의정 자리를 지키다가 스스로 물러났다. 벼슬에서 물러난 뒤에도 세종의 정치에 조언을 했고, 세종 사후에는 문종의 치세에도 도움을 줬다. 


황희는 사후(死後) ‘익성공’이라는 시호를 받았고, 세종에게 제향을 올릴 때 같이 제향을 올리는, 신하로서 최고의 영예를 누리기도 했다. 


그는 학력이 높고 사리에 밝았고 성격이 치밀해 공무 처리의 귀재로 불린 사람이었다. 인권을 존중해 노비들에게 함부로 대하지 않은 인정 많고 사람 좋은 선비였다. 조선시대 최장수 재상으로 있었던 화려한 경력자였음에도, 그의 청렴성에 대한 일화가 황희 정승이라는 애칭과 함께 오늘날까지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 



참고로, 황희 선생과 관련된 두문불출은 고려가 망하자 그때까지 섬겨온 왕을 배반하고 새로운 왕조에 참여하는 것을 거부한 고려의 신하 72명이 벼슬을 버리고 경기도 개풍군 광덕산 기슭에 있는 두문동(杜門洞)으로 들어가, 모든 길을 막아 빗장으 걸어놓고(杜門) 밖으로 나가지 않은 것(不出)에서 유래됐다. 


새 왕조를 세운 태조 이성계는 유능한 신하가 많이 필요했기 때문에 여러 번에 걸쳐 그들을 설득했으나 허사었다. 그들 72현(賢)은 산골 마을에서 세상과 인연을 끊고 풀뿌리와 나무껍질로 연명하면서 나오려 하지 않았다. 여기에서 두문불출(杜門不出)이라는 말이 유래됐다고 한다. 


두문동에 함께 들어간 황희도 처음에는 태조의 부름에 거절의 뜻을 전했으나, 그러나 왕조가 바뀌어도 백성은 바뀌지 않았으니 백성을 위해 일할 젊은 인재는 밖으로 나가야 한다는 두문동 선비들의 권유와 설득으로 산에서 내려오게 됐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그때 황희의 나이 30세였다. 조선 건국 초기에는 두문동에 대한 언급이 금기시되다가, 정조 7년 개성의 성균관에 표절사를 세워 고려의 충신인 두문동 72현의 제사를 모시게 했다. 


# 방촌 황희선생상(厖村黃喜 先生像)



방촌선생의 모습을 형상화해 세운 동상이다. 동상 좌대에는 황희선생이 1423년(세종 5) 감사 재직시 남긴 유묵이 음각돼 있다. 


‘집이 높으니 능히 더위를 물리치고

처마가 넓으니 바람이 통하기 쉽네

큰나무는 땅에 그늘을 만들고

먼 산 몽우리는 푸르게 하늘을 쓰는 것 같네‘


# 황희선생신도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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