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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시 구석구석 3] 대한민국 보물창고 '국립중앙박물관'
  • 이승준 기자
  • 등록 2021-04-16 03:53:55
  • 수정 2024-03-10 09:47: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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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준 기자] 2005년 10월 개관한 국립중앙박물관은 30만㎡의 방대한 공간에 30만여 점(2012년 1월 기준)의 유물을 보관, 전시하는 세계적 규모의 박물관이다. 용산의 옛 주한미군부대 자리에 위치한 이곳은 자연과 인공의 조화를 소중히 여긴 선조들의 지혜를 이어받아 호수와 정원이 어우러지게 설계를 했고 남산과 한강이 둘러싸는 ‘배산임수(背山臨水)’의 장소에 자리 잡았다.

지하 1층 지상 6층의 박물관 건물은 두 개의 건물이 하나로 연결된 듯 이어지는 외관에 전시 공간과 유물의 보관 공간, 연구 공간과 각종 부대시설이 모여 있다. 건물 내부로 들어서면 경천사 십층석탑과 고달사 쌍사자 석등이 자리 잡은 중앙 통로인 ‘역사의 길’을 중심으로 6개의 상설 전시관이 운영되고 있다. 세 개 층 좌우로 선사·고대관, 중.근세관, 기증관, 서화관, 아시아관, 조각.공예관으로 나눠 15,000여 점의 유물이 전시됐다.

# 국보 남계원 칠층석탑(國寶 南溪院 七層石搭)

국보 남계원 칠층석탑(國寶 南溪院 七層石搭)

이 탑은 세부 묘사에서는 통일신라 석탑을 따르고 있다. 그러면서도 탑신이 7층이고, 지붕이 얇고 넓으며, 위로 올라갈수록 탑신의 두께가 둔중한 느낌을 주는 고려 탑 특유의 특징도 보인다. 특히 이 탑에서는 고려 충렬왕 9년(1283)에 넣은 것으로 여지는 쪽물을 들인 종이에 은물로 글씨를 쓴 경전 일곱 축이 발견되기도 했다.

# 국보 갈항사 동서 삼층석탑(國寶 葛項寺 東西 三層石塔)  

국보 갈항사 동서 삼층석탑(國寶 葛項寺 東西 三層石塔)  

통일신라시대에는 이 탑처럼 2단의 기단부(基壇部)와 3층의 탑신부(塔身部)로 이루어진 탑이 일반적인 형태로 많이 만들어졌다. 이 탑이 있던 갈황사는 통일신라 초기 절(寺刹)인 감은사 (感恩寺)처럼 하나의 금당(金堂)에 두 탑이 있는 배치(雙塔一金堂式)였을 것으로 짐작된다. 동탑의 기단부에 새겨진 글을 통해 신라 경덕왕 17년(758)에 영묘사 언적법사 세 남매가 이 탑을 만들었음을 알 수 있다.

# 국보 고달사 쌍사자 석등(國寶 高達寺 雙獅子 石燈)

국보 고달사 쌍사자 석등(國寶 高達寺 雙獅子 石燈)

두 마리 사자가 불발기집(火舍石)을 받치고 있는 매우 특이한 형태의 석등이다. 통일신라시대에 이러한 형태의  석등이 등장 하지만, 이 고달사 쌍사자 석등은 다른 쌍사자 석등과 달리 웅크린 사자가 불발기집을 받치고 있어 이채롭다. 이 석등은 고달사가 우리나라 3대 선원의 하나인 고달원(高達院)으로 명성을 떨치던 고려시대 초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인다.

# 보물 홍제동 오층석탑(寶物 弘濟洞 五層石搭)

보물 홍제동 오층석탑(寶物 弘濟洞 五層石搭)

이 석탑은 서울 홍제동 사현사(沙峴寺) 터에 있던 탑으로 고려 정종 11년(1045) 사현사 창건 당시에 세워진 것으로 추정된다. 전체적으로 안정감이 있으면서도 온화하고 부드러운 새김법과 유행한 탑신받침의 덧붙임, 그리고 벽 테두리 장식 등에서 고려 전기 석탑의 조형미가 드러난다.

# 천수사 오층석탑(泉水寺 五層石塔)

천수사 오층석탑(泉水寺 五層石塔)

하층기단(下層基壇) 덮개돌(甲石) 아래 부재는 없어졌다. 각각의 탑신부(塔身部) 몸돌은 한 개의 돌로 이루어졌으며, 2층 몸돌부터는 그 높이가 급격히 낮아진다. 지붕 처마에는 각 충마다  3단의 받침이 있으며, 네 모서리에는 풍경의 일종인 풍탁(風鐸)을 단 작은 네 개씩 남아있다. 탑 꼭대기 장식인 상륜부(相輪部)는 현재 남아 있지 않다.

# 천수사 삼층석탑(泉水寺 三層石塔)

천수사 삼층석탑(泉水寺 三層石塔)

탑의 몸체를 받치고 있는 기단부(基壇部)는 통일신라 석탑에서 보이는 2층 기단 형식이다. 탑신부(塔身部) 몸돌은 각각 하나의 돌로 이루어졌으며, 1층과 2층탑신 아래에는 굄돌이 놓여져 있다. 지붕 처마 층단받침은 4단으로 되어 있고 지붕의 윗면은 경사가 완만하다. 탑의 꼭대기에 해당되는 상륜부(相輪部)에는 네모난 지붕 모양 장식(露盤)만 남아 있다.

# 보물 영전사 보제존자 사리탑(寶物 令傳寺 普濟尊者 舍利塔)

보물 영전사 보제존자 사리탑(寶物 令傳寺 普濟尊者 舍利塔)

보제존자(普濟尊者) 나옹(懶翁, 1320-1376)의 사리(舍利)를 모시기 위해 고려 우왕 14년(1388)에 세운 승탑(僧塔)이다. 보통 승탑이 팔각 집(八角 堂) 모양이거나 종 모양을 띠는 것에 비해 이 승탑은 특이하게 불탑(佛塔)과 같이 네모난 형태의 두 탑으로 이뤄져 매우 이채롭다. 나옹의 사리를 모신 승탑은 이 탑 외에도 그가 입적(入寂)한 여주 신륵사(新勒寺)와 그가 주지(住持)로 있던 양주(楊洲) 회암사(會巖寺) 터에도 남아 있다.

# 안흥사 오층석탑(安興寺 五層石塔)

안흥사 오층석탑(安興寺 五層石塔)

이 탑은 2층 기단 위에 5층의 탑신과 상륜부(相輪部)rk 있는일반적인 형태이다. 탑신 높이는 2층부터 급격히 줄어들며, 처마 밑 층단받침은네 단인 5층을 제외하고는 모두 다섯 단을 이루고 있다. 상륜부에는 네모난 지붕 모양의 장식(露盤)만 남아 있다. 탑의 세부 수법이 통일신라 석탑의 양식을 띠며, 균형 잡힌 비례로 보아 통일시대 말에서 고려 초기에 만들어진 석탑으로 보인다.

# 온녕군 석곽(溫寧君 石槨)

온녕군 석곽(溫寧君 石槨)

이 석곽은 경기도 양주(楊洲) 금표(禁標) 지역 안의 온령군(溫寧君) 묘에서 나왔다. 온녕군은 태종(太宗)의 일곱째 왕자이다. 무덤에서는 고려 왕실의 무덤과 달리 구리 수 저 한 벌과 분청사기 항아리 둘, 접시 두 개 만이 발견되었다, 이를 통해 조선 왕실의 검소함을 엿볼 수 있다.

# 문인석(文人石)

문인석(文人石)/무덤을 지키는 문관(조선)

# 태실 석함(胎室 石函)

태실 석함(胎室 石函)

조선시대 왕가에서는 자손이 태어나면 아기의 태(태, 탯줄과 태반)를 항아리에 넣어 좋은 곳(吉地)에 안치하여 태실을 조성하던 태실 석함으로 윗 뚜껑 옆면  4곳에 큼직한 돌기(四耳)가 있고 몸돌(身石)중앙에는 태항아리를 안치하였던 네모의 공간이 있다.

# 장명등(長明燈)

장명등(長明燈)/무덤 앞을 밝히는 석등(조선)

# 현화사 석등(玄化寺 石燈)

현화사 석등(玄化寺 石燈)

이 석등이 있던 현화사는 고려 현종(재위 1009-1031년)이 돌아가신 부모의 명복을 빌기 위해 지은 사찰이다. 고려의 큰 사찰 현화사의 명성을 짐작케 하듯, 석등의 규모가 크고 당당하다.  현종은 삼각산 삼천사 주지 법경(法經)응 현화사의 초대 주지로 임염하고, 칠층석탐과 이 석등을 만들게 하였다. 석등 앞의 배례석(拜禮石)은 출토지를 알 수 없으나, 영주 부석사의 경우처럼 석등을 향해 예를 갖추는 설치물로 함께 전시하였다.

# 보물 거돈사 원공국사 승묘탑(寶物 居崸寺 圓空國師 勝妙塔)

보물 거돈사 원공국사 승묘탑(寶物 居崸寺 圓空國師 勝妙塔)

원공국사(圓空國師) 지종(智宗,930-1018)의 묘탑(墓搭)이다. 강원도 원주 거돈사 터에는 이 승탑과 짝을 이루는 원공국사의 탑비가 남아 있다. 통일신라의 전형적인 승탑 형식을 이어받아 단정하고 균형 잡힌 팔각의 형태에 사천왕, 팔부중 등의 부조상을 새겼다. 탑신 정면 문위에 탑 이름을 새긴 점이나 탑신에 꽃띠 장식을 한 것 등은 고려시대에 새롭게 시도된 것이다.

# 보물 충주 정토사 홍법국사 탑비(寶物 忠州 淨土寺 弘法國師 塔碑)

보물 충주 정토사 홍법국사 탑비(寶物 忠州 淨土寺 弘法國師 塔碑)

비의 앞면에는 홍법국사의 행적이, 뒷면에는 제자들의 이름이 해서(楷書)로 적혀 있다. 홍법국사가 정토사에 머물다 입적하자 고려 목종은 실상(實相)이라는 탑명을 내리고 1017년 손몽주(孫夢周)에게 비의 글을 짓도록 했다. 받침돌에 거북 머리 대신 왕의 머리를 조각하는 것은 통일신라 후기에서 고려 전기에 나타나는 특징이다.

# 국보 충주 정토사 홍법국사탑(國寶 忠州 淨土寺 弘法國師塔)

국보 충주 정토사 홍법국사탑(國寶 忠州 淨土寺 弘法國師塔)

통일신라 말에서 고려 초에 활약한 홍법국사의 사리를 모셨던 탑으로 국사의 행적을 기록한 탑비와 상을 이룬다. 홍법국사는 당나라에서 수행하였고, 고려 성종 때 대선사(大禪師)를 거쳐 목종 때 국사(國師)의 칭호를 받았다. 신라의 탑 형식을 이어 팔각형을 기본으로 하면서도 공을 십자로 묶은 듯한 몸돌을 둔 것은 고려 초의 새로운 시도이다.

# 보물 흥법사 진공대사 탑과 석관(寶物 興法寺 眞空大師 塔.石棺)

보물 흥법사 진공대사 탑과 석관(寶物 興法寺 眞空大師 塔.石棺)

이 승탑(僧塔)은 신라 신덕왕과 고려 태조의 왕사(王師)를 지낸 진공대사(眞空大師) 충담(忠湛,869-940)의 묘탑(墓塔)이다. 진공대산의 입적(入寂)과 함께 세워진 것으로 여겨지는 이 승탑의 탑신은 팔각 집 모양을 기본 평면으로 하고 있지만, 기단 중대석은 원통형과 구름과 용무늬(雲龍文)가 화려하게 조각되어 있어 매우 이채롭다. 이 탑과 함께 발견된 석관(石棺)을 통해, 고승의 시신을 화장(火葬)뿐만 아니라 매장(埋葬)도 했음을 알 수 있다.

# 보물 보리사 대경대사 현기탑비(寶物 菩堤寺 大鏡大師 玄機塔碑)

보물 보리사 대경대사 현기탑비(寶物 菩堤寺 大鏡大師 玄機塔碑)

이 탑비는 신라 말에서 고려 초기에 활동하던 성주산문(聖住山門)의 대경대사 여엄(麗嚴, 862-930)의 업적을 기록한 비석이다. 대사가 입적(入寂)한 지 9년이 지난 고려 태조 22년(939)에 세워졌다. 거북 받침돌((龜跡)의 거북 머리가 용머리로 바뀌었는데, 이러한 경향은 통일신라 말부터 고려 초기에 만들어진 탑비에서 나타나는 특징 가운데 하나이다. 머릿돌의 구름과 용은 매우 생동감 있게 조각됐다.

# 보물 봉림사 진경대사 보월능공탑(寶物 鳳林寺 眞境大師 寶月凌空塔)

보물 봉림사 진경대사 보월능공탑(寶物 鳳林寺 眞境大師 寶月凌空塔)

이 승탑(僧塔)은 통일신라 말기의 고승으로 신라 선종(禪宗)으로 산문(山門) 중 하나인 봉림산문(鳳林山門)을 세운 진경대사(眞境大師) 심희(審希, 855-923)의 묘탑(墓塔)이다. 팔각 집 모양을 충실히 따르고 있으며, 전체적으로 날씬한 몸체에 장식을 절제하면서도 변화를 시도한 조형적 특징을 보인다. 특히 기단부 가운데 꽃띠를 두른 북 모양 중대석은 같은 시기 석등에서도 보이는 형식 가운데 하나이다.

# 국보 염거화상 탑(國寶 廉居和尙 塔)

국보 염거화상 탑(國寶 廉居和尙 塔)

이 승탑(僧塔)은 탑지(塔誌)가 함께 전해져, 승탑의 주인공과 만들어진 연대를 알 수 있는 매우 귀중한 탑이다. 신라 문성왕 년(844)에 선종(禪宗) 산문(山門) 가운데 하나인 가지산문(迦智山門)의 제2대 선사인 염거화상(廉居和尙, ?-844)을 위해 만든 것으로 팔각 집(八角堂) 모양에 사천왕 등의 부조상을 새긴 모습이다. 이후 만들어진 승탑들은 이 승탑을  대부분 팔각 구조에 화려한 부조상을 새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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