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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시 구석 구석 6] 사육신의 충성심과 장렬한 의기 추모키 위한 '사육신묘'
  • 이승준 기자
  • 등록 2021-04-26 00:34:19
  • 수정 2024-03-10 09:49: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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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준 기자] 사육신묘(死六臣墓)는 조선 제6대 단종의 복위를 꾀하다 목숨을 바친 사육신을 모신 곳이다. 단종 3년 음력 윤 6월(91455) 단종의 숙부인 수양대군이 왕위를 찬탈하고 즉위하자 이에 의분을 품은 충신들이 단종의 복위를 꾀하다 탄로돼 참혹한 최후를 마치니 이들을 훗날 사육신이라 부르고 있다. 


사육신의 충성심과 장렬한 의기를 추모키 위해 숙종 7년(1681)이 산 기슭에 민절서원을 세웠고, 정조 6년(1782)에는 신도비가 세워져 전해오다가, 1955년 5월에 육각의 사육신비를 세웠다. 1978년 서울특별시에서는 이 의로운 충혼들을 위로하고 불굴의 충의 정신을 널리 현창키 위해 3,240평이었던 묘역을 9,370평으로 확장하고 의절사, 불이문, 홍살문, 비각을 새로지어 충효사상의 실천도장으로 정화했다. 


본래 이 묘역에는 박팽년, 성삼문, 유응부, 이개의 묘만 있었으나 그 후 하위지, 류성원, 김문기의 허묘도 함께 추봉했다. 



단종의 숙부 수양대군이 1453년의 계유정난을 통해 그의 동생인 안평대군과 황보인, 김종서, 정분 등 3공 을 숙청, 권력을 독차지한 끝에 1455년에 단종을 몰아내고 왕위에 오르자, 동조자를 규합해 단종을 다시 왕위에 앉힐 것을 결의하고 그 기회를 살피고 있었다.


이들은 1456년 6월 본국으로 떠나는 명나라 사신의 환송연에서 성삼문의 아버지 성승과 유응부가 국왕 양쪽으로 칼을 들고 지켜서는 별운검(別雲劍)이란 것을 하게 됨을 기회로 세조 일파를 처치키로 결정했으나 이 사실이 사전에 누설돼 계획은 좌절됐다. 소설 육신전에는 한명회가 이를 막았다고 하나, 실제로는 세조가 친히 운검을 취소시켰고, 성삼문이 이에 없앨 수 없다고 반대하나 신숙주가 찬성해 취소됐다고 한다. 이 때 윤영손이 노해 신숙주를 죽이려 했으나 성삼문 등이 말리고 거사를 연기했다. 이들의 계획이 일단 좌절되자 같은 동지이며 집현전 출신인 김질 등은 뒷일이 두려워 장인 정창손을 통해 세조에게 단종 복위 계획의 전모를 밀고해 세조는 연루자를 모두 잡아들여 스스로 이들을 문초했다.



홍살문

일단 문초 과정에서의 연루자의 언급 순서는 김질의 입에서 성삼문, 이개, 하위지, 유응부가 언급되고, 먼저 끌려온 성삼문에 의해서 박팽년과 유성원, 박쟁이 추가된다(음력 6월 2일). 여기에 공조참의 이휘가 스스로 관련됐으나 미리 말을 하지 못했다고 자백하러 오면서 박중림과 권자신이 추가된다. 이후 박팽년을 문초하면서 김문기, 성승, 송석동, 윤영손, 박팽년의 아버지가 추가된다. 그리고 국문 이후 발언을 보면 최득지, 최치지, 박기년, 박득년이 추가됐다. 그리고 며칠 후(음력 6월 7일) 성삼문과 권자신의 입에서 단종의 연루 사실이 나오고, 그리고 이와 관련해 사망한 인물로 허조가 추가된다. 그리고 이후에도 사육신과 연결됐다는 이유로 수가 늘어나면서 결국 70여 명에 이른다. 


실록에는 국문 때의 기록을 보면, 그저 심문과 답변 위주로 기록돼 있으나 육신전에는 국문장에서 사육신이 세조를 디스하는 장면이 자세히 묘사돼 있다. 이 내용이 널리 알려져 있지만 애초에 배경이 되는 기록이 남효온의 전기 소설 육신전이므로 실제 사실일 가능성은 상당히 희박하다. 이와 관련된 부분은 전부 세조실록을 비롯한 내용에는 전혀 없다. 그나마도 왕이 직접 국문한 건 첫 국문 정도로 이후로는 구치관이 국문한다.


역사 인물 성삼문, 박팽년, 하위지 등에 대한 기록이나 연구가 거의 없어서 소설 속 등장 인물 성삼문, 박팽년, 하위지 등이 실질적으로 대체하고 있는 모양새다.


불이문# 성삼문


세조실록에는 처음엔 숨기려고 하다가 세조가 모든 것을 다 알고 있다며 “너는 나를 안 지가 가장 오래 되었고, 나도 또한 너를 대접함이 극히 후하였다. 지금 네가 비록 그 같은 일을 하였다고 하더라도 내 이미 친히 묻는 것이니, 네가 숨기는 것이 있어서는 안된다. 네 죄의 경중(輕重)도 역시 나에게 달려 있다.”라고 묻자 가담자들을 줄줄이 말하기 시작한다. 세조가 한 번 더 윽박지르자, 박쟁을 추가한다.


육신전에는 시뻘겋게 달군 쇠로 다리를 꿰고, 불로 입을 지져버려도, 팔을 잘라내는 잔학한 고문에도 굴하지 않고 세조를 ‘전하’라 하지 않고 ‘나리’라 불러 왕으로 대하지 않았다. 세조가 "네놈이 나를 나리라고 부르는데 그럼 내가 준 녹 (봉록)은 왜 처먹었냐?"며 묻자 성삼문은 "우리 집 창고에 가 보면 나리가 준 녹 따위, 하나도 안 썼으니까 못 믿겠으면 가서 확인해보시오."라고 고문을 당하면서도 패기있게 말했고, 이에 확인을 해 보니 정말로 녹이 그대로 있었다.


비각 전경

비각문


박팽년에 대해서 세조실록에는 곤장을 치자 아버지를 포함해 가장 많은 인원을 말한다. 더 대지 않냐고 하니 아버지까지 대었는데 더 댈게 있느냐면서 운검을 통해 거사하려고 했다는 것까지 다 고백한다.


육신전에는 친국 중에 세조가 "너 전번에 관찰사로 나가 있을 때, 나에게 올리는 공문에 분명히 '신(臣)'이라고 써 놓고 이제 와서 반역질이냐? 게다가 너도 내가 주는 녹 을 처먹었잖아?"고 화를 내면서 따졌다. 그러자 박팽년 왈, "신(臣)이라고 쓴 적 없으니까 잘 찾아봐라. 그리고 나도 우리 집 창고에 보면 녹 하나도 안 먹고 다 쌓아놨다. 네 녀석은 어찌 하는 말이 뭐 하나도 제대로 맞는 게 없는가?" 세조는 분개하여 그의 공문을 찾아봤는데 모두 신(臣)자가 아니라 거(巨)자였다. 성삼문과 같이 창고에 녹이 쌓여있던 건 덤. 결국 세조는 이런 박팽년의 몸을 시뻘겋게 불에 달군 인두로 지져버렸다.


의절사


사육신 묘역 

사육신역사관 

# 이개


세조실록에는 이개는 세조의 옛 친구였기에 실록에서 세조가 "너는 나의 옛 친구였으니, 참으로 그러한 일이 있었다면 네가 모조리 말하라."라고 말하기도 했으나 불지 않았으며, 이후 박팽년이 모든 것을 말하자 이개에게 곤장을 치니 박팽년이 분 말과 같은 말을 했다.


육신전에는 국문 중에 자신의 몸을 인두로 지지자 세조에게 "나리, 법전 어디에 인두로 사람을 지지는 형벌이 있소?"라고 되묻는다. 이는 다른 멤버들의 노골적인 디스에 비하면 별 거 아닌 발언 같지만 이 짧은 한마디는 사육신의 성격과 특성을 잘 보여주는 발언이다. 자신의 몸이 고문당하는 중에도 법전을 찾는 것은 그만큼 이들이 원칙과 명분을 중시했다는 것을 보여주는 장면이다. 이 질문에 세조는 어버버거리면서 대답을 못 했다. 그 당시 조선 법에는 인두로 사람 지지는 법이 진짜로 없었기 때문이다. 이개는 왕이라는 자가 법에도 없는 짓을 한다고 세조를 돌려 깐 셈이다. 


태양광 상록수 파빌리온 

사육신 조망지점에서 바라본 한강철교

# 하위지


세조실록에는 실록에서도 승정원에 가서야 성변(혜성)을 알게 되었다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래서 문초는 다음 사람에게 넘어간다. 사실 실록에서도 하위지는 세조를 유난히 경계하여 세조를 견제하는 발언을 많이 했으며, 세조가 6조 직계제로 돌아가려는 시도를 할 때 이를 물러서지 않고 간언하다가 빡친 세조가 "저 망할 새끼 관을 당장 벗겨버려!"라고 명하는 바람에 상투 머리채가 잡혀 끌려나가는 수모와 굴욕을 당하며 의금부에 갇히기도 했다. 세조 역시 예전부터 자신을 노골적으로 견제했던 것에 대한 감정이 폭발했던 모양. 야사나 정사나 시종일관 시크하면서도 가장 당당했던 인물이다.


육신전은 국문을 가하면서 관련 사항들을 세조가 취조하자 아무 말도 안 하고 "내가 반역죄라면 그 죄가 응당 죽음일 것인데 네 놈이 물어볼것이 뭐가 있다고 묻는 것이냐!"라고 씹었다고 한다.




# 유응부에 대해서 세조실록에는 등장하지 않는다.


육신전에는 시종 국문장에서 당당한 태도를 견지하던 성삼문을 디스했다. "자고로 서생 놈들과는 대사를 같이 하지 말라더니 정말 그렇더군. 너희들이 말려서 이렇게 됐잖아! 책만 읽으면 뭐해? 꾀가 없으니 짐승하고 다를 바 없어!"라고 면박을 주었다고. 여기서 성삼문 등이 말린 것을 다른 야사에서 자세하게 다루는데, 별운검이 한명회 때문에 들어가지 못하게 되자 유응부는 성삼문에게 그래도 우격다짐으로 한명회부터 죽이고 들어가자고 말했지만 성삼문과 박팽년이 이를 말렸다. 무인인 유응부 입장에서는 칼질도 못해보고 잡혔으니 속이 터질 것은 누구나 예상할 수 있는 일. 그래서 이 말을 들은 성삼문이 그 때만 입을 다물어서 자신의 미안함을 나타내었다고 한다. 



세조에 대한 태도도 당당해서 아예 세조를 나리도 아니고 '족하 (足下)'라고 불렀다. 참고로 '족하'는 서로 대등한 사이의 호칭이다. 그러니까 당신이 왕의 옷을 입고 왕 행세를 하고 있지만 당신은 왕이 아닐 뿐더러 조카의 왕위를 빼앗아 인륜도 저버렸으니 왕족 취급 받을 자격도 없다는 것. 아예 어떤 책에서는 당당하게 세조에게 자네와 자네 아들 놈을 죽이려고 했건만 재수가 없어서 이렇게 됐구나! 라고 말하였다. 이에 열이 단단히 뻗친 세조는 유응부의 살갗을 모조리 벗겨버릴 것을 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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