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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국가'에 남산의 소나무들이 철갑을 두른 듯하다는 구절이 있을 정도로 소나무가 많았던 '남산'
  • 박광준 기자
  • 등록 2021-05-04 18:45:44
  • 수정 2021-05-05 05:18: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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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산공원 입구/사진=이승준 기자

[이승준 기자] 남산은 서울특별시 중구와 용산구 경계에 있는 산으로, 높이 265.2m. 대부분 화강암으로 구성돼 있다. 북쪽의 북악산, 동쪽의 낙산(駱山), 서쪽의 인왕산(仁旺山)과 함께 서울 중앙부를 둘러싸고 있다. 목멱산(木覓山).종남산(終南山).인경산(仁慶山 또는 引慶山).열경산(列慶山).마뫼 등으로도 불렸으나, 주로 목멱산이라 했다.


조선태조가 한양(漢陽)을 도읍으로 정했을 때 남산은 풍수지리설상으로 안산(案山) 겸 주작(朱雀)에 해당되는 중요한 산이었다. 도성(都城)도 북악산.낙산.인왕산.남산의 능선을 따라 축성됐다.


사진=이승준 기자지금도 남산 주변에는 성곽의 일부가 남아 있다. 남산의 정상에는 조선 중기까지 봄.가을에 초제[醮祭 : 성신(星辰)에게 지내는 제사]를 지내던 목멱신사(木覓神祠), 즉 국사당[국사당(國祀堂), 또는 국사당(國師堂)]이 있었다.


또한 조선 시대 통신 제도의 하나인 봉수제(烽燧制)의 종점인 봉수대가 있어 국방상 중요한 구실을 했다. 전국 각지와 연결되는 남산의 봉수 중 제1은 양주 아차산(峨嵯山)에 응하는데, 이는 경기도.강원도.함경도와 연결됐고, 제2는 광주 천천령(穿川嶺)에 응해 경기도.충청도.경상도와 연결됐고, 제3은 무악(毋岳) 동쪽 봉우리에 응해 경기도.황해도.평안도와 연결됐다.


남산 송전탑/사진=이승준 기자

제4와 5는 제1.2.3이 육로로 이어지는 데 반해 해로로 이어지는 봉수로였고, 제4는 무악 서쪽 봉우리에 응해 경기.황해.평안도 해안 지방과 연결됐고, 제5는 양천현 개화산(開花山)에 응해 경기.충청.전라도 해안 지방과 연결됐다. 지난날 통신 제도에 중요한 구실을 했던 남산은 현재 방송탑이 정상에 세워져 전망대 시설을 갖춤으로써 관광자원으로 이용된다.


또한 이와 함께 남산은 각지로 매스미디어 전파를 발송하는 중요 기능을 하고 있다. 서울의 발달로 시가지가 확장됨에 따라 교통의 장애가 돼왔던 이 지역에 산을 둘러 일주할 수 있는 순환도로가 만들어졌고, 1.2.3호 터널이 뚫려 있다. 


남산 전망대에서 바라본 서울시 전경/사진=이승준 기자

우리 '애국가'에 남산의 소나무들이 철갑을 두른 듯하다는 구절이 있을 정도로 남산에는 원래 소나무들이 울창했으나 일본인들이 우리의 정신을 빼앗기 위해 소나무를 베어내고 아카시아 등의 잡목을 심어 산의 경관을 많이 해쳤다.


또한 8.15광복 이후 무질서한 개발로 자연이 많이 훼손됐으나 최근 들어 개발제한구역의 설치와 함께 녹화사업에 노력한 결과 사계절 아름다운 경치를 이루게 됐다. 


남산 전망대에서 바라본 서울의 야경(당시 약간의 비와 함께 먹구름이 끼어 있어 서울의 멋진 야경을 찍을 수 없어 아쉽다)사진/이승준 기자

그리고 남산의 동.서.북쪽의 사면 일대에는 자연공원인 남산공원이 설치돼 서울 시민의 휴식처로 제공되고 있다. 또한, 자연 학습장이 설치돼 학생들의 자연 학습에 많은 도움을 주고 있다. 남산이 처음 시민공원으로 개발된 것은 1910년으로, 당시 공원 표지로 세웠던 ‘漢陽公園(한양공원)’이라는 고종의 친필 비석이 옛 통일원 청사 옆에 있다.


# 목멱산 봉수대 터


목멱산 봉수대 터/사진=이승준 기자

목멱산 봉수대 터는 서울에 있다고 해 경봉수라고 불렀었는데 전국의 봉수가 집결됐던 곳이다. 봉수제도는 신호체계에 따라 연기나 불을 피워서 변방의 긴급한 사정을 중앙까지 전달해 알리며, 해당지역의 주민들에게도 알려 빨리 대처하도록 하는 일종의 통신수단이다. 멀리 바라보기 좋은 높은 산봉우리에 봉수대를 설치해 불을 피워서낮에는 연기, 밤에는 불빛으로신호를 알아 볼 수 있도록 했다. 전국 각지에서 오는 봉수는 남산에서 집결하였고, 남산 봉수대는 제1봉수대부터 제5봉수대까지 다섯 곳의 봉수대가 있었다. 이곳은 1993년에 김정호의 '청구도' 등의 관련 잘를 참고해 남선의 닷섯 개 봉수대 중 하나를 복원한 것이다. 


한편, 남산봉수대 봉수의식은 연중상설(매주 월요일 휴무) 남산봉수대에서 오정 10시 30분부터 오후 12시 20분까지 진행했으나,코로나19로 인해 오전 11시 30붙어 축소 운영한다. 


# 서울 한양도성


현존하는 전 세계의 도성 중 중 가장 오래도록(1396-1910, 514년) 성의 역할을 다한 서울 한양도성. 멀리 보이는 서울의 야경/사진=이승준 기자

한양도성은 조선왕조 도읍지인 한성부의 경계를 표시하고 왕조의 권위를 드러내면서 외부의 침입을 막기 위해 축소된 성이다. 1396년(태조5)에 백악(북악산).낙타(낙산).목멱(남산).인왕의 내사산 능선을 따라 쌓은 이후 여러 차례 고쳤다. 평귵 높이 약 5-8m, 전체 길이 약 18.6km에 이르며, 현존하는 전 세계의 도성 중 중 가장 오래도록(1396-1910, 514년) 성의 역할을 다한 건축물이다. 한양도성의 성벽에는 낡거나 부서진 것을 손봐 고친 역사가 고스란히 남아 있고, 성벽 돌에 새겨진 글자들과 시기별로 다른 돌의 모양을 통해 축성 시기와 축성 기술의 발달과정을 알 수 있다. 한양도성에는 사대문(흥인지문.돈의문.숭례문.숙정문)과 사소문(혜화문.소의문.광희문.창의문)을 두었는데, 이 중 돈의문과 소의문은 없어졌다. 2014년까지 한양도성 전체구간의 70%가 옛 모습에 가깝게 정비됐고, 숙정문.광희문.혜화문은 다시 세워졌다. 


# 국사당 터


국사당 터/사진=이승준 기자무속당(巫俗堂) 가운데 현존하는 유일(唯一)의 잔형(殘形)으로 보이는 당(堂)으로, 당(堂)의 기원을 보면 태조가 조선을 개창(開創)하고 수도를 서울로 옮긴 1년 뒤, 즉 태조 4년(1395) 12월에 북산(北山)인 백악 산신(白岳山神)을 진국백(鎭國伯)에 봉하는 한편 남산 산신(南山山神)을 목멱대왕(木覓大王)에 봉해 국가에서 치제(致祭)하게 했다. 그 뒤 목멱대왕을 봉사(奉祀)하기 위해 지은 신사를 목멱신사(木覓神祠)라 불렀다. 이 신사는 현재 남산 꼭대기 팔각정이 있는 그 자리로부터 한강쪽 서남간에 위치한다. 매년 관(官)에서 춘추(春秋)로 초제(醮祭)를 행했기 때문에 일반에서는 국사당이라고 부르게 됐다. 성종 때부터 강력한 유교 정치이념의 구현과 중종 때부터 실시한 도덕사회 건설의 지표 아래 무속신당 등 모든 음사(淫祠)는 철폐됐지만 이 국사당만은 없애지 못했다.


1925년 일제는 남산에 그들의 신사인 조선신궁(朝鮮神宮)을 세우면서 국사당을 이건(移建)할 것을 협박하고 종용해, 어쩔 수 없이 당을 헐어 그 재목으로 현재의 위치에 건립했다. 후면과 우측으로 내물린 것 외에는 형태나 구조를 모두 남산의 건물 구조와 같게 했다. 현재의 위치로 택한 것은 조선시대 진산(鎭山)의 기슭이고, 또 무학대사의 기도 자리인 데다가 이 당에서 무학대사를 모셨기 때문이라고 한다.


건물의 평수는 원래 6칸이었으나 후면과 우측을 2∼3칸 내물려 지어 약 15평 정도로서 목조와가(木造瓦家)이다.


한양도성의 성곽사이로 바라본 서울의 전경/사진=이승준 기자

사진=이승준 기자

사진=이승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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