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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양도성의 서대문 ‘돈의문’ 터...역사 속으로 사라지다.
  • 이승준 기자
  • 등록 2021-05-05 20:24:49
  • 수정 2024-03-23 00:08: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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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준 기자] 돈의문은 한양도성의 서대문으로 지금의 정동 사거리 한복판에 있었다. 1915년 일본은 도로확장을 위해 돈의문을 철거하고 건축자재용으로 일반인에 매각했다. 최초의 돈의문은 1396년 한양도성 건설과 함께 지어졌다. 그러나 풍부지리상의 이유로 1413년(태종13)에 서전문(西葥門)이 만들어지면서 성문의 기능을 넘겨주었다가 1422년(세종4)에 도성을 대대적으로 수축하면서 서전문을 닫고 새로운 돈의문이 이곳에 세워졌다. 이후 돈의문은 새문 또는 신문(新門)으로 불렸으며, 현재의 신문로라는 지명도 이에서 유래됐다./사진출처/역사속에 묻힌 돈의문



1396년(태조 5) 한양도성이 1치 완공됐을 때,서쪽 문에는 유교의 오상(五常)에 따라 돈의문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의(義)를 두텁게 하는 문’이라는 뜻이다. 1413년(태종 13) 경복궁의 지맥을 해친다는 풍수상의 이유로 이 문을 폐쇄하고 그 북쪽에 따로 서전문을 내었으나, 1422년 (세종 4)에 다시 서전문을 막고 돈의문을 열었다. 이 때부터 돈의문에는 신문 또는 새문이라는 별칭이 붙었고, 돈의문 안쪽 동네는 ‘새문안골’로 불렀다. 


북문인 숙정문과 서북문인 창의문은 풍수상의 이유로 닫아 놓았기 때문에, 서울의 서북쪽 지역을 통과하는 사람과 물자는 돈의문을 이용할 수 밖에 없었다. 개항 이후에는 서울-인천 간 육상 및 수상 교통이 늘어나고 경인철도 서대문정거장이 생김으로써 돈의문 주변의 교통량이 폭증했다.  1915년 일제는 돈의문을 철거했고, 이로써 돈의문은 한양도성의 사대문 중 유일하게 사라지게 됐다.


전차 개통 전돈의문은 사대문 중 유일하게 ‘터’로만 남아 있다. 돈의문은 지금은 새문안로와 정동으로 가는 길이 교차하는 마루턱에 위치했다. 문의 구조는 무사석으로 높게 축조한 육축 중앙에 홍예를 두어 출입토록 했고, 그 위에 정면 3칸, 측면 2칸의 단층 문루와 우진각 지붕을 세웠다. 


돈의문 밖 일대는 행정구역상으로 한성부 서부 반송방에 해당했다. 반송방은 성저십리에 속하는 다른 지역과는 달리 일찍부터 인구가 조밀했고, 사람들의 왕래가 분주했다. 


철거전 돈의문을 통과하고 있는 전차반송방은 주거에 좋은 여건을 지니고 있었다. 도성과 가까워 왕래가 편리했고, 의주나 마포로 가는 길목에 위치한 교통의 요지였다. 월암이라 불리는 바위 주변은 지대가 높아서 반송정, 서지 등 돈의문 밖에 있는 한양의 명소들을 한 눈에 내려다 볼 수 있을 정도로 조망이 좋았다. 또한 도성의 규제에서도 벗어날 수 있었기 때문에 한결 여유롭게 주거공간을 조성했다. 이로 인해 반송방 일대에는 당대 명사들 외에도 다양한 사람들이 많이 거주했다. 


돈의문 철거 전후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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