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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시 구석구석 15] 고종 등극 전에 살았던 잠저 ‘운현궁’
  • 이승준 기자
  • 등록 2021-05-10 15:17:03
  • 수정 2024-03-14 05:31: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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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이승준 기자

[이승준 기자] 운현궁(사적 제257호, 시대 1864(고종 1년), 1996년 중수)은 조선 26대 임금인 고종이 등극하기 전에 살았던 잠저(潛邸)로, 생부 흥선대원군 이하응(李昰應)의 집이다. 흥선대원군은 이곳을 무대로 10여년간 집정하면서 어린 아들을 대신해서 정치를 했다. 


서운관(書雲觀)이 있던 고개의 이름에서 따서 운현궁이라 불렀다. 


사진/이승준 기자1864(고종1년)에 에 노안당과 노락당을 짓고, 1869년(고종6)에는 이로당과 영로당(서울특별시 민속잘 제19호)을 세웠다. 창덕궁을 쉽게 드나들도록 고종 전용 경근문과 흥선대원군을 위한 공근문을 두었으나 지금은 남아있지 않다. 


노안당은 흥선대원군이 국정을 논의하던 곳이며, 노락당은 안채, 이로당은 별당으로 사용했다. 그 규모나 격식, 평면 모양으로 볼 때, 사대부 집이라기보다는 궁궐 내전에 가깝다. 흥선대원군이 세상을 떠난 후 큰 아들인 이재면을 거쳐 손자 이준용에게 상속 됐으나 한국전쟁 이후 상당부분이 매각되면서 운현궁의 규모가 크게 줄었다. 


# 운현궁의 영역 변화


사진/이승준 기자운현궁은 ‘대원군 가(家)’의 흥망성쇠에 따라 영역이 형성-확장-축소됐다. 현재 운현궁은 고종이 즉위한 후 대대적을 재정비가 이뤄진 이후의 건물들이다. 


형성기는 고종 즉위 이전으로 ‘대원군 가(家)’가 운현의 터에 자리 잡은 시기를 정확하게 알 수 없으나 고종의 즉위 이전부터 운현의 터에 자리 잡고 있었던 것으로 알려졌고, 현 경운궁에서 고종이 태어난 이후 옮겨 온 것으로 보고 있다. 


확장기는 고종 즉위 이후로 보고 있다. ‘고종실록’에 의하면, 고종의 즉위 직후 대왕대비가 대원군에 대한 우대조치로 토지와 제택의 신축과 수리를 지시하면서 운현궁 영역이 확장됐다. 호조에서 1만7,8000냥을 지원받아 1864년)고종1년)에 이로당이 건립되면서 영역과 규모가 늘어났고, 이후 ‘운현궁’이라는 명칭으로 불리게 됐다. 


사진/이승준 기자

축소기는 양관(洋館)의 건립기로 보고 있다. 1898년 흥선대원군이 숨지자 운현궁은 대원군의 큰아들 이재면이 소유하게 됐고, 1907년 일본에 체류 중이던 손자 이준용이 귀국해 거처로 사용했다. 양관의 건립시기에 대해서는 명확하게 밝혀지지 않았으나 당시의 기록을 토대로 1908년 4월에 착공해 1915년 이전에 완공한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양관의 신축으로 흥선대원군 때 조성됐던 수십 칸의 방이 훼철(毁撤)돼 영역이 축소됐다. 현재 운현궁 양관은 학교법인 덕성학원의 소유로 덕성여자대학교의 건물로 쓰이고 있다. 


# 노안당(老安堂)


사진/이승준 기자노안당은 운현궁의 사랑채로 흥선대원군(1820-1898)의 주된 거처로, 노안은 ‘논어’ 가운데 ‘노자(老子)를 안지(安之)하며’라는 구절에서 따왔다. ‘노인을 공경하며 편안하게 한다’는 뜻이다. 노안당은 노락당과 함께 1864년(고종1년)에 건립했다. 규모는 정면 6칸, 측면 3칸이고 공간 구성과 깔끔한 목조 구조, 세부기법은 궁궐에 버금가는 품격을 보여준다. 


# 노락당(老樂堂)


사진/이승준 기자

노락당은 운현궁의 안채로서 가장 중심이 되는 건물로, 주로 가족들의 회갑이나 잔치 등 큰 행사 때 이용했다. 1866년(고종 3년) 고종과 명성황후가 노락당에서 가례를 올렸고, 규모는 궁궐에 비해 손색없을 정도로 화려하고 웅장했다. 복도각을 통해 이로당까지 이어지게 한 방식은 운현궁의 특징이다. 


# 이로당(二老堂)


이로당은 노락당과 함께 운현궁의 안채로 쓰였다. ‘이로(二老)는 흥선대원군과 부대부인 여흥민씨를 의미하는 말로 해석한다. 1866년(공종3년) 고종과 명성황후의 가례 이후, 그들이 운현궁을 방문할 때 노락당을 거처로 사용했다. 


사진/이승준 기자사진/이승준 기자 

노락당이 안채에서 별궁(別宮)으로 역할이 바뀌자 새로운 안채가 필요해졌고 노안당 노락당보다 뒤늦은 1869년(고종6년)에 이로당을 지었다, 이로당 뒤펀의 ’운니당 김승현 가옥(민속문화재 제19호)‘는 원래 운현궁에 속한 건물 중 하나로 ’영로당(永老堂)‘이라고 불렀다. 


# 수직사(守直舍)


사진/이승준 기자수직사는 운현궁 정문에 들어서 오른쪽에 위치한 건물로 운현궁을 지키는 수하들이 사용했다. 고종 즉위 후 흥성대원군은 어린 나이에 왕이 된 아들을 대신해 정치 전반에 걸쳐 관여했다. 점차 흥성대원군의 권력이 커지면서 경호가 필요해지자 궁에서 운현궁으로 군졸을 파견했다. 


# 유물기념관


유물기념관은 운현궁과 흥선대원군 관련 유물 전시를 통해 운현궁의 가치와 조선 말기의 흐름을 파악할 수 있도록 구성한 전시공간으로, 운현궁 모형, 왕과 왕비가 가례를 올릴 때 착용한 예복, 운현궁의 각종 생활 유물 등을 전시했다. 현재 이 곳에 전시되는 유물은 복재품이고, 실제 유물은 서울역사박물관에 보관, 전시돼 있다. 


사진/이승준 기자

사진/이승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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