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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시 구석 구석 16] 서울 앨버트 테일러 가옥 ‘딜쿠샤’(1)...‘기쁜 마음의 궁전’
  • 이승준 기자
  • 등록 2021-05-10 21:29:50
  • 수정 2024-03-14 05:32: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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딜쿠샤(1929)/사진=문화재청 [이승준 기자] 딜쿠샤의 산스크리트어로 ‘기쁜 마음의 궁전’이라는 뜻으로 앨버트 W.테일러와 메리 L.테일러 부부가 살던 집의 이름으로, 테일러 부부는 1923년에 공사를 시작했다. 1924년 완공한 딜쿠샤는 1926년에는 화재로 소실됐다 1930년 재건됐다. 


1942년 일제기 테일러 부부를 추방한 후 딜쿠샤는 동생 윌리엄 W. 테일러가 잠시 관리했다. 이후 1959년에 자유당 조경규 의원이 딜쿠샤를 매입, 1963년 조경규 의원의 재산이 국가로 넘어가면서 딜쿠샤도 국가 소유가 됐다. 그 후 딜쿠샤는 오랜 기간 방치돼 본 모습을 잃게 됐다. 그러던 중 2005년 서일대 김익상 교수가 앨버트의 아들인 브루스 T. 테일러의 의뢰를 받아 딜쿠샤를 찾아냈다. 2006년 브루스는 마침내 66년 만에 자신이 어린 시절에 살던 딜쿠샤를 방문했고, 딜쿠샤는 그렇게 다시 세상에 알려지게 됐다. 


딜쿠샤 전경/이승준 기자딜쿠샤 정초석/딜쿠샤를 지을 때 테일러 부부는 마을 사람들의 항의와 저주 등으로 어려움을 겪었다. 그 이유는 은행나무와 샘골이 있던 땅을 당시한국사람들이 신성하게 여겼기 때문이다. 기도교인이었던 앨버트 W. 테일러는 어려움 속에서도 딜쿠샤를 잘 완공한 것은 하나님의 도움  덕분이라는 믿음으로 딜쿠샤의 정초석에 '시편' 127편 1절을 새겨 넣었다./사진 이승준 기자 권율 도원수 집터. 임진왜란 행수대첩을 거둔 도원수 권율(1537-1599) 장군집터/사진-이승준 기자딜쿠샤의 1층 거실은 테일러 부부가 지인들을 초대해 파티를 여는 공간으로 사용됐다. 거실 벽면은 한국의 습한 장마철에 대비해 벽지를 붙이는 대신 페인트로 칠해 꾸몄고, 뒤쪽 벽에는 넓고 깊은 잉글누크(후면 벽 중앙의 깊은 난롯가)를 만들어 벽난로를 설치했다. 


딜쿠샤의 1층 거실/사진-이승준 기자벽난로의 양쪽에는 등받이가 높은 나무 의자를 두어 안락한 공간을 만들었다. 계단 옆에는 큰 소리로 째깍거리는 커다란 쾌종시계가 거실 전체를 바라보고 있었고, 포치로 나가는 것은 출입문과 함께 양쪽으로 여는 큰 유리문을 세 개 더 설치했다. 


# 테일러 부부의 결혼과 한국 입국


사진-이승준 기자미국인 사업가 앨버트 W. 테일러와 영국인 연극배우였던 매리 린리는 일본 요코하마 그랜드 호텔에에서 만나 가까워졌고, 앨버트는 메리에게 아름다운 호박 목걸이를 선물하면서 자신의 마음을 전했다. 앨버트는 한국에 돌아가면서 인도로 떠나는 매리에게 자신이 꼭 찾아가겠다고 약속했고, 둘은 10개월 후 인도에서 재회했고, 1917년 6월 인도 봄베이의 성 토마스성당에서 결혼식을 올리고, 3개월에 걸친 신혼여행을 마치고 한국에 입국해 테일러 부부는 ‘작은 회색집’이라고 불리던 서대문의 한옥에서 신혼 생활을 시작했다. 


# 기쁜 마음의 궁전, 딜쿠샤


딜쿠샤와 은행나무의 모습/사진=문화재청

테일러 부부의 신혼집은 서대문에 있는 ‘적은 회색 집’이었다. 그러다 부부는 한양 도성 성곽을 따라 산책하다가 은행나무가 있는 넓은 땅을 발견했다. 이곳은 예부터 은행나무골로 불리던 ‘행촌동’이었다. 은행나무에 마음을 뺏긴 메르는 이 곳에 집을 짓고 싶어 했고, 이후 은행나무가 있는 땅의 주인이 사망했다는 소식을 듣고, 바로 그 땅을 매입하고 집을 지었다. 메리는 자신들의 집에 ‘딜쿠샤(기쁜 마음의 궁전)’라는 이름을 붙이고, 1923년 착공해 다음 해인 1924년 완공했다. 그러나 1926년 벼락에 의한 화재로 인해 1930년대에 재건, 1942년 조선총독부가 외국인추방령으로 이들 부부를 한국에서 추발할 때까지 이 곳에서 거주했다. 


# 테일러 가족의 한국에서의 생활 


앨버트 W. 테일러의 아버지 조지 알렉산더 테일러는 미국이 운산금광의 채굴권을 획득한 후 조선에 들어온 최초의 광산 기술자 중 한 명이다. 앨버트와 그의 동생 윌리엄은 부친의 일을 돕기 위해 1897년 조선에 입국, 앨버트는 운산금광(평안북도 운산군)의 광산 기술자였던 아버지를 도와 7년 동안 총 관리자로 금광을, 1936년부터 1941년까지 음첨골금광(평강금광, 강원도 세포군 삼방리)을 경영했다. 또 동생과 함께 ‘테일러 상회’도 경영했다. 


매리 L. 테일러가 그린 그린 금강산 그림/사진-이승준 기자테일러 가족은 한국에서 지내는 동안 여러 곳을 여행하던 중, 메리는 두 번의 금강산 여행을 가장 인생 깊게 생각하고 아름다운 금강산의 모습을 그림과 기사로도 남겨놓았다. 또한 여름에는 강원도 원산 갈마 해변의 별장과 강원도 화진포의 별장에서 휴가를 보내기도 했다. 


# 딜쿠샤로의 귀환


힐다 매리 L. 테일러의 출생증면서. 힐다는 1889년 9월 14일 아버지 찰스 에드워드무아트-빅스와 어머니 메리 루이자 무아트-빅스 사이에서 태어났다./사진-이승준 기자1941년 태평양 전쟁이 발발하자 일제는 한국에 거주하던 적국 국민들의 수용소에 구금하자, 앨버트 W. 테일러는 1941년 12월 수용소에 구금됐다. 메리 L.테일러의 ‘호박목걸이’에는 “형무소와 그 근처에 빨간 벽돌로 된 높은 건물이 보였다. 거기서 줄지어 걷고 있는 사람들이 우리측에서 행방이 묘연해진 사람들의 수와 일치했다”라고 서술돼 있다.  이로 미루어보아 당시 서양인들이 끌려갔던 장소는 서대문형무소 옆에 있는 감릭신학대학교의 ‘시우어 하우스’로 추정된다. 


메리 L. 테일러의 여권. 메리 L. 테일러의 유해를 들고 한국에 들어올때 사용한 여권으로, 1948년 8월 9일 발급됐다./사진-이승준 기자1942년 5월 앨버트는 풀려났지만 이후 조선총독부의 외국인추방령에 따라 한국을 떠났고, 앨버트는 다시 한국에 돌아가기 위해 노력하던 중 1948년 6월 심장마비로 숨을 거뒀다. 메리는 남편의 유해와 함께 일제가 추방한 지 6년 만인 1948년 9월 인천으로 입국했다. 언더우드 가족과 성공회 성당의 헌트 신부, 여동생 우나, 시동생 윌리엄 등의 도움으로 앨버트의 유해는 양화진외국인선교사묘원에 안치됐다. 


# 다시 세상에 알려진 딜쿠샤


서일대 서익상 교수는 2005년 브루스 T. 테일러의 의뢰를 받아 브루스가 어린 시절 살던 집을 찾기 시작, 일제강점기의 지명만으로 집의 위치를 가늠해야 했기 때문에 약 2개월이 걸렸다. 브루스는 아내 조이스 핍스와 딸 제니퍼 L. 테일러와 함께 2006년 달쿠샤를 방문해 이곳이 자신이 어린 시절 부모님과 살던 곳임을 확인했다. 실로 66년만의 귀향이다. 


브루스는 딜쿠샤가 보존돼 집이 없는 주민들의 안식처가 됐다는 사실에 감사했고, 2015년 브루스가 세상을 떠난 후 딸 제니퍼는 2016년부터 2018년까지 테일러 가문의 자료를 서울역사박물관에 기증했고, 이로서 테일러 일가의 딜ㅋ쿠사가 세상에 알려지게 됐다./다음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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